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
(시 26:8-11)
(시 26: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시 26: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 26: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시 26: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 가장 많이 자주 듣는 소리는 믿음이라는 말과 은혜라는 말일 것입니다.
물론 빈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먹고, 걷고, 일하고, 돈을 벌기 전까지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과 은혜를 힘입고 살아가는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도움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은혜는 반드시 어떤 조건이 충족될 때만 한 시적으로 베풀어지는 제한된 은혜로, 세월이 지나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되갚아야만 것이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 은혜만을 경험했던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조건적이면서도 무한한 은혜라고 하였을 때 누구나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자를 위해서 그렇게 엄청나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실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랑하여 주심은 더욱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믿음을 지킬 수 없는 절실한 험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가장 잘 본보여 준 사람이 바로 오늘 시편 기자입니다.
1. 완전한 사람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도, 너 나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유한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완전한 사람인지를 판단하여 달라고 탄원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시 26:1) “[다윗의 시]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기서 ‘완전함’이라는 말(!To, 톰) )은 ‘완전, 무결, 성실’이라는 뜻입니다. 이 성경 본문을 쉽게 번역한 성경에서는 “여호와여, 나에게 죄가 없음을 밝혀 주소서. 나는 깨끗하게 살아왔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굳게 믿었으며, 한 번도 두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중에 감히 하나님 앞에서 시편 기자처럼 기도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그것도 겉으로 들어난 행위만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보시고 알 수 있는 양심까지도 결백을 주장할 정도로 말입니다.
(시 26: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타 번역) “여호와여, 나를 이리저리 시험해 보시고, 내 마음과 생각을 깊이 살펴보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까닭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유한하며 우리가 죄인이라는 전제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게도 흠이 없고 완전한 사람이라면 구태여 하나님을 믿거나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시편 기자가 과연 그 정도로 완벽한 사람입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는 백지와 같이 깨끗한 사람입니까?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렇게 담대한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동안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믿음을 돌이켜 보아도 시편 기자가 결코 자신의 허물과 한계를 전혀 깨닫지 못할 만큼 어리석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을 만큼 정말 깨끗하게 살아오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편 기자 자신이 속이고 이같은 기도를 한 것일까요?
그러면서 또한 후반부인 오늘 성경 본문에 가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전후가 모순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시 26: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그러나 시편 기자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면 결코 시편 기자가 자기 자신을 속이거나, 영적으로 무지하거나, 교만해서 이런 기도를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기자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완전함을 변론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편 기자가 누구보다 허물이 많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전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좋은 예가 바로 믿음의 사람 노아입니다. 물론 노아는 시편 기자처럼 자신은 완벽한 삶을 살았노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친히 성경에 그렇게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창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의 시대는 세상이 얼마나 부패하고 죄악이 극심했든지 하나님이 보시고 한탄하고 근심하실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세상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어서 물로 심판을 하실 정도로 세상에 죄악이 가득했던 때였습니다.
(창 6: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노아도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세대를 본받지 않고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기서 ‘은혜’라는 말(@je, 헨)은 ‘호의, 은총, 아름다움’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입었더라’는 말(ax;m, 마차 )은 ‘이루다, 이르다’ 라는 뜻의 완료형으로 이미 임한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말세의 현상을 마치 노아의 시대와 같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시대는 노아 때부터 더 부패한 시대라고 개탄할 정도입니다.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여기서 ‘그러 하리라’는 말은 ‘이런 방식으로’라는 뜻의 말(ou{tw)과 ‘~하리라, 있으리라, 되리라’는(e[somai ) 두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이는 마치 노아 때의 심판은 말세의 심판의 예고편으로 노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불시에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쓰나미로 인한 엄청난 피해가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지 않고는 악한 세대를 이겨나갈 수도,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살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우리도 노아가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변화되어야만 갈수록 악해지는 이 세대를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은혜는 과연 어떤 것인지 오늘 시편 기자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
성경학자들은 오늘 성경 말씀은 사울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사방으로 군대를 풀어 포위하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 26: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한 자’라고 고백한 반면에 대적들은 정반대로 ‘죄인, 생명을 찾는 살인자’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편 기자는 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원수들을 피하여 깊은 산속 동굴을 찾아 은신할 정도로 험난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발이 평탄한데 서 있다’고 정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 26: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여기서 ‘평탄한 데’라는 말(r/vym 미쇼르))은 눈에 보이는 평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정직하게 똑바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며, 비록 원수들에게 둘러쌓여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지만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어떻게 그와 같은 위기와 역경 중에서도 마음의 평온과 정직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바른 길을 가고 있으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가능했을까요?
물론 시편 기자보다는 훨씬 수월한 환경에서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믿음없는 자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 잘하는 믿음 약한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 비결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것입니다.
(시 26: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여기서 ‘주의 인자’라는 말은 성경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는 헤세드(dsej)라는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가 자기의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추억이 아니라, 현재 자기를 눈앞을 떠나지 않고 ‘온 몸을 감싸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 성경에서는 이 본문을 (시 26:3) “주의 사랑이 항상 나를 감싸고 있기에 내가 변함없이 주의 진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라고, 가슴에 와 닿게 번역을 하였습니다.
우리 중에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고, 나 또한 부모가 되어 부모 생전 때보다 더 나이가 많은 노년이 되었어도 부모님이 그립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이 늘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의 은혜를 시편 기자와 같이 온몸과 가슴으로 느껴지고, 감사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결심이 점점 더 깊이 느껴진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온 몸과 마음을 감싸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좋은 느낌이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새롭게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은혜 중에 가장 좋은 은혜요,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입니다.
3. 은혜를 받은 사람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기자가 자기를 까닭 없이 음해하고 고소하고 미워하고 죽이려는 자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고 흠없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면, 앞으로도 그같은 믿음을 지속하려면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고 그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고자 힘썼을 때 시편 기자는 원수들과 차별화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기자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완전한 자로서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1) 주의 진리 가운데서 살고자 하였습니다.
(시 26: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여기서 ‘주의 진리’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행하여’라는 말(&l'h 할라크) )은 주의 진리가 가는데 까지 가고 주의 진리가 머무는 곳에 머무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뜻하는 와우 계속법 완료형입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에서는 ‘내가 변함없이 주의 진리를 따라가 살아갑니다’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성경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많은 것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입니까?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 지혜로웠던 솔로몬은 인간이 공부를 많이 하는 것에 대해서도 헛되다고 한 것입니다.
(전 2:15)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더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늘 시편 기자처럼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주의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입니다.
(엡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2) 악한 자들을 미워하고 멀리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 26: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허망한 사람’은 거짓말쟁이를 가리키며, ‘간사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여 감추고 선한 체, 믿음의 있는 체 하는 자를 뜻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거나 앞으로 동행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들의 집단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시 26: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누구나 선은 좋은 것이고 악은 나쁜 것이라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아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기에 다수의 사람들이 악을 범하고 또한 남을 유혹하여 더불어 악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악한 자와 함께 앉아서 선을 행할 수 없고 오히려 원치 않는 악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는 시편 기자는 악한 자들의 집회를 미워하고 그들과 함께 동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것은 상한 갈대와 같은 결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어디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3) 주께서 계신 집을 사랑하오니
시편 기자가 악을 미워하고 악한 자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면 시편 기자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좀 더 가까이 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을 하였습니다.
(시 26: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집은 성막을 가리켰고 시편 기자 당시에도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의 집은 성막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삿 18: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대상 6:48,) “그들의 형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더라”
하나님의 장막이나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증거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덮을 때를 뜻합니다.
(출 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집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하나님의 법궤를 무사히 옮길 때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어 미갈의 빈축을 살 정도로 하나님의 집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삼하 6: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뿐만 아니라 다윗은 자신의 평생 숙원사업인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재산을 기쁜 마음으로 다 내어 놓아 성전 건축에 모자람이 없게 한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대상 29: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집이 어디이며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주께서 계신 집이 어디며,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심으로 지상에 세워진 주님의 몸이라고 일컫는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집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정말 흠뻑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예배하는 일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주 경험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교회를 오고 싶지 않거나 교회를 나올 수 없는 일들이 자꾸 생길 때 우리의 마음에 시편 기자와 같은 기쁨과 평화가 있었는가? 를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주의 은혜를 받으려면 주의 전을 사모하여야 하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곧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수록 1) 주의 진리 가운데서 살고 2) 악한 자들을 미워하고 멀리하며 3) 주께서 계신 집을 사랑하오니 라고 고백한 말씀처럼, 오늘 우리도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상에서 끊임없는 죄의 유혹과 질병과 불의 사고와 사단의 권세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은 자는 능히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원수들과 달리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동일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남에게 전도는 고사하고 내 믿음조차 지켜나가기 어렵고 신앙연조가 오랠수록 신앙의 연륜 대문에 더욱 신령해지고 거룩해지고 성령 충만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신앙의 첫 사랑을 회복하고 비록 세상이 점점 시간이 갈수록 전도가 어려워지고 있는데 겨우 우리의 믿음을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성령 충만하여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주의 복음을 힘 있게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늘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자 답게 주님의 진리 가운데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러한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늘 성경의 시편 기자처럼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편기자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마 오늘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이 놀라운 비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라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 26:7)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시 26: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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