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살후 3:6-12)
(살후 3:6)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대한민국 국민으로 국법을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하지만 그 자유는 바로 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국법을 어기게 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사를 받게 되고 위법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는 우주 만물이 유지되고 있는 자연의 순리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바라는 평화는 인간이 그 순리를 지켜나갈 때만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탐욕에 빠져 그 순리를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은 점차 이변이 생기고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다고 할지라도 자연의 이변을 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재앙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기까지는 다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자연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그 자연을 지으신 이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명령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이, 국가에서 국법을 거역하는 국민이, 자연에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이 잘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안다면 이제는 그 것을 뛰어 넘어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그것을 통치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명령이 있으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은 우리는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형벌을 받아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100 % 순종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과연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만일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거나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면 누구도 다 순종하겠지만 누구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시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선지나 사도들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는 직접 계시하시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성경의 계시가 이미 종결되었다고 요한 계시록에 기록하였는데도 여전히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사도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여전히 직접 계시하신다면 얼마나 교계가 혼란스러울 것인가? 하는 것은 가히 짐작이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이 선지자나 사도들을 성령이 감동하셔서 성경에 기록하게 하고 말씀하게 하신 부분들이 더 많습니다.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여기서 ‘하나님께 받아’라는 말(ajpov)은 ‘하나님에서부터’라는 뜻으로 선지자나 사도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온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나 사도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전해준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과 다름이 없고,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적인 눈과 귀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 한계를 아시고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계시의 통로로 삼으셔서
1)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셨으며,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명령이 무엇이며,
3)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가 받게 될 복과 벌에 대해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눅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계시하신 성경은 어느 말씀도 경중이 없이 다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명령하신 ‘하라’와 ‘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1)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대로 믿고, 2) 형편과 처지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바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 곧 우리가 복을 받을 말씀이라는 긍정적인 자세로 말씀을 듣고 읽고 순종함으로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명령
오늘 성경 본문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바울 사도는 고난 받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로와 격려의 편지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살후 1: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또한 이단들의 미혹에도 흔들림이 없도록 데살로니가 교회를 권면하는 편지를 하였었습니다.
(살후 2: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그리고 끝으로 당부하기를 순회 선교사인 사도 바울의 일행을 위해 중보적인 기도를 요청하는 편지였었습니다.
(살후 3: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지금까지 부드럽게 편지했던 억양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강경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앙의 연배나 인생의 선배로서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권위로 명령하였습니다.
(살후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여기서 ‘명하노니’라는 말(paraggevllw)은 신약 성경에 31회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예수님이 명령하실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마 15: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눅 8: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때로는 직접으로 또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명령하셨을 때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창 26: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2)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가 지나가고 모세를 불러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후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로 세우시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명령들을 말씀하신 것이 모세의 율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와 같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였을 때는 복을 받았지만 불순종하였을 때는 저주를 받게 하셨습니다.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3) 오늘 성경 말씀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 세움을 받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명령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개인적인 친분을 앞세운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후 3:6)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그와 같은 명령이 사도 권을 앞세운 권위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른 것은 진심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뜻합니다.
5)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명령들은 한 시대나 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계시가 아니라 성경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명령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성경을 읽고 들을 때에 마치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명령들을 우리에게 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억지로 굴레를 씌워 우리를 강압적으로 얽어매는 종교적인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말씀들은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시시때때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명령하는 것은 부모가 아닌 자녀를 위해서 하는 것과 같은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명령하시는 말씀을 순종할 때 위로는 하나님께는 영광이 돌려지고, 순종하는 우리에게는 복이 됨을 깨닫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 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시 128:1)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명령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한 것이 무엇입니까?
1) 떠나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단호하게 명령한 것은 그동안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친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그것을 부인하거나 제멋대로 변형하여 가르치는 자들을 멀리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살후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멀리해야 할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모든 형제’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비록 한 교회 안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그릇된 재림론에 빠져 일하지 않고 게으름에 빠져 무질서하고 무책임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결단코 멀리하라는 단호한 명령입니다.
이는 그동안 사도 바울이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왔지만 이처럼 신앙적인 면에서 상충이 될 때는 설령 지금까지 가까이 지낸 믿음의 형제라고 할지라도 떠나야 한다고 단호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2) 본받으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잘못된 재림론에 빠진 광신자들에게서 떠나라고 한 명령은 사실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떠나는 것만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와 더불어 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은 그들과 차별화된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로 바울 사도가 본을 보인 것입니다.
(살후 3:7,8)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여기서 ‘본받아야’라는 말(mimevomai)은 ‘모방자’라는 뜻으로 바울의 근면한 삶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모방을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처럼 생계에 관한 것을 요구할 권리와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열심히 일을 한 것은 그들에게 본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생계를 위해 천막을 만드는 일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열심히 한 것을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살후 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천막을 만들며 선교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고 또한 재림을 사모하는 신앙을 가르치는 동시에, 현실 생활에 전혀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현실을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3) 일을 하라
바울 사도가 이전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복음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인 삶을 가르치는 가운데 열심히 일을 해야 하며,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가르쳤습니다.
(살후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누구보다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주의 재림을 준비한다는 명목 하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성도들을 의지함으로 교회나 성도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살후 3: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멀쩡한 육신으로 일하지 않고 남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도 노동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이를 회피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교회 안에서 일을 만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일하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처럼 남의 험담을 퍼뜨리거나 타인을 모함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 입니다.
매일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남의 말만하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영혼을 망가뜨리며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장본인들입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러한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재림이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이라 해도,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합니다.
(살후 3: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남의 도움을 구치 말고 자기 손으로 벌어서 독립된 생활을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용히 일하라’는 말은 남의 일 참견하거나 야단스럽게 돌아다니지 말고, 약방의 감초처럼 여기저기 자꾸 나타나지 말고 또 자기 일에 성실하게 해서 주위
노동의 가치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점차 노동하기를 싫어합니다. 일은 하지 않고 손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데에는 뭔가 잘못된 노동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보았습니다. 직업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노동이란 본래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노동이 인간이 범죄한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수고요 고통임을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범죄 이전에도 있었던 것임을 암시해 줍니다(창 3:19). 따라서 인간이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락한 인간에게 삶의 방편이 되는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명령한 것은 곧 오늘 우리에게 명령한 것입니다.
(살후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첫 번째 명령은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게으름에 빠져서 다른 사람과 교회에 불이익을 끼치는 사람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명령은 는 열심히 믿고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나의 영적인 멘토로 삼고 그를 본받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내손으로 열심히 수고하여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남을 돕는 사랑의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후 3: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우리 모두 다른 성도들의 짐이 될까? 교회에 누가 될까봐 조심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히 일하고, 성실한 생활을 하여 교회와 사회에 모범이 될지언정 결코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회에서 주어진 시민으로서의 삶에 소홀해도 괜찮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멀쩡한 육신으로 남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어리석은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땀 흘려 수고해야 먹을 수 있게 하신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교회에서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일 중에 어느 것이라도 소홀하면 결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 재림 시에 칭찬과 상급을 받는 사람은 빈둥빈둥 노는 성도가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러운 성도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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