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갈 3장6-14)
성경본문/갈라디아서 3:6-14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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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교개혁 489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란 중세시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89년전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당시 교회가 면죄부 판매를 시작한 것은 잘못이라 지적하면서 그 내용을 95개 문항으로 작성, 비텐베르그 대학(Wittenberg University) 교회 정문에 붙인 사건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중세 교회가 여러가지 면에서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 저기서 교회 개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개혁 사건이 공식적으로나 공개적으로 일어난 것은 마틴 루터의 사건을 계기로 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날을 정확하게 말하면 1517년 10월 31일이었는데 그래서 이 10월 31일을 종교 개혁일(宗敎 改革日, Reforamtion Day)로 삼고 있으며 이 10월 31일과 가장 가까운 10월달의 주일을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말이 종교개혁이지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중세 시대의 당시 교회들이 얼마나 부패했으며 얼마만큼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가 하면 인간의 죄 용서와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면죄부(免罪符)라는 것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죄 용서함과 인간 구원은 돈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의식 있는 젊은 목회자들은 모임을 갖고 교회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던 중 마틴 루터가 용감하게 깃발을 내 걸었습니다. 이렇게 중세 교회의 죄 용서함의 교리나 인간 구원의 교리가 잘못되게 된 이면에는 중세 교회가 영적으로 무기력해져 있었던 것이 주원인이었으며 또 그렇게 중세 교회가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된 이유는 교회가 성경은 가지고 있고.. 또 매주일 성경을 읽기도 하고 강론도 했지만 정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고 실천해야 할 본질적 측면인 성경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껍데기인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청에서 내려오는 지시에만 관심을 두고 교회를 운영하다 보니 그렇게 교회가 변질되고 타락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유럽 전역에 번지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맨 처음 운동의 슬로건은
"모든 교회여! 성경으로 돌아갑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고 기초적인 것이었지만 중세 교회는 이 기초 마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에 모두가 다 말씀 운동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는데 그리하여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성경의 권위였습니다. 물론, 중세 교회라고 해서 성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이 있었습니다. 또 성경도 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내용 가운데 이해하기 어렵거나 애매 모호한 것을 해석할 때는 항상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나가기 보다는 교회 지도부의 해석을 성경 해석의 최고 권위로 그리고 그 많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사건들을 판단하고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도 최고 권위를 로마 교황청에 두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나타난 것은 교회의 대표가 말하는 것은 항상 옳다 실수함도 잘못도 없다고 하면서 교황의 권위가 점점 성경 위에 올라가게 되어 나중에는 『교황 무오설』이란 말까지 주창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히도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만 종교개혁 운동으로 말미암아 다시 모든 사람은 다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도 성경 아래에 있고 교황도 성경 아래에 있다는 것을 주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 로마 교회와 교황청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주장을 하는 마틴 루터를 파면시키고 말았습니다. 동조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 불이익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마틴 루터나 죤 칼빈이나 당시 부패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만있을 사람들이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욱 열심을 내었습니다.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모여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개혁교회 Reformed Church 라는 것입니다. 이 개혁교회(改革敎會)를 개신교회(改新敎會)라고도 부릅니다 마는 이 개혁교회가 주창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부터 교회에서는 성경공부 붐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종교 개혁자들이 내건 슬로건은
“오직 믿음(Sola Fide)”이란 것이었습니다.
이 또한 아주 중요한 개혁적 교리로서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세 교회가 인간의 구원을 믿음이 아닌 돈으로 가능하다고 외쳤던 것을 다시 바로 잡은 것이며 또 하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의 철저한 확립이었습니다.
이 교리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종교 개혁자들은 주로 로마서 1:16-17과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주로 들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죄 사함을 얻게 되며 구원을 얻게되고 축복을 받게 되느냐? 본문 6절 이하에 의하면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자 본문 6절을 보십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오직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것이 무엇이냐?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믿으매 의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씀이 또 중요합니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자 이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지만 수천년 뒤의 사람들이지만 오늘날도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그런 믿음만 가지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이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8-9절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제 무슨 말씀인지 감(感) 잡으실 수 있겠습니까?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브라함 시대에는 오늘날 우리들이 믿는 것처럼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 지신 그런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의심없이 무조건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믿는 믿음의 내용은 좀 다릅니다.
그것은 본문 13-1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 사건을 믿는 자는 아브라함이 받은 그 믿음의 복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의 복과 또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여러 가지 복도 같이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좀 길어서 무슨 말인지 금방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참으로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니까 그것이 비록 손해가 커도 불행한 일이라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정 반대의 일이 생길 때가 문제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일이 일어날 이유가 없는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터진 것입니다. 자 이럴 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까? 누가 봐도 정말 잘 믿는 집안의 자녀인데 등산 갔다가 그만 실족하여 죽었습니다. 때로 물에 빠져 익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정말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만 할 그런 집인데도 불구하고 어려운 재난만 일어납니다. 마치 욥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의 집인데 왜 우환이 있느냐,
잘 믿는 집안에도 그토록 어려운 일이 생기느냐,
뭔가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냐,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말을 뱉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쉽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렇다고 해서 딱 부러지게 "네, 그것은 이것입니다. 하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 하나님의 섭리요 경륜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일이 담긴 사건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그래 그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야. 그리고 그것은 저주가 아니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비밀이 있어. 지금은 우리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결코 이것은 저주가 아니야 "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자기의 실수 때문에, 자기의 죄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어 가신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자기 실수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다 섭리와 경륜 속에 이뤄진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의미를 가진 그런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섭리와 경륜 그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의미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제 본문 13-14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자기 실수나 자기 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섭리와 경륜 속에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죄와 죽음에서 속량하기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싯점에 이르렀습니다.
자, 봅시다.
아브라함이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을 때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전적으로 믿을 때에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바로 이것이 중요한데 그것이 본문 13-14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오늘 이 시대 속에서 2006년도 10월달에 살고 있는 우리가 예수님의 사건을 예수님 자신의 실수나 죄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거나 믿지 않고 전적으로 나를 위한 사건으로 우리를 위한 사건으로 보고 믿는 다면 그리고 그 사건이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한 사건으로 믿는다면 비록 우리가 2006년도라고 하는 현대에 살고 있지만 그 믿음 때문에 14절에 있는 것 처럼 수천년전 하나님을 그렇게 잘 믿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어 많은 축복을 받았던 그 아브라함의 복이 오늘 나에게도 미치게 된다는 것인데 바로 이걸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번째로 종교개혁자들이 내건 슬로건,
“오직 은혜(Sola Gratia)” 라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도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 것이요 함께 살고 있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들도 다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요 살고 있는 집도.. 차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 가운데 은혜 중의 은혜를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신 가운데 살고 있었을 것이요 무지한 가운데 살고 있었을 것이요, 죄와 욕심 가운데 살고 있었을 것이요,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복과는 전혀 상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을 터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희망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나 같이 못난 죄인, 성격도 나쁘고, 행실도 나쁘고,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을 보면, 구원 얻기에는 자격 미달이요, 구제 불능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교회도 나오게 되었고, 예배도 드리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찬양하는 나의 이 모습을 보면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냐,
2006년도를 사는 우리가 믿음 때문에 수천년 전의 아브라함의 복 속으로 들어가게 될 뿐만 아니라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주 중요한 약속도 받게 되는데 그 약속이란 성령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다같이 본문 14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성령의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의 약속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임마누엘의 약속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말씀입니다.
"불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의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기죽지도 말기 바랍니다.
낙망하거나 절망하지도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만 살기 바랍니다.
그러면 좋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을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고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2006년 10월 29일 설교) 임정석 목사(영등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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