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중에 성도의 만족
(시 17:7-15)
(시 17:7)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시 17: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시 17:9)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7:10)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시 17:11)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시 17:12)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시 17:13)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시 17:14)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시 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생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기 나름대로 어려운 고난을 겪게 될 때 어떤 사람은 자포자기하고 우울한 세월을 보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잘 극복하여 승리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승리자는 아무런 고난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 가혹한 고난을 잘 이겨나갈 뿐 아니라 기뻐하고 감사하며 도리어 만족해하는 큰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흔히 다른 이로부터 ‘탁월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존경스럽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많은 고난을 극복한 사람이라는 공통점입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 손을 꼽는 다면 오늘 성경의 시편 기자도 단연 앞서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어린 시절에는 비천한 목동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가혹한 고난을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시편 기자는 어려움을 잘 극복했을 뿐 아니라 오늘 성경 말씀 마지막 부분에 보면 기뻐하고 만족해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족함이 없는 기쁨이나 행복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밑 빠진 독과 같은 인간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로만 만족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1. 절박한 중에 기도
우리는 지난주일 시 16편을 통해서 땅에 있는 성도는 누구인가? 라는 성도의 정체성과 그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게 되면 시편 기자가 매우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 17:1)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기서 ‘울부짖음’이라는 말(hN:rI(7440, 린나) )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매우 절박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 이유는 시편기자를 괴롭히는 악인들과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시 17:9)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여기서 ‘압제하는’이라는 말(dd'v;(7703, 샤다드) )은 ‘난폭하게 다루다, 황폐케 하다, 파멸시키다’라는 뜻의 완료형으로 이미 시편 기자가 그와 같은 고통의 상태에 처해버렸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더구나 그와 같은 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 ‘악인들’ 또는 ‘원수들’이라고 한 것처럼 다수의 원수들이 시편 기자를 에워싸 죽이려고 하는 절박한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원수들이 얼마나 잔악한 지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 말씀은 마치 동물의 세계에서 맹수의 사냥하는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시 17:12)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그것은 굶주린 사자가 먹이 감을 사냥하기 위해 풀섭에 납작 엎드려서 소리 없이 살금살금 접근을 한 후 순식감에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은 후에는 그것을 나무 밑으로 질질 끌고 가서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갈가리 찢어서 얼굴에 흥건히 붉은 피를 적시며 포식을 하는 장면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살던 당시는 나라의 지도자인 사울 왕이 까닭없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시편 기자를 죽이려하였다면, 당시에는 자신의 힘을 믿고 사람들을 괴롭히던 강포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물론 시편 기자도 얼마든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맞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자들을 이기기 위해 불의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한 것입니다.
예 화
미얀마에서 헌신적인 선교사로 일한 미국의 아도니람 저드슨이 인도에서 일하고 있던 영국의 위대한 선교사 윌리엄 캐리를 1812년에 방문했습니다. 저드슨은 윌리엄 캐리 선교사와 정원을 함께 거닐면서 캐리 선교사의 삶과 고백을 통해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캐리 선교사는 세 차례에 걸쳐 살해당할 뻔했고, 인도 정부의 갖은 선교 방해를 받았으며, 수고와 땀으로 이룩해 놓은 원고와 인쇄 도구들과 서류들이 거의 다 불타 버리는 화재를 경험했었습니다. 선교의 현장에서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생명의 위협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저드슨은 어떻게 이러한 수많은 역경들을 견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캐리 선교사는 저드슨을 안내하여 정원의 한 편 구석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여기가 바로 나의 예배 장소이자 기도와 묵상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닥쳐온 고난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난의 순간에 무릎을 꿇을 때마다 하나님의 비상한 은혜를 경험했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민주주의 법치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법이 억울한 사람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준비가 되지 못한 힘없는 사람들을 악한 자들이 교묘하게 악용하여 등치고 울리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설령 우리의 삶이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영적으로 조금만 살피면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가 먹이 감을 움킨 사자로 비유한 원수들처럼 나와 우리 가정과 직장과 사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깨어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2. 정직한 자의 기도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무슨 종교를 믿든지 예외가 없이 크고 작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문제는 성도들이 왜 그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쩨, 나의 원인-하나는 나의 죄와 허물 또는 잘못된 판단과 실수로 인해 내가 자취한 고난입니다.
그러한 고난은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한 것은 회개하고 돌이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것만이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다른 하나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보다 더 성숙시키시기 위해 좀 더 겸손하게 하고 강인한 믿음을 위해 나를 훈련시키시려는 목적으로 주시는 고난입니다.
그러한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보다 더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구하여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 고난을 잘 이겨나가야 합니다.
셋째, 사단의 시험-또 다른 하나는 사단이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주는 시험입니다. 그 같은 고난을 통해서 나의 신앙에 회의가 생기게 하고 하나님의 존재나 사랑을 의심하여 나를 실족시키려는 목적으로 나를 시험하는 고난입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욥이 당한 고난입니다.
그와 같은 고난은 욥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얼마든지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날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기자가 다윗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그 중에 어떤 연유로 인한 고난일까요?
성도가 만일 자신의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라고 하면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설령 내가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이 나같은 것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낙담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서 자신의 허물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이미 시편 기자는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음을 이미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시 17:1)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기서 ‘거짓되지’ 아니한 이라는 말(hm;r]mi(4820, 미르마) )은 ‘남을 속이고 기만하고 배반’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잘못된 인간관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께서 자신을 공평하게 판단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허물을 살피셨으나 아무 흠도 찾지 못하셨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흠이나 아무 결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크게 결심한 바를 굳게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더 이상 입으로 죄짓지 않고 살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시 17:3)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감찰하셨으나’ 라는 말(@j"B;(974, 바한))은 ‘검사하다, 시험하다, 입증하다’는 뜻의 완료형으로 이미 검사가 끝난 상태를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찾지 못하셨사오니’라는 말(ax;m;(4672, 마차))은 ‘찾다, 이루다’라는 뜻의 미완료 상태로 아직도 찾지만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결심하고’라는 말(!m';z:(2161, 자맘) )은 ‘생각하다, 숙고하다, 계획하다’라는 뜻의 완료형으로 이미 결심이 끝난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시편 기자의 다부진 결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결심만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마음에 결심한대로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삶을 살며 그의 걸음을 주님의 발자국에 맞추어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실천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시 17:4)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시 17:5)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 부패한 죄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듣고 보는 것이 죄악된 세상에서 저절로 양심적이고,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셔야 하고,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은혜를 부어주셔야만 하고, 더 나아가서 아무리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시편 기자처럼 부단한 결심을 해야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3. 큰 믿음의 기도
사람이 아무리 큰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붙잡아주시는 사람의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그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의 기도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신이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서 이미 응답하셨음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시 17:6)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까지 주게 피하는 자를 오른 손으로 이미 구원하신 전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자신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시 17:7)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시편 기자는 절박한 현실에서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은 자기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아래 모은 것처럼 자기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심으로 무자비한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시 17: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시 17:9)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기도에 대해서 시편 기자가 믿음으로 구한 그대로 다 들어 주셨을까요? 시편 기자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원수들이 피를 토하고 꼬꾸라지고 시편 기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을까요?
지난날의 성경이나 교회사나 현실 교회 안에서 그러한 역사가 별로 많이 일어나지 않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혹독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기도도 하는데 여전히 아프고 가난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면 세상에 불신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구태여 전도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다 믿을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를 보십시오. 절박한 상황에서 그렇게 믿음으로 기도했으나 때로는 죽을 고비, 억울한 일을 많이 경험하였지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반대로 원수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오히려 부귀권세를 다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고만장하고 더욱 기세등등하여 시편 기자를 더욱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시 17:10)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시 17:11)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시편 기자를 괴롭히는 원수들이라고 해서 굶어죽이시지 않고 벼락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마치 선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상급처럼 그들에게 기름에 잠기도록 부요함과 건강을 주시는 까닭은 그것이 그들에게 내리시는 기업은 오직 살아있는 동안만 누릴 수 있는 한시적인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시 17:14)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며 설령 그럴지라도 시편 기자를 본받아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화-사형수의 최후만찬-사진 제공
미국에서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식사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데 무한정이 아니라 주마다 상한 금액이 다르다고 합니다. 오클라호마 주는 15 달러 미만, 풀로리다는 40달러 미만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요구하는가 하면 어떤 사형수는 올리브 한알만 요구한 사형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라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귀권세를 다 주시지만 어떤 것은 절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성도들이 부귀와 권세를 아무리 구해도 풍성하게 주시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가난, 고난, 환난이라는 삼난을 누리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보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만 허락하시는 특별한 선물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항구적으로 보장하시는 영원한 하늘에 기업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한 자들이 구경도 못한 하나님의 얼굴을 영원토록 뵈올 수 있는 영원한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와 같은 항구적인 기업이 미래에 보장되어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현실의 고난은 시편 기자를 떠나지 않고 괴롭히고 있을지라도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1) 고난 중에서도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낙망이 아니라 소망을, 불만이 아니라 만족을 느끼고
2) 하나님께 부르짖던 절망적인 입술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입술로 승화될 수 있었습니다.
(시 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이를 쉽게 번역한 성경으로는 (시 17:15) “그러나 나는 의로운 가운데 주를 볼 것이며 천국에서 깰 때에는 주의 모습을 보고 만족할 것입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시편 기자가 영적인 깊은 세계를 깨달았을 때 아무리 절박한 고난 중에서도 감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박국 선지자처럼 오히려 만족하였습니다.
(합 3:17)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거둘 것이 없고, 밭에 거둘 곡식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더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겠습니다.” (합 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십니다. 내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해 주셔서 가파른 산 위에서도 다닐 수 있게 하십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 5: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의 말씀처럼, 한 평생 살아가면서 인생이 마치 고난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그러할지라도 시편 기자와 같이 정직한 삶을 살기로 굳게 결심을 하고 실천하고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의 기도를 통해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시편 기자와 같은 만족을 체험하여야 하겠습니다.
(시 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토머스 굿윈은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라는 오늘 성경 말씀을 “우리의 모든 일을 마치게 되었을 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만족"할 것이다. 내가 마지막 날에 깰 때에 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보고서 만족할 것이다. "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참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시편 기자가 깰 때에 바라 본 주님의 모습을 오늘 우리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된다면, 비록 우리의 현실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악한 원수들이 누리는 한시적인 축복에 연연하지 않고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의 성도에게 약속된 항구적인 기업을 바라보고 심히 기뻐하고 만족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시편 기자가 체험한 그 만족을 오늘 우리들도 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는 시편 기자보다 더 명확한 기업이 약속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형상을 늘 면전에서 뵐 수 있는 천국의 소망입니다.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오늘 우리도 어떤 고난을 만나든지 시편 기자와 같은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거나, 한번 실패 했다고 포기하지 않고, 도리어 시편 기자와 같은 항구적인 만족을 체험하게 하는 길은 시편 기자처럼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철이 든 것이고, 시편 기자처럼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항구적인 축복임을 잊지 말고 무엇보다 부르짖는 기도를 쉬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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