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주님께 맡기세요/(시 55:22-23)

미션(cmc) 2015. 6. 3. 17:32

주님께 맡기세요
(시 55:22-23)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3)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피할 수 없는 짐이 몇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짐,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저야 하는 짐, 사회의 공인으로서 억지로라도 저야만 하는 책임이라는 짐들이 있습니다.
 짐이란 말은 한 마디로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짐을 지게 되면 부자유하게 되고 그것을 벗기 전까지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벗으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짐을 벗지 못하는 까닭은 내 대신 짐을 맡아줄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히말라야 산맥에는 8,000 m 가 넘는 봉우리가 14개가 있는데 이를 가리켜 14좌라고 합니다. 이 봉우리들을 완등하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를 찾지만 완등한 사람을 대장이라고 하는데 그 숫자는 그리 많지 못합니다.
 최초의 한국인으로는 엄홍길 대장이 2000년 7월 K2에 오르면서 아시아인으로 처음이자 세계에서 8번째로14좌를 완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등산가라고 할지라도 산소가 희박하고 기후가 수시로 변하는 고산에서 짐을 날라주고 길을 안내 해주는 세르파나 포터의 도움 없이는 설령 정상에 올랐을 지라도 하산하는 도중에 얼마든지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산을 정복하기 원하는 등산가는 좋은 포터인 짐꾼을 만나는 것이 축복 중에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즐거운 하이킹이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조깅이 아니라 히말라야 16좌보다 더 높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등산가의 곁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길을 안내하는 길 안내자 세르퍄와 짐꾼인 포터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고 맡겨야 짐은 무엇이며 그 짐을 맡아 줄 짐꾼은 누구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벗을 수 없는 짐
  과연 내가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무슨 연유로든지 마음에 근심이 있고 불편하며 탄식을 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일이든지 사람이든지 내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바로 그와 같은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었습니다.
(시 55:2)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여기서 ‘근심’이라는 말(j'yc, 시아흐)은 ‘불평’이라는 뜻이고, ‘편하지 못하며’라는 말(dWr, 루드)은 ‘불안으로 안절부절하는 상태’이고, ‘탄식’이라는 말(!Wh, 훔)은 ‘큰 소리를 지르다, 당황하게 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상태로 시편 기자가 현재 매우 고통스러운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내면적으로는 (시 55:4)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망의 위험’이라는 말(hm;ya, 에마)은 ‘내가 이제 죽는구나!’ 라는 생각 때문에 사지가 벌벌 떨릴 정도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상태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55:5)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여기서 ‘덮었도다’ 라는 말은 와우 계속법 미완료 상태로 벗어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에게만 이런 근심과 불안과 고통과 사망의 위험과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사람은 거울을 보아야만 자기 얼굴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은 성경이라는 거울을 보아야만 자신의 영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아무런 근심 걱정없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같지만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면 시편 기자와 같은 근심과 불안과 고통과 혹시 죽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식욕을 잃고,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인생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다면 결코 남은 세월은 긴 것이 아닙니다.
 올림픽 경기 장에서 달음박질 하는 선수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듯이 아무리 지난 날 잘못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세월만이라도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남은 세월을 성경 말씀처럼 남에게 악이 아니라 선하게 대하면서 항상 기쁨과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살전 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물론 시편 기자도 그와 같은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와 같은 고통의 짐을 벗어 던지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만일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원수들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광야로 멀리 날아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시 55:6)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시 55:7)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만일 방공호와 같은 피난처가 있다면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고난의 폭풍 속에서  벗어나 도망치고 싶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 55:8)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이러한 시편 기자의 간절한 소원은 다른 말로 현실도피심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중에 시편 기자와 같은 현실도피심리를 단 한번도 맛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평온한 척 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서 체념을 하고 있는 것이지 할 수만 있으면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대부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살심리입니다.
 과연 세상에 시편 기자가 소원한 것 같은 비둘기 날개나 안전한 피난처가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사람들은 빚을 얻어서라도 그것을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참은 것이 아니라 부득불 할 수 없어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2. 무거운 짐을 지우는 원수들
 동물도 적을 만나면 무서워 피하다가 마지막에 피할 길이 없으면 악을 쓰면서 대드는 법입니다. 
 시편 기자도 인간이기에 고통스러운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하지만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오죽하면 원수들의 혀를 잘라버렸으면 좋게 다고 탄식을 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시 55:9)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어떻게 보면 시편 기자를 미워하는 원수들만이 아니라 미움을 받고 있는 시편 기자도 역시 부패한 인간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비단 시편 기자만 원수에 대한 이런 미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물론 시편 기자도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는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아무리 그렇게 살아보려고 해도 노력을 해도 마음속에 원수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심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활활 불타오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진리이고 진실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패하고 정직하지 못한 인간은 설령 그러한 마음을 먹고 있을지라도 자기는 거룩하고 고상한 척 하면서 입으로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실과 정직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용서하고 싶어도 사랑하고 싶어도 마음에 용서가 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시편 기자가 그렇게 원수들을 용납하거나 용서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전전긍긍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차라리 시편 기자를 괴롭히는 원수들이 남남이라면 시편 기자는 얼마든지 그것을 참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시 55:12)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시편 기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은 오히려 시편 기자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요, 억지로라도 시편 기자를 사랑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자들이 시편 기자를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고 있기 때문에 시편기자가 더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 55:13)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시 55:14)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이를 쉬운 말로 번역한 성경을 보게 되면 시편 기자가 왜 그렇게 까지 힘들어하고 가슴 아파 하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 55:13) “그런데 그가 다름 아닌 바로 너 아니었더냐? 내 동료요, 가장 가깝고 믿음직스럽던 벗이 아니더냐?” (시 55:14) “우리가 다정스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함께 예배를 드리곤 하지 않았더냐?”
 아마도 여러분들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시편 기자와 같은 배신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가 전혀 모르거나 내가 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적이 있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시편 기자처럼 도움을 주고, 사랑을 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만은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가상적이거나 추상적인 글이 아니라 우리들의 형편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부끄러운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다 드러내 보여주는 영적인 MRI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한다는 것과 동의한다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나라도 그럴 수 있겠다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되지 라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라고 나를 너무나 잘 이해해주는 말씀이지만 결코 시편 기자처럼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하고 원수들을 똑같이 미워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일을 더 악화시키고 원수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 해롭게 할 수 있는 그릇된 생각이요 잘못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아무리 나를 미워하는 원수일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동의하시지 않는 방법이나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설령 나에게 배은망덕한 원수가 나를 괴롭히고 있을지라도 그 원수가 내게 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과 방법으로 그 원수가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결코 하나님이 동의하시지 않는 방법이요,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행동은 물론 그런 마음이 들지 못하도록 생각을 차단하는 방화문을 닫아야 합니다.

3. 무거운 짐을 맡겨 버리라
 물론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천사가 아닌 사람인데 천사처럼 흰옷을 입고 날개를 단다고 해서 천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가 나를 배신하는 원수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미움이나 복수심이나 배신감에 낙담하고 분노 때문에 원수를 저주하고 악담하고 복수하려고 한다면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원수보다 티끌만큼도 더 나은 것이 없는 실망스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섭섭함이나 미움이나 배신감을 먹지 말야 하는 줄 알면서도 그러한 짐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만 믿고 살아가야 할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믿고 사람에게 기대하는 보상심리가 내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인생이 사랑하는 자식일 수도 있고 나와 친한 친구일수도 있습니다.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 3:16 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사랑은 우리 인간들과 달리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사랑하신 사랑도 전혀 보상심리가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빚을 우리가 살아온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들처럼 보상심리나 기대감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은 벌써 나를 버리셨어야 합니다.
 마치 공공요금이 체납되었을 때 인정사정없이 단수 단전 압수 경매절차에 들어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내게 오래전에 은혜를 차단하는 단수조치를 취하셨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지 하나님의 지으신 세상에 세도 내지 않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빛이나 물을 공짜로 펑펑 쓰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는 고사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신자들보다 더 많은 세상입니다.
 심지어 좀 배웠다고 지성인을 자처하면서 쥐꼬리만 한 지식을 가지고 마치 전지전능한 자처럼 착각하고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고, 창조를 부인하는 말을 함부로 하고 악플을 달고 사람들을 선동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하나님께서 벌써 손을 보셨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신자와 불신자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좋은 사람과 형편없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동일하게 값없이 생명을 주시고 살려두시고 값없이 물을 주시고 빛을 주시고 양식을 주시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적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까닭은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값없이 일방적으로 사랑하셔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의 빚진 자들이기 때문에 그 빚을 원수에게 똑같이 돌려 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아무리 배신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 사람에게 베푼 사랑이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것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면 나도 그 사람에게 아무런 기대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설령 내가 사랑을 준 그 사람이 나를 배신한다고 할지라도 실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미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더 큰 배신을 당하시고 감사는 고사하고 배은망덕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나를 아직까지 살려 두시는 그 사랑의 빚 때문입니다.
  설령 내 자식이 나를 배신한다고 해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등친다고 할지라도 그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나도 그 사람을 똑같이 미워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내가 이미 스스로 벗지 못할 무거운 짐을 또 하나 더 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을 참으며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그저 흘러내려 보내는 사랑이어야만 내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는 방법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바로 그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시편 기자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는 방법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과연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편 기자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자유하고 싶어서 행복하고 싶어서 하나님께서 그 무거운 짐을 해결해 달라고 아침에도 부르짖고 점심에도 부르짖고 저녁에도 부르짖었다고 하였습니다.
(시 55:16)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시 55: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그 결과 원수들이 온갖 수단 방법을 다하여 시편 기자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원수들이 결코 시편 기자를 죽이지 못했고 이기지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시편 기자를 평안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 55:18)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그러나 눈에 가시와도 같은 원수들은 시편 기자의 눈앞에서 사라지거나 망하지 않았습니다. 엄연히 살아서 못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시 55:20) “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물론 그것을 보는 시편 기자의 마음에는 자유 함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시편 기자는 원수에 대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그 원수의 손에서 벗어났으면 감사하고 평안하게 되었으면 행복헤야 하는데 왜 내 마음에는 여전이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일까요?
 내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평안하게 되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힌 원수들을 망하게 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나쁜 마음이 우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패한 인생의 실상입니다. 누구든지 그러한 마음을 벗어던지지 못하고는 진정한 마음에 평안이나 자유나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시편 기자의 마음 속에 세미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자기 속에는 원하는 자아와 원치 않는 자아가 공존하고 있다고 한 것처럼 시편 기자의 마음속에도 두 자아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1) 첫째 자아는 원수를 내 손으로 갚아야 하겠다는 부정적인 자아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들이 여전히 살아서 입술에 나오는 말은 버터보다 매끄럽게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시편 기자를 죽이려고 칼을 뽑고 있기 때문에 시편 기자가 그 원수들이 망하는 것을 보기 전에는 결코 안심할 수 없고 그 마음에 항상 원수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 내 던저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시 55:21) “그의 입은 버터보다 매끄러우나 그 마음속에는 전쟁이 일고 있으며 그의 말은 기름보다 부드러우나 칼처럼 날카롭다.”
 여기서 ‘칼처럼’이라는 말(hj;tiP, 페티하)은 칼집에 꼽혀 있는 칼이 아니라 언제든지 상대방을 찌를 수 있도록 칼집에서 뽑은 칼을 뜻하는 말로 원수들이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도 그에 맛 대응을 하기 위해서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고 내가 찔리기 전에 내가 먼저 찔러야 한다는 긴장감 속에 불안한 상태의 마음이 시편 기자의 부정적인 자아입니다.

  2) 두 번째 자아는 시편 기자가 아무리 원수들이 망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할지라도 그 원수들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시편 기자를 더 힘들게 하는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해결해 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자유하라는 긍정적인 자아입니다.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여기서 ‘짐’이라는 말(hg;a;D] 데아가)은 물건이 아니라 지금까지 시편 기자의 마음을 짓누르고 기쁨과 평안을 빼앗아 가버리는 ‘불안과 걱정과 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맡겨 버리라’는 말(&l'v, 샬라크)은 ‘내 던지다, 집어 던지다’라는 뜻의 명령형으로 묻거나 따지지 말고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원수들에 대한 미움을 무조건 내 마음에 더 이상 자리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끄집어내어 내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멀리 집어 던져 버리라는 명령형입니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시편 기자가 자유하게 되는 길이고 진정으로 원수를 갚는 일이고 시편 기자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원수들을 철저하게 갚아 주실 것이라는 믿는 긍정적인 자아입니다.
(시 55:23)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오늘 성경은 주전 979년 전 구약 성경 삼하15: 7- 18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다윗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편 기자를 죽이려고 한 원수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윗이 여러 아들들 가운데 유난히 더 사랑을 주었던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들이 아닌 바로 압살롬이 다윗이 병상에서 고통할 때 백성들을 선동하여 구테타를 일으켜서 자칭 왕이 되려고 했던 인물이고, 그와 같은 압살롬의 배신을 부추기고 도운 살마이 다윗의 오른팔이요 제갈공명과도 같이 신임을 했던 아히도벨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맨발로 울면서 왕궁과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시므이와 같은 배은 망덕한 자들에게 멸시와 모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두 가지 갈등 속에서 어떤 쪽을 택했을까요? 긍정적인 자아입니다. 시편 기자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원수를 복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짐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겨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도 시편 기자의 믿음대로 원수를 갚아 주셨습니다.
 실제로 시편 기자 다윗이 자기를 배신한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원수 갚는 일을 자기가 집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을 때 시편 기자의 믿음대로 아히도벨은 자살했으며(삼하17:23), 압살롬은 요압의 단창에 치명상을 입고 요압의 병기 맡은 소년들에 의해 쳐죽임을 당했습니다.(삼하18:14, 15)
 여호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시편 기자의 원수들을 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복수가 어디 있습니까?
 이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의인의 원수를 보응해 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삼천여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지만 마치 오늘의 시대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기자가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을 살아간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짐은 생존의 짐이요, 죄의 짐이요, 질고의 짐이요, 죽음의 짐이요, 욕심의 짐이요, 남을 미워하는 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각자의 짐을 지고 가기 때문에 남의 짐을 맡아 줄 여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짐을 남에게 떠맡기려는 사람들만 가득할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곁에서 우리의 짐을 저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와 같은 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과연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해야 할 까요? 오늘 시편기자 다윗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허물이 많은 사람으로 당연히 고난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티끌만큼도 죄가 없으신 분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와 질고와 죽음의 짐을 지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고 하신 말씀은 시편 기자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시편 기자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짐을 맡기는 것이 왜 원수를 이기는 승리의 삶인가를 생생하게 본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첫 마디가 오늘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원수를 용서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에게 짐을 가중시키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는 우리의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빌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닮는 삶입니다. 원수를 내 손으로 갚으려고 하면 반드시 내 손에 원수의 피를 묻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승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는 삶이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가장 어려운 짐은 원수와 같이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 대한 미운 마음과 끓어오르는 복수심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마음을 내 던지지 못하면 나는 원수와 하나도 더 나은 것이 없는 사람이고 나중에는 내가 원수보다 더 무자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내 짐을 주께 맡겨 버리는 삶은 날마다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나는 주의 명령을 따라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원수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인 것입니다.
 시편 68:19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롬 12:19,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그렇게 할 때 지금은 힘들지만 먼 후일에 오늘 시편 말씀처럼 원수는 내 발앞에 엎드리게 하시고 나는 원수 앞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는 축복을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