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하나님께 복과 의를 얻을 사람/(시 24:1-7)

미션(cmc) 2014. 3. 12. 17:27

하나님께 복과 의를 얻을 사람

(시 24:1-7)

(시 24:1) “[다윗의 시]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시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시 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시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시 24: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여러 성도들은 주일마다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보다 더 깊이 깨닫게 되는 은혜를 받는다면 목사는 누구를 통해서 은혜를 받을까요? 목사나 성도나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에 목사도 은혜를 받지 않으면 성도들에게 은혜를 나눌 수 없습니다. 

 물론 성도들이 읽고 듣고 배우는 성경을 통해서 목사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와 더불어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인 자연 만물에 깊숙이 젖어 들어서 하나님은 과거에 창조로 끝나신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그 피조물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심을 체험하고 그것을 몸소 깨달음을 통해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첨단을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의 창조의 영역에 근접할 수 는 없습니다. 

 저는 지난 두 주간 안식월을 통해서 좀 힘들었지만 저의 남은 생애에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힘든 산행을 하면서 오늘 시편 24편의 말씀을 몸으로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사람은 산 아래 살 때는 형편과 처지가 제 각기 다르지만 산에 오르게 되면 복장이나 장비나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이 다 똑같아 지는데 그 중에 하나는 누구나 다 노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멀고 긴 트레킹 코스를 따라 산행이 매일 계속하는 동안 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  땀띠가 날 정도로 속옷까지 적시지만 제대로 세탁을 하지 못해서 밤에 널어놓았다가 그대로 다시 입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목욕도 제대로 못하고, 변변치 못한 식사와 문화시설이 전혀 없는 산장과 텐트에서 옷을 입은 대로 잠자리에 들기도 했지만 별로 불편한 줄 모르고 금방 골아 떨어져서 어느 사이에 아침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새벽 일찍 일어나 어두움을 밝히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무거운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내리는 산행이 계속 되었습니다. 당연히 왜 내가 사서 이 고생을 하는가? 라는 불평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제가 평소에 원했던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힘든 것도, 불편한 것도 다 잊은 채 행복한 트레킹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복은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만 하면, 범사에 감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만 하면, 매일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매순간마다 힘과 위로와 기쁨과 앞길을 인도하시고 좋은 날을 주시는 것을 매일 경험하였습니다. 정말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만일 하루에 갈아입을 한 벌 옷과, 끼니를 해결할 양식과, 허기질 때 마실 물과 간식과 피곤을 쉴 수 있는 잠자리만 있다면 트레킹 여정은 행복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옷이나 음식을  배낭에 담을수록 산행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인생살이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어떤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누리기 때문에 당연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정작 본인 자신은 행복하기보다는 원망과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불행한 삶을 사는 원인이 다른데 있지 않고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귀중한 예배 시간에 힘들게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한가하게 여행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영적인 등산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것을 금번 산행을 통해서 깊이 경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시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그렇다면 왜 여호와의 산에 올라야하고 또 어떻게 해야 여호와의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1. 여호와의 산, 거룩한 산 

 오늘 성경을 보면 이 세상과 그 안에 생명이 있든지, 생명이 없든지 모든 것들이  저절로 또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 장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신 피조물들입니다.

 그러므로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 24:1) “[다윗의 시]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산을 세우실 때 그 터를 바다와 강들 위에 세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산 주변에 있는 호수나 바다를 풍자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산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때는 아침이나 저녁 햇빛이 산 그림자가 수면 위에 그대로 반영이 될 때입니다.

 그 산들 가운데 어떤 산은 동네 뒷산처럼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야산이 있는가 하면, 전문적인 산악훈련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기암절벽 높은 산도 있습니다.

 제가 수년 전부터 지구의 온난화로 빙하와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것이 안타까워서 생전에 그것이 가보고 싶었던 곳이 오지 중에 몇 군데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곳이 수년 전부터 마음으로 꿈꾸었던 남아메리카 끝자락 칠레와 알젠틴 사이에 있는 파타고니아 였습니다. 

 물론 저 혼자서는 갈 수 없기 때문에 안내자가 필요했었는데 감사하게도 우리나라 산악인 중에서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8,000m 급 14좌 정상을 세계에서 11번째 국내에서, 세 번째로 완등한 산악인인 한왕용 대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지극히 평범해 보였지만 그 분이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한 산악인이라는 것과 국내외 곳곳의 산에 쓰레기를 치우는 크린 마운틴 운동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주목을 받는 분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그러한 분을 금번 여행에 저의 안내자로 붙여주셔서 저는 그 분의 인도와 도움을 받아 젊은이들도 버거워하는 파타고니아의 트레킹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산이라고 할지라도 전문 산악인에게 하나하나 정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8000m 급 히말라야의 고봉들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설령 그 산들을 정복한 유명 산악인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정복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산을 지으셨다고 오늘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산의 이름은 ‘여호와의 산’이며 그 산은 전문 산악인이 아니요, 나이가 많고 적고, 힘이 있고 없고, 등산 경험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오를 수 있는 믿음의 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별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남녀노소 유무식을 막론하고 반드시 정복해야만 하는 구별된 산이기에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여기서 ‘오를 자’라는 말(hl;[ 5927, 알라)과 거룩한 곳에 ‘설자‘ 라는 말(!/qm;(4725, 마콤) )은 모두 미완료 동사로 아직 다 끝난 상태가 아님을 뜻합니다.

 여호와의 산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신 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산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 산을 ‘시온’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그 시온 산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호와의 산은 주님이 임재하여 계신 성전인 교회가 거룩한 여호와의 산이며,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것은 예배를 뜻하며, 여호와의 산에 올라 복과 의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성공적인 예배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호와의 산을 바라본 사람은 많고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는 사람은 많지만 여호와의 산 정상에 올라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기쁨이 충만하여 감격스러움에 젖어서 ‘야호!’하는 대신에 ‘할렐루야!’라고 소리치는 영적인 감동을 만끽하는 성공적인 예배자는 많지 못합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높은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도를 보고 그 산을 이해하고, 등산에 필요한 장비들을 준비하고, 사전에 훈련을 통해서 체력을 키우고, 무엇보다 그 산을 여러 번 정복한 경험이 있는 전문산악인의 안내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산, 거룩한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누구의 도움이 필요할까요?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이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가르치는 지침서이고, 영원토록 거룩한 산 하늘에 계신 주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구원의 복을 받게 하여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주님이 나의 안내자가 되어 주시기만 하면 우리도 능히 거룩한 여호와의 산을 완등(完登)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은 여호와의 산에 오르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시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2.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시편 기자 다윗이 처음에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 열정 하나만 가지고 생각없이 법궤를 옮기려고 하다가 웃사가 즉사하는 모습을 보고 열정이 다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옮길 때는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매우 신중하여 옮겼습니다. 그 후 시편 기자는 오늘 시편을 짓게 된 것입니다.

 거룩한 산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는 아무나 오르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신분의 사람만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규정하신 조건에 충족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것은 마치 오늘 성경에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면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예배, 기뻐 받으시는 예배, 성공적인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에 세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 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첫째 죄 없는 깨끗한 손 

 여기서 ‘손’이라는 말은 단순히 손을 씻고 예배를 드리라는 말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기 전에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살다가 주님께 나왔는지? ‘행실’을 뜻하는 것으로 예배자는 무엇보다 행실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똑같은 예배에 남은 은혜를 받는데 나는 은혜가 되지 않는 것일까요? 말씀을 잘 전하고 못 전하는 설교자의 책임도 크지만 예배자가 한 주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신 30: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둘째 청결한 마음

 성공적인 예배자는 외적인 행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예배자는 외적인 행위의 깨끗함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손만이 아니라 그 마음까지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 신실한 삶

 외식하기를 좋아하는 유대인들은 행할 의지가 없으면서도 마치 그것을 행할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맹세를 하고 막상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올라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헛된 것을 참되다고 하거나 지킬 마음이 없으면서 서약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잠 12:22)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자세로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에게 어떤 복을 예비해 놓으셨을까요?


3. 여호와의 산에 오른 자의 복

 오늘 성경 말씀처럼 깨끗한 행실과 더불어 마음을 청결히 하며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신실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시 24: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그동안 산행의 경험이 별로 없었던 제가 이번 트레킹을 통해서 산에 오른 자만이 맛보는 감격이 무엇인가? 를 경험하면 여호와의 산에 올라 우리가 무엇을 경험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인천 공항을 떠나 두바이를 경유하여 알젠틴의 브에노스아이레스와 칼라파테 국경을 통과하여 무려 삼일 만에 칠레의 '파타고니아인 또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산장에 도착하여 토레스 산장에서 하루 밤을 보냈습니다.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 배낭을 메고 숙소를 떠나 제일 목표지인 또레스 델 파이네 삼형제 봉을 향해 가파른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전망대에 올랐을 때 3개의 거대한 분홍빛 화강암 삼형제처럼 나란히 서있는 거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아련히 보였던 삼형제 봉이 눈앞에 확 드러난 것입니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구름이나 비에 가려 그 봉우리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데 그 날은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파란 하늘과 삼형제 봉우리가 전신을 드러내 보여주심을 체험하였습니다. 

 이전까지 등산 경험이 별로 없었던 저는 비로소 사람들이 왜 위험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때로는 목숨을 잃기도 하면서 높은 산에 오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정상을 보는 기쁨, 정상을 밟는 기쁨 그것은 힘들게 산을 오르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왜 그렇게 힘들게 등산을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또레스 델 파이네’ 삼형제 봉 보다 더 높고 거룩한 산 여호와의 산을 향해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높은 산을 정복하는 것도 기쁜 일이라면 여호와의 산에 올라 거룩하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복을 받는다면 그 기쁨은 얼마 더 크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청결히 하고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고 신실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에게 거룩한 여호와의 산에서 복을 받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 24: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올라 하나님께 받는 복이란 한시적으로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는 영적인 복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복이 바로 예배자가 거룩한 산 하나님의 산에 올라 삼형제 봉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은 참으로 많은 수고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산에 오른다고 해서 다 정상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름을 걷어 주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산을 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오르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보고 싶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를 힘쓰고, 예배시간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산에 오르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전에 나온다고 하는 것이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산 시온에 좌정하여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최대의 복인 구원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신령한 복은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복입니다.

 (시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하나님은 오늘도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수고가 하나도 헛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올라 예배하는 자에게 "의롭다하시는 믿음을 더하여 주시며, 구원의 확신을 주시며,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은 위로와 치유의 복"을 체험하게 될 때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음에는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미 여호와의 산에 올라온 자신을 돌이켜 볼 때  "나는 손이 깨끗하지 못하고, 마음도 순결하지 못하여, 그와 같은 복을 받을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물론 나는 아무런 능력도, 자격도 없지만 앞서 가시는 주님을 놓치지 않고 따르기만 하면 주님의 은혜로 어느덧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한 하나님의 산에 오르게 되고, 구원의 복과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여호와의 산에 올라 주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렇다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저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저절로 다 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산에 올라 복과 의를 주시기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영원하신 왕이신 주님이 내 마음에 임하시기에 장애물이 없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일입니다.

(시 24: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왜냐하면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곳은 다름 아닌 성도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당신의 처소로 삼아 그곳에 들어가셔서 왕으로 좌정하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통치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몸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전 3:16, 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왕이요, 주인으로서 내 마음을 통치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시간 머리를 들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복과 의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시 24: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예배 시간마다 마음의 머리를 들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우리의 영원하신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여, 시간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을 영접하여 주께서 나의 삶을 온전히 통치하시는 복을 받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