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행복한 사람
(시 1:1-6)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
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시 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Ps 1:1)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walk in the counsel of the wicked or stand in the way of sinners or sit in the seat of mockers.”
不从恶人的计谋, 不站罪人的道路, 不坐亵慢人的座位.
순수한 우리말로 ‘다솜’이란? ‘사랑’이라는 뜻이라면, ‘행복’은 순 우리말로 무엇이냐? 고 묻는 다면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을 뜻하는 순 우리말은 ‘참살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삶의 만족’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물론 행복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공통점 한 가지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든지 마음에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가 바로 ‘행복한 순간’이라고 할 것입니다.
만일 만족과 즐거움이 행복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만족과 즐거움’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를 테면 “무더운 날 샤워를 하고 났을 때, 미용실을 다녀오고 나서, 새 옷을 사 입고, 새 차를 뽑아 타고, 새 집으로 이사를 끝내고 나서 기타 등등 ‘아! 기분 좋다, 즐겁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참 감사하다” 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그 행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불과 10분, 반나절, 수일, 한 주간, 한 달, 일 년이 지나면 만족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다시 땀을 흘리게 되고 냄새가 나고 때가 묻고 접촉사고가 나고, 하자가 생기는 등등 만족과 즐거움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때로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행복은 오래가거나 변하지 않는 행복이 아니라 잠시 일 뿐이며, 때로는 행복이 도리어 슬픔과 근심으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행복이 다 그렇게 변덕스러운 것일까? 정말 언제 어디서나 늘 변함이 없는 ‘참살이’ 행복은 없는 것일까요?
만일 그와 같이 늘 변하지 않는 참살이 행복이 있다면 그것을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수가 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하셨을 때 조금 전까지 (요 4:9)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라고 반문하던 것과 달리 (요 4:15)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라고 간청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만복의 근원이신 주님께 “주여! 늘 참살이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그러한 갈증과 필요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늘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 행복해야 할 이유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잘되기를 원할 뿐 아니라, 혹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만은 꼭 행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여러 성도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결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비난 받을 기복주의가 아닌 까닭은,
1) 단 한 번 허락된 유일한 삶을 불행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며,
2) 결코 내가 행복하지 못하면서 가족이나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며,
3)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토록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까닭은
1) 내가 처한 환경이 다른 사람보다 불리하기 때문이거나,
2)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3) 내 팔자나 운명이 따라와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속단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결코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빈손으로 태어나 누구나 다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복’이라는 단어가 무려 995절에 기록이 되어 있을 정도로 성경은 행복에 관한 책이 아니라 행복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늘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제일 인간에게 복을 주실 정도로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창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범죄 하여 하나님이 주신 복을 상실하고 죄와 고통과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을 전파하신 일과 그 유명한 산상 팔복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모두가 다 ‘복이 있나니’라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잘못 믿고 있거나, 아니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분명히 복을 받은 사람이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나누어야 할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일지라도 때로는 세상 사람들이 행복의 절대 조건으로 생각하는 건강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것들을 소유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들을 소유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행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행복은 일시적인 것이며 언제 떠날지 모르는 파랑새와 같은 것이며, 그것이 떠난 자리는 고통과 불행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매주 강해하려는 시편을 시작하는 오늘 성경 시편 첫 시작을 보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늘 행복한 사람’ 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를 직역하면 ‘아쉬레 하이쉬! 매우 복 되도다, 그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그 ‘복’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복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늘 행복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지금까지 내가 바라고 원했던 행복이 과연 참된 행복이었는가? 하는 것을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설령 그렇지 못하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며 또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2. 불행의 원인
오늘 성경에서 ‘복 있는 사람, 복된 사람, 늘 행복한 사람’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남보다 더 많은 부귀권세를 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모두 늘 행복하기를 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이미 인간의 행복을 위해 이미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가로막고 있는 죄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를 이해하기 쉽게 번역한 성경을 소개하면 “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시편이 지금으로부터 삼천년 전에 기록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나쁜 사람들, 죄인들, 빈정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이민을 가려고 한다면 이 지구를 떠나야만 할 정도로 인간이 사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죄가 없고 죄인이 없는 곳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만 할까요? 세상에서 죄인이 없는 곳을 찾지 말고 죄와 싸워서 이겨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곳에는 죄가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죄가 없는 곳을 찾지 말고 죄와 싸워 이기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늘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오히려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온갖 죄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렘 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여기서 ‘허물’이라는 말(@/[;)은 ‘불법, 부정, 죄악’이라는 뜻이고, 그 다음 ‘좋은 것’이라는 말(b/f)은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 가운데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인 생명나무를 심어 놓으셨다는 창 2:9에 처음 기록된 단어로 ‘좋은, 선한, 즐거운, 선, 이익, 번영, 복지’라는 뜻으로 인간이 바라는 행복의 모든 조건들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또한 ‘막았느니라’는 말([n"m;)은 ‘억제하다, 거절하다, 제지하다’라는 뜻으로 이미 막아 버렸다는 완료형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물론 그것이 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를 돌이켜 보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노라면 설령 예수를 믿을지라도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살려면 세상을 버리고 떠나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예수를 믿고 교회를 열심히 다닐지라도 만일 죄에 엮이게 되면 늘 행복은 고사하고, 그 때부터 고민과 불안과 고통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무엇보다 죄에 대해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떤 한계를 느낄 때 울면서 부모를 찾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도 그럴 때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외에 더 좋은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3. 행복에 대한 대안
우리가 늘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인간에게 좋은 것을 가로막고 있는 죄와 싸우기 위해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하는데 그 대안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달리 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패배하신 적이 없으시고 인간을 죄에 빠뜨린 사단이 가장 무서워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태양을 등지고 걸어가면 내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항상 나보다 앞질러가지만 태양을 바라보고 가노라면 정반대로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설령 제자리에 가만이 서있다고 할지라도 그림자는 나를 앞서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삶을 하나님과 등지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감이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의 길이 빛이 나의 발에 등불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늘 가까이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는 방법도 가르치고 늘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묵상’이라는 말(['ygiy)은 ‘신음하다, 슬퍼하다, 깊이 생각하다’는 뜻의 미완료 형으로 ‘주야로 묵상 한다’는 의미는 그것을 거듭하여 읽고 마음속에 이미지 시켜 두는 것으로서 중얼중얼 소리 내어 읽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성경은 무엇이 옳고 그르고,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우쳐 주며, 또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따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죄와 오만함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의와 겸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전쟁이든지 운동이든지 가장 적극적인 방어는 적을 공격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인생살이에 있어서 죄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대안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처럼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묵상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바라는 행복을 가로 막고 있는 죄를 이기는 최선의 대안일 뿐 아니라 인간이 바라는 늘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가나안 사람들의 죄에 물들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 10: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b/f)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좋은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한 가정 활을 하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되려면. 죄와 무관한 성결한 가정이 되려면 온 가족이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며 성경 말씀을 즐거워하며,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가족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모든 부모는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자녀들의 행복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그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리 자녀들이 늘 행복하게 되는 비결인 것입니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인 여호와시다.” (신 6:5) “너는 네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라.” (신 6:6) “내가 오늘 너희에게 주는 이 명령들을 네 마음에 새겨” (신 6:7) “너희 자녀들에게 잘 가르치되 너희가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 그들에게 말해 주라.” (신 6:8) “또 너는 그것들을 네 손목에 매고 네 이마에 둘러라.” (신 6:9) “그것들을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 적어 두라.”
현대인들이 밤낮 스마트 폰을 붙잡고 문자 오기를 기다리며 은연중에 스마트 폰에 중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며 점차 성경 읽기 연구하기 묵상하기 훈련받기에 소홀히 하면서 마음에 행복은 점차 사라지고 불만과 불평이 늘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중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스마트 폰에 성경과 찬송과 설교와 기독교 양서를 입력했다가 시시 때때로 천국에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문자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행복한 사람이고 지금은 어려움 같으나 결국은 형통하게 하시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어디서나 늘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소극적으로는 인간의 행복을 가로 막고 있는 죄를 멀리하고 단절하는 구체적인 결단을 해야 합니다.
1) 늘 행복한 삶을 사는 재물이 많고 적고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악을 도모하는 사람을 친구로 삼지 않고 멀리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하는 자체가 바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2) 늘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인도하심에 복종하며, 항상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쓰는 삶을 사는 것이 늘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할 수 있고 죄를 이길 수 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처럼 가뭄이나 환난과 같은 어려움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능히 이겨 낼 뿐 아니라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것처럼,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을 통해서 형통한 복을 받아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여기서 ‘형통하리로다’라는 말(jl'x)은 ‘나가다, 발전하다, 형통하다’는 뜻의 미완료 형으로 늘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악한 꾀를 내고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기를 즐겨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왕겨처럼 하나님께서 뿔뿔이 흩어버리신다고 하였습니다.
(시 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 길을 가는 과정은 행복하기보다 외롭고 힘들고 불행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정해 주시고, 보살펴주시고, 함께 해 주시지만, 악인은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 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늘 행복한 ‘참 살이’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늘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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