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천국에서 작은 자, 천국에서 큰 자/마 5:17-19

미션(cmc) 2015. 6. 3. 17:27

천국에서 작은 자, 천국에서 큰 자
(마 5:17-19)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가정의 달 오월을 맞이하여 오늘은 스승의 날이 있는 주간이기 때문에 교회는 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어린아이로 태어나기 때문에 육체가 자라기 위해서는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지혜가 자라기 위해서는 교사의 도움이 필요하고,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교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성쇠는 경제나 군사의 힘과는 무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가의 여부에 의해 좌우되어 왔음을 이스라엘의 역사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최고로 신성하게 여기는 이스라엘 사회는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법인 성경을 힘써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그것만이 아니라 아이가 자라면 학교에 보내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회는 아이가 자라면 회당에 보내어 랍비들에게 하나님의 법인 성경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랍비가 판검사보다 더 권위가 있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열두 살 먹었을 때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가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가족과 헤어졌을 때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서 성전 안에서 랍비들과 대담을 나누는 예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눅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 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여 주신 법인 성경 말씀은 이처럼 가정에서는 부모를 통해서 마을에서는 랍비를 통해서 전수되어 그 말씀이 보전되어 왔습니다.

 1. 바리새인들의 위선
 예 수님의 생애는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 30년 동안은 공생애를 준비하신 기간이었고 2) 3년은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신 공생애 기간이었고, 3) 마지막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동안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역의 완성기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삼년의 공생애 기간에 주로 하신 사역은 1)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신 것과 2) 친히 마을로 가셔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일과 3) 백성들의 병을 고쳐주신 일이었습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훈련시키는 일에 모든 힘을 다 쏟으셨습니다.
(막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여기서 ‘가르치시며’라는 말(didavskw, 디다스코)은 ‘받아드리게 하기 위해 반복해서 손을 뻗히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뜻하는 미완료 능동태로 삼년 동안 지속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는 일에 올인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무지한 상태로 태어난 인간은 가르치는 교사와 배우는 학생 간에는 반복적인 학습 활동을 통해서 보다 더 체계적으로 습득할 수 있기 때문에 반복학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오시기 전부터 바리새인들 중에 랍비라고 선생들이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뒤늦게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신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1) 예수님이나 바리새인들이나 똑같이 성경이라는 동일한 교재를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상호협력과 보완을 통해서 성경을 더 넓게 더 깊이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성경을 동일한 텍스트로 삼과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통해서 기대되는 열매는 동일한 사랑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사람들에게 점점 더 인기가 있게 되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는 마치 밥그릇 싸움에서 밀린 자처럼 예수님의 약점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아무런 약점이 발견되지 않을수록 예수님을 더욱 시기하고 모함하여 죽이기로 결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파트너가 아닌 경쟁자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이 활발할수록 마치 자기들의 기득권에 손해가 오는 것처럼 생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심지어 위증자를 돈으로 매수하여 예수님을 고소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하는 일을 주도한 사람들이 당대 최고로 존경받는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나 바리새인들이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일을 했어야만 합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 최고의 선생인 랍비라고 호칭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고사하고 예수님을 제거하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거짓말도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한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는 그 속마음을 감춘채 그럴듯하게 미화하여 사람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일컬어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심성을 가진 랍비들에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씨를 땅에 뿌리는 농부처럼 생명력이 없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깨우침과 변화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이라는 것이 생명 없는 정보를 교환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을 깨우치고, 변화시키고, 살리는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모두 생명력인 하나님의 사랑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장로의 전통이라는 문자만 앞세우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공허하게 하였고 미움과 시기와 증오를 씨뿌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장본인들이 이교도들이나 로마제국이 아니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헤롯 정권이 결탁하여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그 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백성들이 십계명과 모세오경을 가르쳤으며, 진실과 정의를 입술로 말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시기와 질투와 모함과 거짓말과 심지어 거짓증언을 할 사람들까지 사주하여 예수님을 고소하고 빌라도가 무죄를 언도하려고 할 때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선동하여 끝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와 같은 과오는 역사 속에서 되풀이 되어왔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십자군 전쟁이고, 부패한 중세 로마 가톨릭시대 개신교 지도자들과 개신교인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한 일이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자비한 테러나 내전의 배후에는 종교가 주도를 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공부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서 변하여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오히려 불신자보다 더 악독해질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십계명과 오경을 어려서부터 암송하고 그것을 가정과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을 주도하던 대 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 의해 주도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2. 진정한 교사 예수 그리스도
 부패한 인간들이 모여사는 곳은 동서양이나 고금을 막론하고 안정과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질서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법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간이 만든 법은 필요가 없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십계명과 모세 오경이면 족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여 주신 법이요, 그 법을 잘 지키기만 하면 안정과 평화가 보장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여 주신 성경 말씀도 영원한 진리입니다.
 여기서 ‘영원하다’는 말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르고 세상 풍조가 변화무쌍할지라도 티끌만큼도 수정이나 보완이 필요 없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 와 같이 영원한 진리의 내용은 1) 하나님을 사랑하고 2)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며, 또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까지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른 법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그와 같은 계명과 율법을 잘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자손 대대로 그 말씀들을 가르치고 또한 생명을 걸고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성경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힘써 지키려고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 러나 세상에는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친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사자성어처럼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율법을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아주 소소한 것까지 하나 하나 규정을 만들어 그것을 지키게 한 것이 구전을 통해서 전승되어 내려온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반드시 손을 씻이어야만 한다는 전통입니다.
(마 15: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이는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좋은 전통이라는 생각도 들것입니다. 우리도 흔히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상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흔히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 러나 문제는 물이 귀한 나라이기 때문에 어쩌다 보면 손을 씻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위생상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복음 전도 여행을 하시는 중에 거처가 일정하시지 않은 나그네 여정이기 때문에 때로는 손을 씻지 못하고 음식을 잡수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약점을 잡기 위해 파파라치처럼 예수님을 미행하는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느냐? 그것은 장도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따졌습니다.
(막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그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안식일을 위반하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것이 장로들의 전통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예수님을 미워한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어찌보면 장로들의 전통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고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진지한 모습으로 칭찬해야 할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둘다 똑같은 안식일을 놓고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견해가 상반된다면 그 중에 누가 옳은 것일까요?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의 계명을 위배하는 행위라고 규정하셨습니다.
(마 15:3)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느냐?”
 그러므로 안식일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리새인이라는 것입니다.
 모 세 이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랍비들이 그와 같이 잘못된 전통으로 백성들을 옥족이고 있었기 때문에 진리로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와 같은 장로들의 전통으로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은 안식을 주시기 위함이라면 안식일에 병에 걸려 누워있는 것은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자유하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안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선생이라고 하면서 병에 걸려 안식일에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안식일이라는 전통으로 얽어매어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있을 때 안식일에 주인이 되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된 자가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고 가르치면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람들을 억압시키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잘못된 장로들의 전통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고 예수님은 정반대로 안식일을 범하고 율법을 페하는 이단자처럼 매도하고 있는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랍비들이 도리어 율법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늘 성경에 당신은 결코 율법이나 선지자를 페하려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장로들의 전통으로 율법을 왜곡하고 변질시키고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페하러’라는 말(kataluvw, 카탈뤼오)은 ‘파괴하다, 부수다, 페지하다’라는 뜻이고, ‘완전하게’라는 말(plhrovw, 플레로오)은 ‘채우다, 충만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 결과 율법을 장로들의 전통으로 대치해 버린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여전히 율법의 멍에 아래 종노릇하게 하고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시는 일은 그와 같은 잘못된 가르침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구원받기 충분하도록 율법을 가르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의 알파벳 가운데 요드라는 글자는 마치 쉼표처럼 한 획이고, 와우라는 글자는 지팡이처럼 생긴 글자의 머리에 점 하나 찍은 것과 같습니다.
 하 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인간에게 주신 율법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무엇이 부족하여 보충하고 보완할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말씀이나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에 페기해야 하는 불완전한 말씀이 아니라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말씀 곧 완전한 말씀이기 때문에 장로들의 유전으로 보완하거나 대치할 필요가 없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마치 성경이 미흡한 것처럼 생각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기 손해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3. 예수님이 주신 사명
 오늘 성경에 천국에서 큰 자는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라고 말씀하였는데 그러한 교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이십니다.
 예수님은 삼년 성경 말씀을 하나도 버리거나 더할 것이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먼저 내가 남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하늘나라에 가서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5:19) “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침의 본을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과목 중에 가장 어려운 사랑을 가르치실 때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시면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입술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배반하고 돈을 받고 판 가룟유다가 원수들을 데리고 포박하려고 오는 것을 아시면서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사명이 가르치는 사역이었으며 또한 그 사역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되지 말고 배운 것을 몸소 실천하여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 일을 가정에서 실천하기 위해 우리들에게 자녀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우리들을 교회와 구역에서 말씀이가 되게 하시고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사명을 받은 우리들이 힘써야 할 두 가지는 마치 양날을 칼처럼 먼저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둘째는 가르치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서 부모가 되어 아이를 낳아 양육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는 것처럼 배우는 일에 성실하게 되면 때가 되어 가르치는 자가 될 때 좋은 교사가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 온 세상에 전파되어가게 하신 것이며 이 일을 위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 성경을 가르친다고 해서 다 따라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가장 존경받는 랍비들조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밤낮 가르친다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전통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한 것처럼 지금도 이단들이 성경을 왜곡하고 인간이 만든 잘못된 전통을 마치 성경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의 도살장인 것입니다.
(딤전 1:3) “[거짓 교설에 대한 경고] 내가 마게도냐로 떠날 때 간곡히 일러둔대로 그대는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의 입을 막으시오. 그들이 조작해 낸 이야기나 신화, 그리고 끝없는 족보 이야기를 그치게 하시오. 그린 것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쓸데없는 의문과 논쟁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2) 사도 바울이 말세의 현상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세상 지식은 학교 교육으로 만족해하지 않고 많은 돈을 드려 사교육까지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 못합니다.
(딤 후 3:7) “늘 배우기는 하지만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전혀 이를 수 없습니다.”(딤후 4:3)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기 욕심을 따를 것이며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하는 교사들의 말을 들으려고 그들에게 모여들 때가 올 것입니다.”” (딤후 4:4) “그들은 진리를 외면하고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3) 세상이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갈수록 신실한 믿음의 가정에서는 세상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성경 말씀을 자녀손들에게 가르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그 일을 돕기 위해 토요성경학당을 매주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 하지않나 내 자녀들에게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마치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 각도가 조금만 틀려도 목표에서 빗나갑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서 성경 교육은 인생의 미래에 정확한 방향을 잡아주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점인 것입니다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4) 예수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을 주시는데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은사라는 선물을 주셔서, 남을 섬기는 일을 하여 장차 하나님 앞에서 상급이 많도록 하십니다.
 그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는 사랑의 은사요, 그 은사 중에 꼭 받아야 할 은사는 남을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롬 12:6)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어떤 일이든 한 가지씩은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롬 12:7) “만일 남을 섬기는 은사를 받았거든 성의를 다해 남을 섬기고, 남을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거든 훌륭하게 가르치십시오.”
 왜냐하면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을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은 남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뿐 만 아니라 내가 지금 가정에서 자녀를 가르치고 구역에서 주일학교에서 각 기관에서 남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면, 말로만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그 사람에게 신앙의 본을 보이며 나의 가르침과 나의 삶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 감동을 주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시거나, 너는 작은 자’라는 책망의 소리를 듣지 말고, 오늘 성경 말씀처럼 너는 지극히 큰 자라는 칭찬을 받는 좋은 부모 좋은 교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사주일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자녀를 가르치는 부모가 교사요,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쳐주는 모든 이가 우리가 존경해야 할 교사입니다.
 만일 그 분들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분들은 우리가 잊어서도 안 되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되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내가 지금 가정에서 자녀를 가르치고 구역에서 주일학교에서 각 기관에서 남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만일 내가 그 중에 한 사람이라면 말로만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그 사람에게 신앙의 본을 보이며 나의 가르침과 나의 삶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 감동을 주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시거나 작은 자’라는 소리를 듣지 말고 오늘 성경 말씀처럼 큰 자라는 칭찬을 받는 좋은 교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 5:19)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계명이라 하여 이를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그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린이날을 지키고 어버이주일을 지키는 것처럼 오늘 교사주일을 지키는 것은 교사의 역할이 너무나 크고 교사의 사명이 너무 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낳아 기른 부모에게 불효하고, 자기를 가르치는 선생을 폭행하고, 자기 나라를 지키는 경찰이나 군인을 무시하는 나라는 고속도로에서 역주행을 하는 것과도 같은 나라입니다.
 놀랍게도 학교 교사 중에 36%가 교사 된 것을 후회할 만큼 오늘날 교권 침해가 빈번한 세상인 반면에,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녀를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가 다수라고 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은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여기는 부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나의 자녀를 위한 일인 것입니다.
 또한 구역에서 교회에서 나와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고 믿음을 가르쳐주는 이들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수고하며 가르치는 이들이 신바람이 나도록 격려와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는 성도들이 다 되기 바랍니다.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