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Gare de Lyon
프랑스 파리 ~스위스 제네바 T.G.B
스위스 [Switzerland]
중부 유럽에 있는 내륙국가.
수도는 베른(행정수도)과 로잔(사법수도)이다. 북위 45°49'∼47°49'과 동경 5°57'∼10°30'에 있다. 남북길이는 약 225km이며, 동서 최대폭은 약 336km이다. 서쪽으로 프랑스, 북쪽으로 독일, 동쪽으로 오스트리아와 리히텐슈타인 공국, 남쪽으로 이탈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의 1/4이 높은 알프스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력 이외의 다른 천연자원은 거의 없다. 여러 종족·종교·언어를 극복하여 관습의 통일을 이루었고 약 7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를 유지해왔다. 면적 41,285㎢, 인구 7,739,000(2009 추계).
제네바 중앙역
바스티용 공원
제네바의 도심 한복판 바스티옹 공원에 '종교개혁 기념비'가 있다. 종교개혁 기념비는 이 도시의 종교개혁 역사를 잘 말해준다. 길이 100m, 높이 10m의 거대한 대리석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36년 5월. 도시국가 제네바가 프로테스탄티즘을 받아들인 지 꼭 400년 되는 때였다. 칼뱅의 정신을 따르는 전세계의 개혁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성금을 모아 기념비를 만들기로 했지만 모든 우상과 기념물을 거부했던 칼뱅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논란도 있었다.
종교개혁 기념비 중앙에는 제네바 종교개혁의 주역이었던 파렐, 칼뱅, 베즈, 녹스 네 사람의 석상(石像)이 세워져 있다. 파렐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초기에 주도한 인물이다. 베즈는 칼뱅주의의 훈련장인 제네바 학술원(현재의 제네바 대학)을 창설했으며, 칼뱅의 후계자가 됐다. 녹스는 제네바 망명 중 칼뱅의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스코틀랜드에 칼뱅주의를 따르는 장로교회를 만들었다. 석상 좌우로는 제네바 종교개혁의 표어인 '어둠 뒤에는 빛이 온다(POST TENE BRA LUX)'라는 글귀가 크게 써 있었다.
종교개혁기념비(Reformation Wall)
제네바 대학 뒤편의 바스티용 공원에 갔다. 종교개혁기념비(Reformation Wall)를 보기 위해서다. 칼빈 탄생 400주년, 제네바 대학 설립 3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17년에 제네바의 구시성벽에 만들었다. 길이 100m의 벽에 많은 종교개혁지도자들의 대리석상을 세웠다. 가장 큰 네 분의 상은 보는 사람의 좌측으로부터 파렐, 칼빈, 베자,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의 상이다. 그 외에도 여러분의 조각이 있다. 그분들은 우상이라 하여 교회 안의 성상과 성화를 치워버렸는데 현대인들은 그분들의 조각을 만들어서 설치해 놓은 것이 아이러니였다. 지난번에도 좋은 사진 찍기가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무성한 나뭇잎이 조각상 위에 얼룩을 만들고 있어서 사진이 좋지 않다.
생 피에르 교회 (Cathedrale de St. Pierre)
구시간에 의치한 뾰족한 첨탑이 인상적인 건물입니다.
12세기경 공사가 시작되어 이후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혼합한 형식의 건물이 되었습니다.
창건후 수차례의 개축된 이유에서 여러가지 건축 양식이 공존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카톨릭 교회였으나 프랑스 어권 스위스에서
1536~1564년에 칼뱅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후 칼뱅의 영향으로 제네바는 '프로테탄트의 로마'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내부의 중앙 왼쪽엔 칼뱅의 자리가 남아 있고,
교회의 오른쪽에는 '칼뱅 강당'이라는
칼뱅이 직접 신학강의를 했던 작은 예배당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지하에는 약 2000년 전의 금화와
4세기경의 예배당 흔적들이 발견된 발굴 전시관이 있습니다.
생 피에르 성당
구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생 피에르 성당은 뾰족한 첨탑이 인상적이다. 이 성당은 12 ~ 13에 건축되었는데 수차례 증, 개축되어서 현재는 여러 건축 양식이 공존된 건물이다.
프랑스 어권 스위스에서 종교 개혁의 중심 인물이었던 칼뱅이 이 성당에서 프로테스탄티즘 설교를 하기도 했다. 사원의 오른쪽에는 칼뱅이 신학 강의를 했던 작은 예배당인 '칼뱅 강당'이 있다.
첨탑에 올라가면 레만 호수와 제네바의 아름다운 시가지를 조망해 볼 수 있다.
생피에르 교회 십자가 없어
칼빈은 1509년 프랑스 노용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노용 시의 유명 인사로 교회의 서기와 회계를 보았고 어머니도 성공한 여관의 딸이었다. 칼빈은 비교적 사회적인 지위와 재산이 있는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아버지로부터는 지식에 대한 열정과 조직적인 두뇌를, 어머니로부터는 종교적인 경건을 배울 수 있었다. 노용 시에서 칼빈은 귀족의 자제들과 함께 초등교육을 받았다. 14세 되던 해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성서와 철학을 공부했지만 아버지의 강권으로 법학을 배우게 된다. 아버지가 교구의 감독과 마찰을 일으켜 파문 선고를 받게되었는데 이로 인해 아들에게 신학이 아닌 법학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고전 연구에 더 몰두했고 프랑스에서 훗날 그의 동역자인 동시에 후계자가 될 베자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음대로 학문을 연구하게 된 칼빈은 23세 되던 해에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을 썼다. 이 주석을 통해 그는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인 위치를 인정받게되었다. 그러면서 칼빈은 여러 인문주의자들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
<세네카>의 관용론 이후 칼빈은 코프라는 교수와 가까이 지내면서 칼빈의 태도가 급변하였다,. 1534년 코프 교수는 파리대학 학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코프 교수는 그의 취임연설에서 복음주의를 설파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칼빈은 회심하고 갑작스럽게 복음주의를 표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회심은 돌발적이거나 우연한 것은 아니며 언젠가는 반드시 맞이해야만 할 생의 전환이었다.
칼빈이 공식적으로 복음주의를 표방하자 개혁파를 박해하는 당국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게되어 파리를 탈출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종교개혁이라는 시대적인 과제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칼빈은 수위스의 제네바에서 먼저 종교개혁을 추진하던 파렐의 설득으로 스위스의 종교개혁에 참여하게 된다. 그 결과 종교개혁 최대의 이론적 성과로 꼽히는 '그리스도교 강요(綱要)'로 완성됐고, 이 책은 그에게 전 유럽적인 명성을 안겨 주었다.
칼뱅이 제네바에 정착한 것은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여행길에 들른 칼뱅을 붙잡고 몇 달 전 프로테스탄티즘을 받아들인 제네바 시민들을 교육시켜 주도록 강권한 사람을 파렐이었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생피에르 교회의 부속 건물에서 프로테스탄트 이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어 한동안 제네바를 떠났던 칼뱅은 32세가 되던 1541년, 도시 운영 전반에 대한 상당한 권한을 보장받고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는 베즈 등의 도움을 받으며 생피에르 교회를 거점으로 신학사상, 예배양식, 교회조직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실천해 갔다.
칼뱅은 모든 영광은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하고 인간은 찬양과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다는 굳은 신념을 가졌다. 그는 죽을 때 "장례를 치르지 말고 무덤에 어떤 표시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제네바 공동묘지에 있는 칼뱅의 무덤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훗날 그의 무덤이 잊혀질 것을 염려한 사람이 'JC'라는 글자가 새겨진 작은 돌을 세워놓았을 뿐이다. 세계개혁교회연맹 사회담당 국장 박성원 목사는 "지금의 묘지 석과 보호 철책은 아시아 신자들이 칼뱅의 묘지를 많이 찾자 최근에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칼뱅이 사용하던 의자
칼뱅이 설교하던 설교단
영국공원 - Jardin Anglais
영국식으로 꾸며진 산책로로 인해 붙여진 이름으로 몽블랑교 옆에 위치하고 있다. 제네바에서 유명한 직경이 4m, 총 6300송이의 꽃으로 장식된 꽃시계는 제네바가 국제적으로 고품격 시계생산의 본고장임을 말해준다.근처에는 국가 기념비, 선상 레스토랑, 유람선 선착장 등이 있다.
레만호의 분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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