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함께
(롬 6:8-13)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롬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이 벳바게에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손에는 국기대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환호한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 올라가시면 무수한 채찍과 끔찍한 고통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줄을 다 아시면서 그 길을 자청하신 까닭은 우리의 죄악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시는 속죄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끔찍한 것이기 때문에 한 순간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지나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소연하실 정도로 주님도 매우 고민하신적이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 기도를 접으시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를 바꾸신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눅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1. 십자가의 고난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전반에는 전파하심과 가르치심과 치유의 역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때때로 기적을 행하신 것도 그 가르침을 보다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유치원에서 사용하는 시청각자료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후반기에 접어들자 마치 학교에서 학년말 고사를 치는 것처럼 제자들에게 시험 문제를 주셨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여론조사 문제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치심과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작 예수님을 선지자들 중에 하나로만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오답입니다.
(마 16: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두 번째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선지자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때 열두 제자들 가운데 줄반장인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마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정답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이 헛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후, 그동안 단 한 번도 가르치신 적이 없는 새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신 것이었습니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그것도 한번만이 아니라 (마 17:23)에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고 하셨고, 또 (마 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고 거듭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처럼 거듭하여 말씀하신 것은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정적인 사실이고 마치 대법원 판결처럼 확정적이기 때문에 대비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사실 인생에 있어서 죽음이라는 명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세월호의 좌초로 전 국민 가슴 아파하는 것도 앞길이 창창한 학생들의 생사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온 국민의 슬픔을 잠재울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 기대는 단 한명이라고 죽지 않고 살아서 구조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워하는 십자가 죽음을 거듭해서 말씀하신 이유는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신 씀처럼 십자가의 죽음 너머에 부활을 말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강조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 너머에 영광스런 부활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십자가 전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까닭도 제자들에게 고행을 강요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너머에 반드시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처럼 제자들도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려고 할 때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가혹한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부활의 영광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2. 부활의 영광
예수께서 마 16장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더불어 말씀하신 후에 이어지는 마 17 장에 보면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지 불과 엿새 후 열두 제자들 가운데 마치 증인처럼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세 사람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산에 올라 그 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 모습이 변하였는데 그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제자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더불어 말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흔히 변화산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 초막을 셋을 지어서 하나는 선생님을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베드로가 그렇게 푹 빠지고 말았을까요? 예수님이 그렇게 찬란하고 영광스럽게 변하신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 때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기뻐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너무나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몹시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과 달리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그 말이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셔서 제자들과 더불어 그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그 변화산의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마 17: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십자가의 죽음 너머에 부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 세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부인하는 제자들에게 변화산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시대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부활이 어떤 것임을 이미 다 잘알고 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찬란한 모습으로 변화하신 것을 본 제자들이 그곳에 초막을 짓고 살겠다고 간청할 정도로 지극히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변화가 바로 주님이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부활의 예표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십자가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성이 크면 클수록 반드시 성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그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는 성문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죄를 십자가로 속죄하여 그 예수님 때문에 그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에 영광에 이르게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최종 목적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 너머에 준비되어 있는 영광스런 부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와 부활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종교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은 영광스런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어야 하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부활이 또 나의 부활이 되는 생명의 종교 다시 살리는 종교 고난으로 시작해서 영광으로 마무리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을까요?
3. 연합의 비밀
우리의 구원도 그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한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인 전 인류가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그 같은 말씀은 독선이나 자만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내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그것이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그 때문에 어떻게 오늘의 내가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는 오직 한 길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 답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으시는 곳에 함께 따라가서 예수님과 더불어 죽게되면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여기서 ‘연합’이라는 말(suvmfuto") 은 ‘함께 심겨진, 함께 타고난, 함께 자라는’이라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연합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과 하나로 묶여진 사람일까요? 그 것이 바로 세례라는 것입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교회가 세례와 성찬을 가장 거룩한 예식으로 여기는 까닭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이라는 거센 물결에 휩쓸려 지옥을 향해 떠내려가고 있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영혼의 잠수사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구세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든지 그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마음으로 믿고 그 십자가를 붙드는 믿음의 사람에게 주는 표가 바로 세례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그 예수님을 내가 믿음으로 그 예수님과 나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예수님과 떼어 놓을 수 없도록 하나로 꽁꽁 묶여져 있음을 실감하게 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찬예식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으신 살을 기념하는 떡을 먹고,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신 것을 기념하는 포도주를 마심으로 그 떡과 포도주가 내안에 스며들어 나와 일체가 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베푸는 세례는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었음을 뜻하는 증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장사한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의 부활은 그 예수님을 믿는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설령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라도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죽을 것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으로 변화되는 부활의 축복을 받아 예수님처럼 영생을 하게 된다는 것을 보증해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켜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이며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부활의 열매가 될 수 있다는 약속의 보증인 것입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만을 가르치지 않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한 자에게 어떤 상급이 약속되었으며,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어떤 벌이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칼빈(Calvi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성도는 영적 자유를 얻은만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육체의 소욕(所欲)을 제어하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것은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과 의 가운데 온전히 거할 때까지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생활은 한 마디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 몇 가지 이름이 있는 가운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하셨는데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3)
그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 예수님과 가장 함께 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의 시간입니다. 그 주님은 예배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삶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축복은 특권이 아니라 반드시 그 축복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1) 소극적인 책임-죄의 종이 되지 말라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우리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단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서 때때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릴 때처럼 예수를 믿으면서도 죄의 유혹에 빠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 말씀처럼 설령 죄의 자리에 떨어졌을지라도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하지 말고, 죄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죄에 넘어졌을 때 거기서 뭉그적거리지 말고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주님께로 달려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 눅 15 장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와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런 예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사탄이 경작하는 밭과 하나님께서 경작하는 밭이 있고, 그 사이에 길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탄의 밭에서 힘겹게 노동하다가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셨고 하나님의 밭에서 즐겁게 일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사탄이 그에게 “이 밭에서 일하던 때가 그립지 않느냐”고 유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탄의 밭으로 살짝 넘어갔지만, 그 순간 그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님을 깨달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죄의 종이 되지 않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2) 적극적인 의무-의의 종이 되라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더 이상 어둠에 살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영역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가신다면 우리도 그리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나를 살리시기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입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6:15),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며(고전 6:19), 값으로 산 것(고전 6:20)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된 연합이란 말속에 함유된 뜻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은 거짓의 아비 마귀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분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 안에서 죄의 지배를 받아 온 옛사람이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사단이 더 이상 나를 명령하거나 지배할 권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구원과 시간과 물질을 가지고 과거처럼 죄 가운데서 살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예배자의 삶, 주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일을 위해 드리는 적극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순종의 삶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죄 사함의 축복이 있다면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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