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기뻐하고 찬송해야 할 이유
(시 28:6-9)
(시 28:6)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시 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8)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시 28:9)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만사가 형통하기만 하고 순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때로는 시편 기자처럼 불의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물질적인 손해를 입거나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때로 그와 같은 위기에 버려두시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면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런 경우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흥망성쇠와 생사화복의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확고 불변한 큰 믿음의 소유자만이 끝까지 주님을 의지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러한 위기 상황에 이르기 초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해 주실 무한한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생각될 때 더욱 위기감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은 그러한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였을까요? 오늘 성경 말씀은 그에 대한 답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1. 무덤에 내려가는 자
누구나 자기의 어려움은 작은 것도 지나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되면 무관심할 뿐 아니라 마치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선입감과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기 쉽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시편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시편 기자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기자가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증거 중에 하나는 일평생 유일한 소원이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사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대적들과 원수들에게 억울한 일과 많은 고난을 수없이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어느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묵묵히 그것들을 견디었습니다.
오늘 성경도 그 중에 하나로 시편 기자가 악한 자들로부터 얼마나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시 28:1)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여기서 무덤은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던 이복형들이 요셉을 깊은 구덩이에 집어던져 넣은 것처럼 원수들이 시편 기자를 위기에 몰아넣은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시편 기자의 힘으로는 그와 같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처하였습니다. 만일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 때가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이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은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상태를 가리켜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환승역에서 다른 기차로 갈아타듯이 종교를 바꾸거나 아니면 중도에 하차하듯이 하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앞서간 신앙의 선진들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갔을까요? 모세를 비롯해서 오늘 시편 기자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선진들은 공평한 재판장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어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지라도 우리가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더욱 성숙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 지혜와 능력이 한결 같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 내가 믿음이 연약했을 때는 내가 구하기도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미리미리 준비하여 주셨으나 이제는 구하여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구약에 나오는 다니엘의 친구들과 다니엘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단 3: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하나님의 그와 같은 시험에 합격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사자 굴에서 살아났고 다니엘은 불 가운데서도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크게 달라졌을까요?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게 하실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죽게 하시려고 무덤에 내 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무덤 너머에 부활이 있음을 경험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을지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감추어 놓으신 깊은 뜻을 찾으려는 견고한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2. 주의 지성소를 향해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신 재판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억울한 문제를 가지고 공평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가지가 나아가서 하나님께 아뢰어 공편한 판단을 기다리고 그 뜻에 승복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일 것입니다.
(사 33: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오늘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다름이 없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비록 눈에 보이는 성전은 찾아갈 수 없을지라도 하늘 지성소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부르짖어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사람은 동일한 상황을 반복하여 경험하게 되면 맨 처음 느꼈던 감동을 점차 잊어버린 채 무덤덤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연조가 점점 더해지게 되면 마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반복되는 종교생활에 익숙해져서 무덤덤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시편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펴오면서 비슷한 상황이 여러 차례 반복되기 때문에 때로는 신선감이나 호기심대신에 마치 지난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처럼 지루한 생각까지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그와 같은 반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위기가 찾아 올 때마다 열이면 열 번, 백이면 백번 그 때마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시 28:2)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그것은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 절대자를 찾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처럼 본능적인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마치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처럼 기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위기 중에서도 시편 기자는 주의 지성소를 향해 손을 들고 부르짖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적으로 즉각 응답해 주셨을까요? 오늘 성경을 보면 그런 기적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현실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왜 언제나 동일하게 위기를 당하기만 하면 주의 지성소를 향해 손을 들고 부르짖는 기도를 반복하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때로 지체되거나 묵묵부답처럼 생각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에는 기차를 탈 때 검표원이 문 앞에서 일일이 표를 확인하였기 때문에 무임승차가 어려웠지만 요즘은 문 앞에서 검표원을 볼 수 없을지라도 표를 산 사람에게는 반드시 빈 좌석이 기다리고 있지만 표를 사지 않은 사람에게는 좌석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편 기자처럼 위기가 반복될지라도 반복해서 지성소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응답이라는 좌석이 예약되어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난이 우리를 시편 기자처럼 무덤으로 질질 끌고 가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는 더 넓고 크기 때문에 우리도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어 부르짖어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임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느 9:27)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여기서 ‘곤고를 당하게, 부르짖을 때, 구원하셨거늘’이라는 말은 모두가 다 미완료 형으로 한 두 번이 아니라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미완료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3.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
악한 자들이 시편 기자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시편 기자를 무덤으로 질질 끌고 갈려고 할 때 시편 기자가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부르짖어 기도하였다고 해서 상황이 금방 달라진 것은 아니라 악인들은 여전히 시편 기자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시 28:3,4)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그런 경우에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경우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시편 기자의 형편과 처지가 점점 더 나아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위기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편 기자가 계속해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정의롭게 세상을 통치하시기 때문에 결코 악인들의 도모와 계획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반드시 파괴되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 28:5)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마치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먼저 어두움에 휩싸였던 동쪽 하늘이 점차 밝아오는 여명처럼 아직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마음속에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여명을 마음속에 밝혀 주셨습니다.
(시 28:6)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그것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많은 고난을 겪을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힘과 나의 방패로 삼고 하나님을 의지 할 때마다 하나님은 시편 기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여 주신 지난날의 체험을 돌이켜 볼 때 이번의 위기에서 분명히 나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시편 기자를 짓누르고 있던 불안과 근심과 염려는 순식간에 안개처럼 걷히고 물밀 듯이 기쁨이 몰아닥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 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가 처한 현실은 전혀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의 기도 소리가 순식간에 확 달라졌음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전반부만 하더라도 금방 죽을 것 같은 극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 찬송으로 바뀐다. 여기서 다윗의 위대한 신앙을 발견한다. 자신의 기도가 마치 현재 이루어진 것 같은 마음으로 기쁨의 찬송을 드리는 적극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확신이 들 때 시편 기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시편 기자가 속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까지 함께 구원하시며 그 산업에 복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시 28:9)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그 이유는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왕의 승리는 백성의 승리가 되고, 왕의 패배는 곧 백성의 패배가 되는 연합 관계에 있게 된다. 이러한 신정국가의 특별한 관계에서 볼 때 다윗 왕의 승리는 개인의 숭리 이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진실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분은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참된 왕이신 여호와께서 목자와 같이 저들을 인도해 달라고 그는 간구했던 것이다(Calvin).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이 기도는 모든 시험과 고난 속에서 그들을 지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저들을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영원한 통치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는 말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장 절망을 느낄 때가 언제인가요?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요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입니다. 기도하고 응답이 없을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의심이나 불평이나 불신앙의 늪으로 빠져들기 쉽지만 오히려 때보다 더 위험한 때는 우리가 평소 소원하는 것처럼 만사가 형통한 때입니다.
예화
모든 새가 하늘을 다 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전 세계에 날지 못하는 새는 40여 종이 있다고 합니다. 흔히 날지 못하는 새들의 공통점은 보통 천적이 없는 섬에 살기 때문에 날 수 있 능력을 잃은 새가 대부분입니다.
대표적인 새로는 마다가스카르 섬에 멸종된 도도새와 뉴질랜드에 사는 키위라는 새입니다. 엄연히 날개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지 못하는 이유는 위협하는 포식자가 없어서 날개는 퇴화되고 먹기만 했기 때문에 몸집이 무거워 날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아시고 일평생 무슨 일을 하든지 만사형통하게만 하셨다면, 우리는 기도의 두 날개가 퇴화되고 영적인 비만증에 걸려 사단은 그 기회를 노려 우리를 넘어뜨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이라는 천적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에 그 때문에 우리를 억지로라도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오늘 우리의 믿음이 이나마 유지되고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설령 원치 않는 역경을 만날지라도, 기도가 더디 응답될지라도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주를 크게 기뻐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예 화
정신과 전문의 에릭 린드맨 박사가 위기를 당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85%의 사람이 위기를 당함으로써 나쁜 습관을 고치고, 부부 관계를 회복했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시간과 물질을 절약하는 등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위기가 우리의 삶을 생기 있게 한다면 두려워할 필요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설령 우리가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즐겁게 찬송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바로 오늘 시편기자처럼 지성소에 계신 주님께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고, 입을 넓게 열어 크게 기뻐하고 찬송하며, 더욱 주님을 의지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시37:5)"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잠16:3)"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벧전5: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 고난을 넘으면 부활이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때로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과 시련은 도리어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주는 기회임을 깨닫고, 고난 중에서 크게 기뻐하고, 즐겁게 찬송하는 큰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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