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되지 않을지라도
(요 6:8-13)
(요 6: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요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요 6: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요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요 6: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요 6: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오늘은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나와 가정과 교회와 민족과 국가에 내려주신 은혜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금까지 한 평생 살아오면서, 아니 금년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과연 내가 은연중에 나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덩달아 나도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살지 않았나?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 후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너 광야에서 사십년의 세월을 보낼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고 반석에서 생수가 솟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는 고사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민 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민 11: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내려 주신 만나는 군대 건빵처럼 맛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각종 요리가 가능할 뿐 아니라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와 같았다고 하였는데도 그것만 먹는 것이 지겹다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
(민 11: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처럼 불평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만 하는 불평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고 불평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덩달아 불평하기 시작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 11: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물론 다른 사람보다 더 좋고 많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심지어 죽음 앞에서 조차 감사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삶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 필요를 채우지 못한 사람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진리에 대해서 주려 있었으며, 육체적으로는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고, 영적으로는 마귀에게 짓눌려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주셨고, 각색 병자들을 치료하여 주셨고, 귀신의 권세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와 같은 경험을 하면 할수록 예수님에게 더욱 집착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인기는 갈수록 높았고 상대적으로 바리새인들의 시기도 높아져만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그들을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 많은 기적들을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작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로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하셨습니다. 그럴 때 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를 찾아내어 또 다시 모여 들었는데 오늘 성경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요 6: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요 6: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귀찮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갈급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먼 길과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는 모습을 마치 목자 없는 양떼들처럼 생각되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사람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동정이라고 합니다. 자존심
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동정을 받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과연 인생이 무엇인가를 깊이 돌이켜 보면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또한 그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때문에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위장하기에 급급합니다. 도리어 자기는 강한 사람인 것처럼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하나도 도움이 되질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성경에 무리들처럼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여러 가지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예수님께로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육신적인 필요는 물로 영적인 필요까지 충족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중에 한 사람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육신적인 필요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적인 필요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교회를 다니면서 그와 같은 필요들이 충족되지 못하면 한두 번은 체면이나, 정이나, 의무감 때문에 나올 수 있지만, 한 평생 교회를 다니며 신앙 생활을 최우선 순위로 여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슨 필요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며, 또한 그동안 교회 생활을 하면서 과연 그와 같은 필요를 충족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의 필요를 아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벳세다 들판까지 모여 든 것은 각기 나름대로의 필요를 예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그들의 필요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하루 종일 그들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거기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천국 복음을 가르침 받고, 육신의 병 고침을 받았으나, 해가 저물어 가면서 또 다른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 복음을 배불리 먹고, 병도 고침을 받은 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육신의 배고픔이 점점 사람들을 압박해 오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곧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받은 은혜는 헛되고 말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빌립과 같은 제자는 어림잡아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내놓았지만 가난하신 예수님에게는 그 돈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설령 그 돈이 있을지라도 벳세다 들판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문제를 돈이나, 권력이나, 신비한 기적을 통해서 해결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마 14: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막 6: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눅 9: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그러나 빈털터리며 무능력한 제자들에게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음을 예수님이 잘 아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어떤 문제 앞에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손 놓고 무슨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 때 제자 안드레가 한 소년으로부터 한 끼니 분량의 도시락을 구해 왔습니다. 그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소금에 절인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지금도 필리핀이나 어렵게 사는 동남아에 가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노동을 하다가 내놓는 도시락을 보면 밥 한 덩어리에 작은 생선 절인 것으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자 안드레가 불과 한 사람분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가지고 오면서 그것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거기 모인 무리들만이 시장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입고 오신 예수님도 시장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오병이어는 시장하신 예수님을 대접하기에도 넉넉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것을 잡수시거나 하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그것을 받으신 후 사람들을 식사 대형으로 자리를 잡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순종하여 자리를 잡고 잔디에 앉아서 기다렸는데 그 수가 무려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요 6: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아무리 큰 잔치라고 해도 한꺼번에 오천명을 배불리 먹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떡과 물고기가 필요할까요? 그러나 예수님의 손에는 고작 보리떡 다섯 개와 두 마리의 물고기를 담은 도시락 하나만 달랑 들고 계셨습니다. 정말 얼마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시고 그 떡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후 자리를 잡고 앉아 기다리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떡만이 아니라 물고기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여기서 ‘축사하신 후에’라는 말(eujcaristevw(2168, 유카리스테오) )은 신약에 38번 나오는 단어인데 거의 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또한 ‘나눠 주시고’ 라는 말(diadivdwmi(1239, 디아디도미) )은 ‘넘겨주다’는 뜻으로 예수님의 손에서 떠나 주린 사람들에게 떡과 고기를 ‘넘겨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눠주실 때 오병이어를 오천분의 일로 쪼개어 나눠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원대로’ 라는 말(qevlw(2309, 델로) )은 ‘바라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능동태로 주린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기뻐할 정도로 나눠주셨다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뷔페집에서 무한 리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과 거기 모인 오천 명이 다 배부르게 먹었을 뿐 아니라 남은 것을 거두게 하셨을 때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흔히 '오병이어의 기적‘ 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과학의 세계에서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기적은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각자 챙겨가지고 온 것들을 나눔으로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된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와 같은 설교는 제가 예수를 믿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서울 창신동에 있는 모 교회에서 출석을 했을 때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설교이기도 합니다. 그 때는 제가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 보니 오천 명이 사전에 식품점에서 대량구매를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다 똑같이 보리떡과 물고기만 싸올 수 있으며, 오천 명이 다 하나같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다 배불리 먹고서도 어떻게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하기가 더 어려운 억지 해석이었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기적이 제자들의 손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의 손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하나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전까지 그 손으로 각색 병자를 고치신 기적의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손으로 얼마 되지 않는 오병이어를 높이 치켜드시고 질량불변의 법칙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감사 기도를 하신 후에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면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상 17장에서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기름 조금과 가루 조금을 가지고 기적을 일으켜 떨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배불리 먹게 한 기적이나 왕하 4장에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보리떡 이십 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가지고 일백 명의 무리에게 주어 먹고 남게 한 기적들은 예수님의 기적이 하나도 문제가 될 수 없음을 미리 증거 해주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제자들의 걱정과 염려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을 때 한 어린아이가 예수님에게 얼마 되지 않는 오병이어를 드린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는 종자씨가 되었습니다.
제자 안드레는 그것을 예수님에게 전하면서 얼마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손에 드시고 감사기도하신 것이 기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감사기도를 하신 후에도 오병이어는 물량적으로 변함이 없었으나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사람들은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서 남은 것을 거두게 하셨을 때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됨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후세의 사람들에게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3.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예수께서 벳세다 들판에서 행하신 그와 같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결과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는 단회적인 효과는 있었으나, 정반대로 그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는 역효과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일찍이 모세가 예언한 새로운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행 3: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그러나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을 경험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정치적인 왕으로 추대하여 그와 같은 기적을 지속적으로 누리고 싶어 하는 욕심이 생겨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자 예수님은 홀로 그 산을 떠나셨습니다.
(요 6: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그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정치적인 왕이 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의 떡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일회용이 아니라 영원히 주리지 않게 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육신은 오병이어로 살지만 사람의 생명은 생명의 떡으로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면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서도 영생을 하지 못하고 벳세다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을 먹고도 영생을 하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생명의 떡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마치 굶주린 오천 명 앞에 얼마 되지 않은 보리 떡 다섯 개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온 인류를 살리는 생명의 떡이 되시기 위해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온 인류를 살리는 생명의 떡이 되게 하여 주심으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요 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우리는 지난 주 오후 예배 시간에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마음 깊이 되새김을 하면서 은혜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비록 육신적으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사는 최고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은 물론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교회가 오늘의 벳세다 들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빈손을 보고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해야 할 사람은 입으로 말만 잘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해야 할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먼저 내 손에 주님이 주신 것이 얼마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나 혼자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필요를 위해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드리려는 헌신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이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영접하여 보다 더 출세하고 성공하려는 이기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잘못된 신앙을 버리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산상 보훈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에 대한 염려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아주 소중한 답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 이유는 아무리 염려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문제의 해결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염려를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새로운 염려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를 하늘을 나는 새나 들에 핀 백합화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아직 채워지지 못한 필요를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며, 그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나를 영원히 살게 하신 영생의 축복에 대한 깊은 감사와 감격을 늘 잃어버리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매일 매일이 오병이어의 기적이었음을 지금까지 지내 온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 보면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나가진 것이 얼마 되지 않을지라도 믿음조차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육신적으로 나 가진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거든 더욱 믿음의 부자가 되고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기를 사모하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박국 선지자처럼 나 가진 것이 전혀 없을지라도 그것이 나의 태어날 때의 모습이지만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나의 모든 필요를 준비하여 때를 따라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합 3:17)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거둘 것이 없고, 밭에 거둘 곡식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더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겠습니다.” (합 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십니다. 내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해 주셔서 가파른 산 위에서도 다닐 수 있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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