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마 13:31-32)

미션(cmc) 2013. 10. 19. 07:20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마 13:31-32)

 (마 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이 아니라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은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 영혼이 있는 것과 영혼이 없는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생명이 있다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성장하며 꽃과 열매를 맺으면서 아름답게 그 생명을 이어가며 번식하고 있지만, 생명이 없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고목이 되고 퇴색되고 변질 할 뿐입니다.
2) 영혼이 없는 동물은 수달이 물에다 집을 짓고 새가 둥지를 틀지만 수백 년, 수천 년이 가도 변함없이 똑같은 방법으로 집을 짓고 있습니다.
3) 그러나 영혼이 있는 인간은 끊임없는 변화를 거듭하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 첫째 아담의 가능성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후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창 1:28, 개정)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정복하라’는 말(vb'K, 카바쉬) )은 ' 지배하다, 짓밟다, 속박하다, 억압하다, 강요하다' 는 뜻으로 수고가 필수적으로 따르는 명령입니다.
아담이 정복해야 할 곳은 한 지역이 아니라 땅이며, 아담이 다스려야 할 대상은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 물속까지입니다.
또한 ‘다스리라’는 말(hd;r 라다))은 ‘밟다, 다스리다, 지배하다’ 라는 명령형으로 아담에게는 단지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인간들이 볼 때 그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복이라는 생각보다는 힘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앞서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그 일을 하려면 많은 조력자와 여러 가지 도구가 없이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맨손으로 땅을 정복하라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그와 같은 한계를 잘 아시면서 아무런 도구도 주시지 않고 힘든 명령만 하셨을까요?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무런 도구도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각종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주셨으며, 인간이 스스로 길을 닦고 다양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두신 생명력이고 무한에 가까운 잠재력과 가능성이라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생명력과 가능성이 아담과 하와 한 가정으로 시작한 인류가 지금은 75억이 번성하여 지구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지혜와 잠재력이 비록 빈손과 알몸으로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마치 보물찾기처럼 하나님이 지구 도처에 숨겨 놓으신 무한한 자원을 개발하고 연구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이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인간의 지혜의 가능성의 결과물들인 것입니다. 그 가능성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론 그 세상은 아담의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탐욕으로 말미암아 자연이 훼손이 되고 동식물들이 멸종이 되어가고 지구가 중병에 들어 고통하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인간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당하고 갈수록 동물의 세계에서도 볼 수 없는 불의와 추악함과 무자비함은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세상을 바라보실 때, 그와 같은 인간을 바라보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하나님의 아픔을 잘 표현해주는 성경 말씀이 노아 홍수 심판 때의 하나님의 심정을 ‘한탄, 근심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한탄하사’라는 말(!j'n:)은 ‘후회하다, 애석해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는 뜻으로 주로 슬픔과 동정을 표출하는 와우 계속법 미완료로 하나님께서 오래도록 마음아파 하심을 뜻합니다. 누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습니까? 누가 그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아마 자식을 키우면서 속상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천만분의 일이라도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둘 째 아담의 가능성
우리는 때로 좋은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일을 추진하다가 힘들고 어렵거나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오게 되면 그 일을 중단하거나 변경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자주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이었다면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간을 포기는 고사하고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하기를 원하시는 세 가지가 바로 치유와 회복과 변화의 사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무엇을 가지고 오셨나요? 예수님 오실 당시 세상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권력이나 재력이나 군사력이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구간 구유위에서 탄생하시고 가난한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자라나신 것처럼 인간들이 볼 때는 그 세 가지 중에서 단 한가지의 가능성도 없으신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거나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라고 멸시하였습니다. 핍박했습니다.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여기서 ‘배척한지라’는 말(skandalivzw 스칸달리조) )은 본래 ‘덫, 함정, 걸림돌’에서 유래된 말로 ‘성내다, 실족케하다, 범죄하게 하다’는 뜻의 미완료형으로 볼 때마다 예수님을 배척했음을 뜻합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을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 능력도, 아무 권세도 없는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만 생각했으나 예수님이 공생애 내내하신 일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일들을 완벽하게 이루심을 보고 깜짝깜짝 놀랬습니다.
(막 6: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첫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함이셨습니다.
1) 천국 복음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인생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2) 병든 육체를 치유하시고,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회복의 역사와
3)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변화시키는 일을 공생애 내내 성실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담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그 가르치심, 그 지혜와 권능의 출처와 가능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된 삼위의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 속에 계신 신성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골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와 같은 사명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의 최고 절정은 십자가의 죽의심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허사가 되고 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죽으심으로 이사야 예언대로 우리가 사함을 얻고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3. 우리의 가능성
주기도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천국 복음 전파의 사역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다 완성되었지만 마치 다 된 음식을 배고픈 사람들에게 퍼 날라 그들의 주린 영혼을 살리는 이웃 전도와 세계 선교의 비전은 누가 이루어야 할까요?
하나님은 그 일을 하늘에 천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은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이 하셨던 것과 똑같은 기적이 제자들을 통해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막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여기서 제자들이 만민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할 때 제자들이 전한 그 말씀을 듣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또한 믿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기적과 질병이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그런 일을 예수님이 하시고 열두 제자들이 하고 유명한 목회자가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지만 문제는 나와 같이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고 똑같은 죄인이지만 내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순종할 때 나를 통해서도 그와 같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해 아래서는 예수님을 제외한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큰 차이가 없는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속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먼저 믿고 그 은혜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나에게도 나를 통해서도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늘 우리보다 조금도 더 나은 것이 없는 무지하고 무능력했던 사람들이지만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믿어 세례를 받고 삼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과 훈련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기적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과연 무슨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 같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오늘 우리들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작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은 존재입니다.
(마 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혹 이스라엘에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은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지 잘 아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겨자씨를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길이가 1-2cm 정도 되는 씨 꼬뚜리 속에 들어가 있는 아주 작은 씨앗으로 겨자씨 725-760개가 있어야 겨우 1g이 되는 극히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겨자씨 한 알을 밭에 심으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싹이 자라면 큰 나무처럼 되어 새들이 깃들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겨자씨를 믿음의 대명사로 사용하셨습니다.
(마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오늘 성경에서도 그렇게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서 여러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사실에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주 작은 겨자씨 한 알이지만 그 씨 속에 생명이 있음을 믿는 사람이 그 겨자씨를 자기 ‘밭에 갖다 심었다’는 것입니다.
1) 만일 작다고 하찮게 여기고 내 버렸거나,
2) 작다고 밭에 심지 않았거나,
3) 심었을지라도 가꾸지 않았다면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천국을 겨자씨로 비유하신 말씀에서 겨자씨 속에 있는 생명력의 가능성이 얼마나 큰 것 인가?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한알의 작은 겨자씨가 오늘의 나입니다. 내 자신을 생각해 볼 때에도 분명히 나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작은 한 알의 겨자씨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안에 엄청난 가능성을 하나님이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1)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의 자손이며,
2) 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똑같은 하나님을 믿으며,
3) 나를 예수님께서 피 흘려 값 주고 주님의 것을 사셨으며,
4) 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역사하셨던 성령님이 함께 하시며,
5) 나에게 주님은 아담에게 명령하셨던 것과 동일하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적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에게 기적을 보여 달라고 졸라대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었으나 죽지 않고 살아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그와 더불어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게 된 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화 1
저는 지난 주간에 우리 교회가 파송한 인도네시아의 최광식 선교사님의 초청을 받고 선교회장님과 함께 새로 지은 예배당 입당 감사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몇일동안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작은 겨자씨와 같은 한명의 선교사를 회교 국가인 인도네시아에 파송을 했는데 그곳에서 한알 그대로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성경 말씀처럼 큰 나무가 현지인들을 지도자로 양육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지원하고 그들을 통해서 시골 곳곳에 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리는 처소 중에 세 군데를 돌아보았습니다.
1) 첫 번째 방문한 임마누엘 교회의 리뎁손이라는 젊은 목사는 회교도에서 개종을 하고 변두리에서 쓰레기를 주어 연명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일년전에 누군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건축업자를 보내어 교회를 건축하는 현장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아직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아닙니까? 만일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장에 가서 재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주어다가 팔아서 연명하는 사람들이 무슨 돈으로 어떻게 교회를 건축할 수 있습니까?
2) 두 번째 방문한 멀티프리카시 교회를 담임하는 나쉰 목사는 건축현장에 나가서 돈을 벌고 부인은 돼지 농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어 그것을 가지고 교회를 건축하고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물론 돈이 없었기 때문에 공사 속도가 늦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쉰 목사는 세 곳에다 가정 교회를 세워 순회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계하는 법을 가리켜서 자립을 하게 하는 빵과 복음을 함께 나누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회교 국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니 기적이 아닙니까?
3) 세 번째 방문한 교회는 이미 건물이 있었습니다. 스미스라는 현지인 목사는 본래 회교도였다가 기독교로 개종을 한 후 창녀촌을 하는 포주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 사람이 회개하여 창녀촌을 하던 그 집을 예배당으로 개조하여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계시며, 무슨 기적이 일어 나느냐?고 반문하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의 기적을 오늘 내가 체험하지 못할 뿐이지 지금도 지구 도처의 선교 현장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주변 환경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우리를 암에 걸리게 할 수 있는 요소들로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그와 같은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가 건강하다면 그것이 기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심어주신 생명력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암에서 치료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고 암에 걸리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는 온갖 질병들에게 포위가 되어 생명력을 상실한 겨자씨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은 종합병원 중환자실과 같은 상태입니다.
1) 언제부터인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2)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3) 무엇 때문인지 두통과 불면증과 당뇨와 암과 우울증에 시달려 큰 나무는 고사하고 싹조차 나지 않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병원이나 약국을 함께 짓지 않으셨습니다. 자연 속에 살게 하셨습니다. 감사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게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가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변화시키셔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금번 체험해야 할 성령의 역사가 바로 그와 같은 치유와 회복과 변화의 축복인 것입니다.

예 화 2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기 위해 건강 진단을 하다가 암을 발견한 후 치료시기를 놓쳐 말기 암이 되어 더 이상 병원에서 치료가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할 수 없이 삼림욕을 하는 깊은 산속 펜션에 들어가서 투병을 하는 중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임파선에 전이된 암이 식도를 눌러서 식사를 할 때 통증으로 죽도 먹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통증이 사라져 식사를 잘하고 체중이 늘기 시작하고 폐렴으로 폐에 물리 찼었는데 물이 마르고 안면 마비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머리에 돌출되었던 피부암이 사라지고 X 레이에 한 쪽 페만 나왔었는데 이제는 양쪽이 다 사진에 나오고 산소호흡기의 도움이 없이는 숨을 쉬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삼림욕과 등반을 하기 시작하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페이스 북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첨단 의학이 발달하고 있는 현대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손을 놓았으나 되지 않을 때 김만호 선교사님을 알고 있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중보의 기도와 더불어 본인 자신의 기도가 기적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어 그 딸의 내면에 이미 심어 주신 생명력을 치유하여 회복시키시는 치료를 직접하신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을 보내주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금번에 특새와 부흥회라는 영적인 잔치를 통해 준비하신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만일 나만 못 받는 다면 억울하고 불공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금번 집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미 내 안에 감추어 놓으신 생명력과 가능성을 싹트지 못하게 하는 두꺼운 껍질들을 벗겨 치유와 회복과 변화의 기회가 되어 우리의 남은 생을 보혜사 성령님과 더불어 세상에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자, 돕는자, 변호자가 되고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감사와 순종와 믿음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축복을 받기 위해 우리는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은 우리를 하나님의 밭에 내려 놓고 성령의 은혜로 우리를 덮어 치유와 회복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경험을 해야만 합니다. 이같은 복을 받기를 기도하면서 시간마다 참여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