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주님만 기다립니다
(시 25:1-5)
(시 25:1)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 25: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시 25:3)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시 25: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 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한 평생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질병이나 사고나 실패와 같은 어려움이 없이 매일 즐겁고, 평생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종류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이 세상을 사노라면 다 나름대로 인생의 굴곡이 있는 법입니다.
1) 지난 금요일 온 가족 기도회 시간에 환우들을 위해 기도할 때 여러 환우들이 뇌출혈, 췌장암, 파킨슨병, 위암, 간암, 갑상선암, 대장암, 직장암, 신장, 어깨골절, 교통사고 후유증에서 회복과 치유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어제는 그와 대조적으로 여러 가정들이 일생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결혼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함께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당신의 백성들만은 예외로 늘 형통하게만 하시지 왜 그와 같은 인생의 굴곡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예 화
우리가 길을 갈 때 평지에 있는 길은 고속도로처럼 일직선이지만 험하고 높은 산에 오르는 길은 구불구불한 곡선이며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점점 산에 오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곧게 난 길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지만 만일 산 아래에서 높은 정상까지 굴곡이 없이 곧바로 수직으로 등산로를 만든다면 아무리 유명한 등산가라고 할지라도 그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중도에서 지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가파른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그 너머에는 수월한 내리막길이 있어서 다시 호흡을 골라 다시 오르막을 향해 도전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길의 오르막과 내리막 길에서 우리의 믿음을 잘 조절하여 끝까지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곤고케 하시는 하나님
오늘 시편 기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시편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1) 시편 22편에서는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고난의 절정기였다면,
2) 시편 23편에서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 휴식과 평화를 누렸고,
3) 지난 주 시 24편에서는 다시 ‘여호와의 산에 올라야’만 하였습니다.
오늘 시편 25편에서 시편 기자는 원수들의 위협과 더불어 마음에 근심과 고난과 곤고와 환난 중에서 ‘오직 주님만 우러러보고, 종일토록 기다리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시 25:5) “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이와 같은 시편 기자의 모습은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일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 되어갈 때와 고난의 때를 다 만드셨으며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오늘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믿음을 실천한 사람으로 우리가 곤고한 처지에 놓이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본보여 주고 있습니다.
(시 25:1)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여기서 ‘우러러 보나이다’라는 말(ac;n: 나사)은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들어 올린다고 할 때 쓰는 말로 미완료 상태입니다. 쉬운 성경은 오늘 설교 제목처럼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2절에는 ‘주께 의지하였사오니’라고 하였고 3절에는 ‘주를 바라는 자들’이라고 하였고, 마지막으로 21절에는 ‘내가 주를 바라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은 흔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우러러 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쩌다’가 아니라 ‘종일’, 그것도 “힘이 없고, 의지할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원수들을 능히 대적할 만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힘으로 원수들을 처리할 수 있지만 왜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맹신자처럼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시편 기자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처럼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그 답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만 기다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생에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였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내 능력과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그 문제를 내 힘과 지혜로 해결하겠노라고 조급하게 서두르다가 오히려 일을 더 꼬이게 만든 적은 없습니까? 아마도 다반사였을 것입니다.
간혹 사람들에게 무능하고 연약하게 보일지라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처럼, 이제 부터라도 시편 기자처럼 믿음의 방식으로 문제의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어 가는 지혜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인생을 곤고케 하시는 하나님이 무심하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본심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 다른 것을 바라보지 말고 형통하면 교만하기 잘하는 인간을 때로 곤고케 하셔서 오직 잠잠히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애 3: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2.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는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시편 기자의 생명만이 아니라 시편 기자의 명예와 권위까지 실추시켜 수치를 당하게 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떡이 아니라 아름다운 믿음으로 말미암은 명예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시편 기자의 삶과 하나님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질까?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시 25: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기자가 정작 두려워한 것은 원수들의 비난과 조롱이 아니라 시편 기자가 당하는 고난이 자신이 젊었을 때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시 25: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우리는 이미 시편 기자가 젊었을 때 어떤 죄를 지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철저하게 회개하여 이미 사죄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자신이 지금 처한 어려움이 혹시 젊었을 때 범한 그 죄 때문이 아닌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경우 사람들이 비난과 정죄의 돌을 던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젊었을 때 죄를 범했으며 자신의 죄악이 너무나 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말 시편 기자는 양심이 화인을 맞아 감각을 잃었기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사죄를 받아 양심에 참 자유를 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시 25: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여기서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라는 말(jl's; 살라흐)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용되어진 단어로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해 지속적으로 ‘용서하다, 사면하다’라는 뜻의 와우 계속법 완료형입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도록 범한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셨고 또한 용서하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인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인간은 누구나 다 죄성을 가지고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범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한 비난은 불신자의 죄보다 더 냉혹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만큼 책임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실패할 수 있고 실 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에 대해서 비웃음과 조롱은 불신자보다 더 냉혹합니다.
물론 지은 죄에 대해서 비난과 정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 씌어 매장하고 죽이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을 섰던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돈을 주고 거짓 증인까지 세워서 예수를 죽이려고 할 때 분명히 재판관 빌라도 총독이 무죄를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불복하고 무조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과 달리 죄가 티끌만큼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죄하시고 그 죄를 십자가의 피로 대속해 주시는 긍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처럼 많이 탕감을 받은 자가 큰 은혜를 받은 자이며, 하나님이 많이 탕감을 하신 것이 크신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신 것이기 때문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롬 5:20) “십계명을 받은 결과 모든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죄가 깊다는 것을 알게 될수록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더욱더 깊이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때문에 고민이 되는 사람은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회개함으로 사죄의 은총을 받아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까지 선물로 주시는 긍휼과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이라고 자랑하며 영광을 돌리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 갈 길을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피조물 중에 가장 지혜로운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인간이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배은망덕하는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치 갓난아이 때에 심한 열병에 걸려 고열로 뇌가 손상을 입어 지능에 장애를 가져온 것처럼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한 죄악으로 바이러스로 인해 영적 지능 이 마비되어
1)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2) 어디로 가는 것이 바른 길이며,
3)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바로 알지 못하는 영적 장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시편 기자는 누구보다 지혜롭고 영특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야 할 바른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고 주님만 기다렸습니다.
(시 25: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 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그 이유는 그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계를 만든 사람이 고장난 시계를 가장 잘 고칠 수 있는 것처럼 소문난 명의라고 해서 모든 병을 완벽하게 다 고치는 의사는 없습니다.
하물며 인간의 고장 난 영혼을 고칠 수 있는 명의는 더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러한 의사는 오직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뿐임을 믿고 하나님께 자신을 가르쳐 주시기를 구하고 기다렸습니다.
(시 25: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시편 기자는 선하시고 정직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온유한 자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택할 길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시 25:9)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시 25: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시편 기자가 원수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을 때 자신의 힘과 지혜로 거기에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다면 더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사모하며 항상 여호와를 바라보고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바라고 항상 주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이 그를 그 그 물에서 벗어나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25: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 사단이 빠지지 않거나 빠졌다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시편 기자처럼 종일 여호와를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만이 최선의 지혜와 해결책인 것입니다.
(시 25:2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시편 기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잘나가든지 어려움을 당하든지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1) 범죄하였을 때(11절)
2) 외롭고 괴로울 때에도(16절)
3) 마음에 근심이 많을 때에도(17절)
4) 곤고와 환난 중에도(18절)
5) 많은 원수들이 자기를 미워할 때도(19절)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한 결 같이 주님만 기다리고, 주님께 피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믿었기 때문이고 어려울 때만 아니라 평소에 늘 하나님을 친구처럼 가까이 하였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시 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만일 시편 기자가 엄청난 죄를 범하였을 때 세상 왕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 죄를 해결하려고 하였다면 사울 왕과 다름없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주님만을 기다렸을 때 하나님이 시편 기자를 죄에서 건지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귀하게 끝까지 들어 쓰신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시편 기자가 항상 바라보고 종일 기다린 하나님이 바로 오늘 우리가 믿는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기자가 때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극심한 모함과 멸시, 그리고 조롱 속에서도, 뼈를 깎는 듯 한 환난의 고통 속에서도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믿음이 그를 승리할 수 있도록 한 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시편 기자처럼 오늘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기다린다면 동일한 은혜를 주심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일간지에 보니 637만 명이 최근에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으며, 절대 빈곤층이 410만 명이 되는데 기초 수급자가 매년 감소하기 때문에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해 자살을 하기까지 하는 사각지대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나 시련에 봉착하게 되면 너무도 쉽게 실망과 좌절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때로 곤고함을 당하게 될 때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움을 구하고 응답을 기다리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매어달려야 합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벧후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 세상의 학식과 인생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내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시편 기자처럼 겸손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택할 길을 가르치시는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결코 소극적이고 의타적인 잘못된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믿음‘입니다.
2) 만일 양심에 찔리는 숨은 죄가 있거든 주님 앞에 나아가 모든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주께서 다 사하시고, 용서하시고,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전과 달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은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는 자에게,
가) 창조하신 자연 만물의 섭리를 통하여,
나)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하여,
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라)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성령님의 감동을 통하여,
마) 주변에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며, 어떻게 해야 바로 믿고 바로 사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안다고 해서 다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아시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마음과, 그렇게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심으로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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