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마 21:6-11)

미션(cmc) 2014. 4. 15. 14:43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마 21:6-11)


(마 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마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마 21: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마 21: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종교를 선택하고 교회를 선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많지만 교회다운 교회가 많지 못하며 더구나 교회를 가장한 사이비 이단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마 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고 경고하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미혹’이라는 말(planavw, 플라나오)은 ‘길을 잃게 하다, 미혹하다, 빗나가다, 방황하다.’라는 뜻으로 행동이나 말로써 사람들을 속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과연 누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인가? 하는 것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 기준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러 이러한 분이 메시아라고 약속하신 예언의 말씀대로 세상에 오신 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기간에 하신 여러 가지 기적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1)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게 하신 일이라든지 

 2) 각색 병든자들을 오직 말씀만으로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나사로와 회당장의 딸이나 나인 성의 홀로 된 여인의 외아들을 살리시고 

 3) 갈릴리 호수의 노도 풍랑을 말씀 한 마디로 잔잔케 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이 그와 같은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마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와 같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정반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고난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절망스럽게 하는 근본 원인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이어야 진정한 구세주요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육신의 기적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하는 요나의 기적이 주님이 보여주실 최상의 기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그와 같은 요나의 기적을 이루시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습니다. 그 가운데 본격적인 첫 걸음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인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1.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 가신 곳은 여리고성으로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8km이요,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29km 되는 곳에 있습니다.

 여리고는 요단강을 건너 첫 성이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의 긴 여정을 마치고 정복한 성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나 창과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엿새 동안 법궤를 앞장세워 매일 한번 씩,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 돌고 나팔을 불며 고함을 지르니 성이 무너졌다고 하는 바로 그곳이 바로 여리고 성입니다. 

(수 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예수께서도 공생에 기간에 여리고에 들어가셔서 하신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리장 삭개오를 회개시키신 일이고, 또 하나는 두 명의 시각 장애자들의 눈을 뜨게 하신 일입니다.

 오늘 성경본문 앞장인 마 20장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가? 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 20: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마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 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마 20: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마 20: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여리고는 팔레스틴에서 예루살렘 다음 가는 부요한 도시로 예수님이 그곳이 머물기만 하셔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마 20: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인기가 더 높아짐으로 유명하게 될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일까요? 

 얼핏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상황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동안 자기들이 애타게 기다려왔던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비오니, 우리를 구하소서. 한없이 높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여. 호산나!' 소리치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도시가 들끓었습니다.“

(마 21: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2. 주의 예언을 이루시고자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진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하시고자 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마무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여리고에서 예루살렘 까지는 29 km 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 길은 예수께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강도 만난자의 이야기의 무대였던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골짜기요 또한 가파른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오르실 때 말이나 나귀를 타셨다는 말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29 km 나 되는 가파르고 먼 길을 제자들과 함께 힘들게 올라가셔서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불과 오리(2.7km) 정도 되는 베다니 마을 가까이에 있는 벳바게 마을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임금이나 부자가 타고 다니는 말이 아니라 하찮은 나귀를 구해 오라고 하셨습니다.

(마 2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왕이면 말이 아니라 나귀와 나귀 새끼를 구해 오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인적이 드물고 가파르고 먼 길을 오르실 때는 말이 없으면 나귀라도 구해서 타고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걸어서 올라가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정작 몇 걸음 안 남은 벳바게 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말이 아닌 나귀와 나귀새끼를 구해 오라고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너무 많이 지치셨기 때문에 좀 편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함이었을까요? 등산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것은 마치 에베레스트 정상을 몇 걸음 남겨 놓고 헬리콥터를 부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특별한 이유를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에서 죽으심과 부활까지 미리 다 예언이 되어있는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마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요 12: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그 선지자가 바로 스가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을 하였습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오늘 성경과 일치하여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스가랴는 예수님 오시기 전 520년전 다리오 왕 2년 때 활동한 선지자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오셔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것을 미리 알았을까요? 그것은 스가랴가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스가랴에게 장차 오실 메시아는 왕이 타는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분이 만왕의 왕이신 메시아라고 예언하게 하셨을까요? 

나귀는 그 용모부터가 볼품이 없는 짐승입니다. 용맹도 없고 빠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말처럼 기품도 없고 개처럼 영리하거나 씩씩하지도 않으며, 코끼리처럼 힘이 세지도 아니 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왕'이 탈 만한 짐승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 이후, 아니 세계 어디에서도 나귀를 탄 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짐승을 '메시아의 입성'에 동원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며 멸시와 간고를 겪으시고 질고를 겪으실 것이라’는 사 53:2, 3의 예언대로 '평화와 온유와 겸손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3. 성전을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이 뜻밖에도 놀라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왕이 행차를 할 때 사람들이 환호를 하며 길에 붉은 주단을 까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어떤 사람들은 종려 나뭇가지르 베어 길에 펴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것을 흔들면서 호산나 소리 높여 찬양하였습니다.

(마 21: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같은 군중들의 기쁨과 환호의 노래는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로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이기 때문에 교회가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예루살렘 성이 발칵 뒤집혔으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가리켜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마 21: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여기서 ‘온 성이 소동하여’라는 말(seivw 세이오) ‘흔들다, 전율하다’ 라는 뜻으로 마치 지진이 일어나서 땅이 요동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 21: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그 이유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야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여 마치 다윗이 통치할 때처럼 강성한 나라를 이루어 줄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제일 먼저 찾아 가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매일 레위기에 있는 대로 짐승을 불태워 바치는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1) 그러므로 성전에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예루살렘 밖에 사는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그 제물을 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온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계산이 빠른 장사꾼들은 그 사실을 알고 미리 성전 마당에다 짐승들을 미리 갖다 놓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얼마나 편리한 일입니까? 

 2) 그것만이 아닙니다. 당시 성전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하는데 반드시 유대인들의 화폐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통용된 것은 로마 화폐였기 때문에 반드시 환전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외국 여행을 하게 되면 반드시 환전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무데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산 빠른 장사꾼들이 그 사실을 알고 성전 마당에서 사람들에게 수수료를 받고 환전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편리한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그 사람들을 성전에서 다 내쫓으시는 일이었습니다.

(마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그렇다면 성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성전 밖에서 제물을 미리 준비하고, 환전을 해가지고 와야 하기 때문에 몹시 불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전 마당에서 장사하는 것 때문이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그 같은 일을 제일 먼저 하신 것은 당시 성전의 지도자들이 성전 마당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제사장들이 그들과 결탁하여 자릿세를 받고 매매하는 제물과 환전에 대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상납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제쳐 놓고 돈벌이에 급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기준은 항상 성전이 얼마나 거룩한가? 의 여부였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죄가 없었던 때는 단 한번도, 단 한곳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의 장소로 성전을 세우게 하셨고, 속죄의 수단으로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전마저 죄로 더럽혀지고,  제사마저 본질을 상실하고 더럽혀 졌을 때 하나님은 성전을 허물어 버리게 하셨고 법궤를 이방 나라에 빼앗기게 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부패해진 성전을 근본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심지어 사람들에게 성전을 허물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스라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기준은 항상 성전이 얼마나 거룩한가? 의 여부였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죄가 없었던 때는 단 한번도, 단 한곳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의 장소로 성전을 세우게 하셨고, 속죄의 수단으로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전마저 죄로 더럽혀지고,  제사마저 본질을 상실하고 더럽혀 졌을 때 하나님은 성전을 허물어 버리게 하셨고 법궤를 이방 나라에 빼앗기게 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부패해진 성전을 근본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심지어 사람들에게 성전을 허물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오늘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제일 먼저 성전을 청결히 하신 것은 십자가에 달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한 제일보임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 제일 먼저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시키는 일을 퍼포먼스처럼 하신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큰 건물을 세우기 위해 먼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땅을 사고 어떤 건물을 지을 것인가? 설계를 하고 그 다음에 하는 기공식을 할 때 테이프를 끊고 첫 삽질을 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대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시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건지시기 위해 속죄의 죽음을 죽으시고 그 피 값으로 영원한 성전이요 만인의 성전인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첫 삽을 뜨신 날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고난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고난은 오늘부터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이미 다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하나님이 이미 설계해 놓으신 성경의 예언을 하나하나 이루어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흔히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오늘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지 않았다면 설령 십자가를 지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완벽한 건물이 아니라 부실공사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그 때부터 온갖 모욕과 수 없는 채찍과 끔찍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잘 아시면서 묵묵히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얼마나 거룩한 발걸음입니까? 얼마나 고귀한 발걸음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모든 고난을 각오하시고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주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고난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감격과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들게 될 것입니다. 

 그 같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더욱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와 같은 일을 계획하시고 그같은 일을 이루신 하나님 아버지께 깊이 감사하며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매일 매일이 되기 위해 내일 새벽부터 진행되는 특별 새벽기도회에 모두 참석하여 매일새벽마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올려드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