인생 결산
송년주일예배(2007.12.26)
성경본문| 디모데 후서 4장 06절 ~ 8절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송구영신예배는 드린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365일이 다 지나가고 오늘 12월31일 송년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람마다 형편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부분 한 해가 가는 게 몹시 아쉬울 겁니다. 깜냥엔 열심히 산다고 동분서주했지만 제대로 한 일도 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나 하는 착잡함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난센스 퀴즈인데, 여러분 한번 맞춰보세요. 연말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폭포, 특히 중 노년층에게 인기 있는 폭포가 있다고 합니다. 그 폭포 이름이 무엇일까요? ‘나이야가라 폭포’입니다. “나이야! 가라!” 나이 먹기 싫은 사람들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조크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느새 이렇게 세월이 흘러갔나? 하나님이 언제 나를 부르실지 모르지만 거의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짧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싶은데 ... 그렇다면 남은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갈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세월이 흐리는 게 마치 ‘모래시계’ 같이 갈수록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고 들여다보면 어떻습니까? 사실은 동일한 시간인데 느낌이 다릅니다. 맨 처음에는 모래가 천천히 떨어집니다. 그런데 조금씩 빨라지다가 나중에는 스르르 떨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면 싫든 좋든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닥쳐오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당면하게 될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때 우리 자신이 인생을 회고하면서 인생 결산을 해 보면 과연 어떨까 상상해 봅니다. 혹자는 후회나 아쉬움이 없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소를 머금고 인생을 마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혹자는 아쉽고 두려운 마음으로 당황한 채 인생을 마치게 될지 모릅니다. 단 한번의 인생인데, 후자의 경우라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오늘 본문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의 인생 결산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앞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중 전자의 경우입니다. 인생의 끄트머리에 서 있지만 아무런 후회도 없고 아쉬움도 없습니다. 당당합니다. 정말 부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인생도 마지막에 저럴 수 있으려나? 생각해 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바울과 같이 아름다운 인생 결산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바울의 인생 마지막에 남긴 두 가지 : 믿음과 사명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기록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증거한 죄 아닌 죄로 인해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있습니다. 그 고통은 너무도 큰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언제 사형에 처해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주 담담하게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회고합니다.
여러분! 흔히 우리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을 합니다.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가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맞는 말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확한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빈손 같지만 사실은 빈손이 아닙니다. 가지고 가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 결산서’를 갖고 갑니다. 바울의 인생 결산서에는 분명히 흑자로 남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신앙과 사명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마감할 때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집니다. 물질도, 권세도, 명예도, 향락도 ... 다 사라집니다. 그 중에 어느 것 하나도 갖고 가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 사라지는 그 순간에 가지고 가는 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바울이 자기 인생 가운데 마지막 남긴 두 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는 ‘믿음을 지킨 것’, 또 하나는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그는 이 두 가지가 분명히 남아 있기에 자신의 인생을 승리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이 말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천국에 들어가 영생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예수를 믿자마자 하나님이 불러 가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명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살 동안 두 가지를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믿음과 사명입니다.
죄악과 위험이 많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유혹도 많고 핍박도 많습니다. 나 자신에게 남아있는 죄성 때문에, 마귀의 시험 때문에 참 어렵습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최선을 다해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잃지 않고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당당한 겁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여기서 ‘관제’는 다른 말로 ‘전제’라고도 하는데, 구약 시대 제사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절차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인생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예감하고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는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삶이었음을 고백합니다.
7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은 자신의 생애를 무엇으로 비유합니까? 선한 싸움! 이것은 전쟁터에서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왜 이런 표현을 씁니까?
인생이 그렇게 호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온갖 어려움과 마귀의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비유는? 나의 달려갈 길, 즉 경주(Race)로 비유합니다. 오늘로 말한다면, 마라톤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 그런 말입니다. 바울은 마라톤 코스를 열심히 달렸습니다. 이제 마지막 결승점을 거의 다 당도했습니다. 중도에 탈락 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결승점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결승점이란? 영원한 천국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의 종착역은, 결승점은 오직 천국, 하늘나라입니다.
사명의 경주에서 완주한 인생, 끝까지 믿음을 지킨 인생들이 있습니다. 반면 그렇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한 자들도 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며 바울을 떠나버렸습니다.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 ” 그러나 바울은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WEC 국제 선교회(우리교회 선교사 몇 분도 그 멤버임)의 창설자 스터드(C. T. Studd)도 인생의 경주를 아름답게 완주한 사람입니다. 그는 영국 이튼 스쿨 출신이며, 캠브리지 출신의 귀족 청년입니다. 그리고 유명한 크리켓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 조지가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인생의 허무를 느낍니다. 그는 붙들고 있던 모든 것(돈, 성공, 출세 야심)을 내어놓고 영생의 가치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생을 헌신합니다. “주여! 다 드립니다. 모든 것 다 드립니다!” 이렇게 헌신합니다. 3백만 파운드라는 거액의 유산을 포기하는 각서를 씁니다.
그런데 결혼 비용을 생각해서 3천 4백 파운드는 떼어놓았는데, 약혼녀 프리슬라가 도전합니다. “우리가 혹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되는 것은 아닌가요?” 그 말을 듣고는 그것마저 하나님께 다 드리고 선교지로 떠납니다. 현지에 도착한 그는 영사 앞에서 선서하는 것으로 약식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71세까지 선교합니다. 마지막까지 주님을 위해 인생을 불사른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임종시 최후 신음조차 이 한 마디였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다 스터드처럼 헌신할 수는 없지만, 한번뿐인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닥쳐올 때 과연 어떤 인생으로 마칠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믿음을 지키고, 주어진 일에 충성하며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가치입니다!
[2] 바울의 인생 마지막에 바라본 것 두 가지 : 영생과 상급
이처럼 바울은 믿음과 사명을 남겼기에 인생을 마감하고 떠날지라도 아무런 후회도 아쉬움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앞에 펼쳐질 내세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합니다.
그 가운데 내세에 확신으로 두 가지를 바라봅니다. 영생과 상급!
① 영생의 확신 :
바울은 데모데후서와 같은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에 보면 비슷한 상황에서 죽음을 의식하며 고백합니다. 동일한 고백입니다. 빌1:21~23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 ” 그는 영생을 확신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는 눈물도 슬픔도 걱정도 질병도 죽음도 없는 새 나라 새 예루살렘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계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어제 이라크 전 대통령 후세인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 그의 모습은 구원의 확신 없었기에 두려움이 역력했다고 합니다. 그는 알라신을 믿었다고는 하나 분명한 천국의 보장을 확신하지 못하기에 당연히 그랬던 겁니다.
반면에 어느 변호사의 간증문에 기록된 한 사형수의 이야기는 영생을 확신하는 신앙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우리에게 교훈해 줍니다. 그는 비록 중죄를 지어 사형을 당했지만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확신하며 평안한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납덩이같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모두 육중한 바위에 짓눌린 듯 질식하기 일보 직전의 모습들이었다. 삼엄한 경계와 엄격한 출입 통제 하에 육군교도소의 사형 집행장에서는 어떤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 준비가 이제 막 끝났다. 사형수는 기둥에 묶여졌다. 그의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졌고 왼쪽 가슴에는 검은 표적이 부착되었다. 교도헌병들은 제자리를 찾아 사격준비자세로 들어갔다. 형 집행 후 사체를 검안할 군의관도 제자리를 찾아 섰다.
그러나 사형수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두려워하는 태도나 반항도 없었다. 그의 담담함과 순응은 묘하게도 사람들을 더욱 긴장시켰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줄이 금방이라도 탁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으로 인해 시간의 흐름마저 멎어 버린 듯했다.
검찰관이 사형수에게 다가가 정적을 깨뜨렸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사형수가 말했다.
『그전에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순간 검찰관은 혼돈에 빠졌다. 아니 사형수가 검찰관에게 거꾸로 질문을 하려고 하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사형수가 질문을 던졌다.
『검찰관님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검찰관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엉뚱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예수를 믿고 있던 검찰관은 잠시 후 그렇다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사형수는 간곡하게 말했다.
『예수님을 열심히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늘 나라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 사형수는 스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옥중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지만 그는 기회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과 접촉했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은 기쁨과 감격을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전해 왔다. 그는 확신에 찬 믿음과 담대한 전도열정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이에 그는 사형 집행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그 숨 막히던 순간에도, 자신에게 허용된 마지막 진술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에 대한 사형 집행장 마저 그에게는 전도의 장이었다. 자신의 사형수라는 신분이나 마지막 대화 상대방의 검찰관이라는 지위도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총소리가 울려 퍼진 후 조용히 숨을 거둔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와 함께 그윽한 평안이 깃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확신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인생의 마지막 결산의 때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킴으로 영생을 확신하며 천국에 당당히 들어가기를 축원합니다.
② 상급 확신 :
바울은 사명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한 사람입니다. 상급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명을 다하고도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눅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다만 바울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약속은 자기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약속된 것임을 선포함으로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8절 보면,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선언합니다.
‘면류관’은 왕관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쓰고 천국에서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영국 여왕의 왕관은 다이아몬드와 각종 보석이 3,300개라고 하는데, 하늘의 면류관은 얼마나 더 놀라운 것일까요? 바울은 그것을 바라본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괴로운 순간으로 본 게 아니라, 상을 받으려고 시상대에 올라가는 순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계14:13 말씀도 분명히 약속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 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부린다 해도 죽음 이후에 이런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천국은 영원이요, 세상은 잠깐인데 말입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영생이요, 그 후에 받을 상급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처럼 마지막 고백을 준비삽시다. 우리는 과연 인생의 결산 준비했습니까? 오늘 2006년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를 결산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직 인생의 중간 결산인 게 다행입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기에 감사합니다. 바울은 한번 뿐인 인생 을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과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부디 저와 여러분도 남은 인생 여정 가운데 가장 소중한 믿음 지키고, 주어진 사명 충성스럽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가 어느 날엔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천국영생과 상급을 확신하면서 당당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광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출 처| 홍문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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