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 6-13)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요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요 5: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요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요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요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요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적 사건에는 거의가 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막 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눅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이 단 한곳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기적이 일곱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본문에는 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치유와 회복의 기적을 베푸셨는지? 그 이유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 그저 ‘치유와 회복’의 기적을 기대하지 말고 참된 믿음으로 ‘치유와 회복과 변화’의 은혜를 체험하는 특별새벽기도회와 부흥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진정한 베데스다
예수님의 공생애기간 사역의 중심은 주로 갈릴리 주변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각지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는 유대인이 명절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요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올라간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필수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성전이 아니라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을 찾으셨습니다.
양문은 예루살렘 북동쪽에 위치한 문으로서 바벨론에서 포로가 되었던 유대인들이 귀환하여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중건되어진 문입니다(느 3:1).
그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은 간헐적으로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라도 고침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천사가 내려와서 그렇게 한다는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전설을 믿고 각종 병자들이 베데스다 못가에 몰려들기 때문에 그곳에는 사람이 머물 수 있는 행각이 다섯 채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요 5: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요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여기서 ‘누워’라는 말(katavkeimai(2621, 카타케이마이) )은 ‘드러눕다’는 뜻의 미완료 형으로 잠시 잠깐이 아니라 앉거나 서는 것이 불가능한 중증환자들이 드러누워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어떤 병에 걸렀든지 낫게 됨이러라’는 전설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도저히 기회가 오지 않는 그림의 떡 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 다른 곳에 갈 수도 없고 그 행각에 누워서 행여나 누군가 자신을 번쩍 들어서 물에 넣어줄 사람이라도 혹시 나타나 주기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기약 없이 누워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할 때 자기가 제일 먼저 못에 들어가겠노라고 저마다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였습니까?
그러므로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야 할 사람은 중병에 걸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병이 가벼운 사람이 먼저 들어가기 때문에 정작 병이 중한 사람은 평생을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그것이 베데스다의 현실이라면 ‘은혜와 자비의 집’이라는 베데스다라는 이름은 허상에 불과한 몰인정하고 무자비한 집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와 같은 베데스다의 허상은 오늘 날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나부터 나만이라도 출세하고 성공하기위해서는 서로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약한 자를 이기고 짓밟아야만 하는 현실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사랑이나 이해나 양보나 협력이라는 말은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 때문에 약자들이 손해를 보고 상처를 받고 마음 아파하고 병들었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영락없는 베데스다 못가의 다섯 채가 아닌 수십만, 아니 수백 만 채의 행각에서 기회를 기다리며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잘나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직장과 사회는 베데스다가 아닙니까? 심지어 진짜 베데스다이어야 할 이 시대의 교회도 허상뿐인 베데스다 못가의 행각처럼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나도 누군가 나를 치유와 회복과 변화의 못에 집어 넣어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과연 누가 나를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요?
2. 예수님의 찾아오심
오늘 성경에 보면 그와 같이 몰인정한 베데스다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유월절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성전이 아니라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베데스다 못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초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청하여 그곳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사백 삼십년 간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은 것을 기념하는 것이 유월절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표하는 것인데 그 예표대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와 같은 잘못된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질병과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종노릇하는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 짐을 지는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그 베데스다 못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다섯 채의 행각에 수많은 병자들이 드러누워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둘러보시는 가운데 자그마치 서른여덟 해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 걸어보지 못한 병자를 주목하셨습니다.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성경학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약 40세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38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하고 누워있었다는 것은 불치의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아무리 현대 의학이 발달되었다고 할지라도 고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벼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38년 동안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기서 ‘낫고자 하느냐?’라는 말(qevlw(2309, 델로))은 매우 당연하기 때문에 물어보는 것조차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쉬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왜 잘 아시면서 38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그와 같은 질문을 하셨을까요?
사람이 너무 오래 동안 동일한 환경에서 머물다가 보면 그것에 익숙해질 뿐 아니라 나름대로 적응을 해 나가거나 나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쉽게 체념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 화
골절로 인해 오래 동안 기브스를 했을 경우 물리치료를 하지 않으면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는데, 운동도 하지 않고 치료도 받지 않고 힘써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자고 깨니까 기적이 일어나서 부자가 되고, 건강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육신의 질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체념이라는 마음의 질병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 체념하고 있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스럽거든, 낫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나는 반드시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능력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치유와 회복과 변화”의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이 명령하심
오늘 성경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고 물으셨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까?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물론 믿음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닙니다.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그 책임을 하와에게 미루는 것과 똑같은 책임전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향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물론 38년 동안 매일 걷고 싶었지만 걸은 적이 없는 심신의 장애자에게 ‘일어나라, 자리를 들라, 걸어가라’고 예수님이 내리신 명령에는 세 가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 ‘일어나라’는 말(ejgeivrw(1453, 에게이로) )은 ‘깨우다, 자극하다, 일으키다, 각성시키다, 분발하다, 죽은 자를 일으키다’라는 명령이고,
2) ‘자리를 들고’라는 말(ai[rw(142, 아이로) )은 환자가 누워있는 침상을 ‘단번에 들고 일어나라’는 명령이고,
3) ‘걸어가라’는 말(peripatevw(4043, 페리파테오) )은 ‘돌아다니다, 이리저리 거닐다’라는 뜻의 명령으로 결코 주님이 붙잡아 주시면서 걸으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의 말씀이었습니다.
마치 창조주 하나님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이 깊음 위에 있는 세상을 향해 ‘빛이 있으라’ 명령하신 것처럼 주님이 명령하셨습니다.
물론 과거에 그 사람은 38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현재도 누가 자기를 들어 못에 던져 줄 사람이 없다고 원망할 뿐이었습니다. 또한 미래에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심신이 나약해진 장애자를 향해 예수님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38년 된 병자에게 주님이 내리신 명령대로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여기서 ‘곧 나아서’라는 말(eujqevw"(2112, 유데오스) )은 ‘즉시 건강하게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은 주님에게 ‘내가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이 전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났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피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를 그렇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 자체도 전혀 알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요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과연 그 비결이 무엇일가요? 예수님이 나중에 그 고침 받은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셨을 때 당부하신 말씀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요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이 병들면 부정적이고 신경질적이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베데스다 못가 행각에 진을 치고 있던 수많은 환자들이 자기보다 다 유리한 조건에 있기 때문에 38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 본적이 없는 이 사람의 마음에는 원망과 불평이 부글거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하신 것은,
1) 일평생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던 그 사람을 치유하여 이 ‘아하 나도 일어설 수 있구나, 나도 걸을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2) 그것만이 아닙니다. 38년 동안 가만히 누워서 마음과 생각으로만 죄를 짓던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면 이제는 보다 더 적극적인 행동으로 죄를 범하며 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38년간의 병을 청산한 사람이 마냥 기뻐할 것만은 아닙니다.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더 많은 죄를 범하며 살게 된다면 그가 고침을 받은 것은 축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나중에 바리새인들에게 찾아가서 안식일에 자기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고발을 하였습니다.
(요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 때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치솟는 인기에 기득권의 위협을 느끼고 예수님을 잡아 죽일 무슨 구실을 찾고 있던 중에 이 사람이 고발한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고발함으로 예수님을 핍박하는 구실을 제공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일을 제일 먼저 했습니다.
(요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사도 요한이 오늘 성경에 38년 된 병자의 기적을 7 가지 이적 중에 하나로 기록해 놓은 이유가 바로 육체의 고침을 받는 기적이 전부가 아니라 먼저 잘못된 심성을 고침 받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기적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이유는 그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거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좋았거나 순종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거의가 다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점점 더 질병과 불의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치유와 회복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은 큰 은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기적이나 요행이 일어나기를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왜 내게 치유와 회복과 변화가 필요한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이 보다 더 건강해지고, 이보다 더 부자가 되고, 이보다 더 출세를 하게 해 주신 다면 내가 제일 많이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기도해야 합니다.
1) 나는 지금 육체의 질병과 가난으로 인해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2) 나는 이미 건강의 축복을 받고 있으면서 그 몸으로 그 물질로 얼마나 주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며 살고 있는지를 곰곰이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금번 특새와 부흥회는 어느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모든 사람이 치유하고 회복하며 변화시키는 기적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베데스다처럼 본질을 상실한 세상에서 38년 된 병자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이 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실 때, ‘주여 제가 낫고자 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치유와 회복과 변화의 복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집회 시간마다 주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내가 선하게 살지 못하고 죄만 범하며 살았다면 금번 특별새벽기도회와 부흥회를 통해 보이는 육체보다 더 소중한 내 마음의 앉은뱅이를 고침 받는 기적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보다 나의 영과 육이 치유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시간마다 오직 말씀, 오직 성령, 오직 은혜를 만 땅으로 채움 받는 복된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금번 특별새벽기도회와 부흥회를 통해 시간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체험해야 할 진정한 치유와 회복과 변화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이 경고하신 대로 이전보다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헌신자로 충성된 삶을 살아 장차 하늘에 상급을 많이 쌓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요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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