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믿음의 부부
(벧전 3:1-7)
(벧전 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 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벧전 3: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가정의 달인 5월에 어린이날과 어버이의 날도 지나갔고 둘이 하나가 되어 부부가 된 것을 기념하는 5월 21일 보냈습니다.
부부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정에 제정해주신 창조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성숙한 믿음의 남편, 성숙한 믿음의 아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은 크게 가정과 사회와 교회라는 세 가지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어느 한 곳에서든지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바라는 행복한 가정은 집의 크기나 경제의 다소를 막론하고 부부 간에 가족 간에 이해와 관심과 대화와 소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렇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제정해주신 창조의 질서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가정의 질서
공기가 오염된 도시에 밤하늘에서 별을 보기가 어렵지만 전기가 없는 선교지에서 밤을 맞게 되면 밤 하늘에 별들이 얼마나 많은지 포화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별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 것은 사진작가들이 밤을 지새우며 별의 궤적을 추적한 사진을 보게 되면 수많은 별들을 마치 원을 그리는 콤파스로 그린 것처럼 각기 별마다 일정한 궤적으로 그리며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별들의 궤적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신 질서입니다. 만일 그 질서가 깨진다면 우리는 밤마다 우주공간에서 별들이 충돌하는 불꽃놀이를 보거나 지구와 충돌하는 행성들 때문에 지구는 벌써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에도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교회 안에도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고 무엇을 하든지 그 질서를 따라서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고전 14: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고전 14: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여기서 ‘질서’라는 말(tavxi", 탁시스)은 ‘배열, 정돈, 순서, 시간을 지키는 일정한 연속’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에 여러 교회를 세운 사도 바울은 무질서한 고린도 교회와 같은 교회에 대해서는 근심을 한 반면에, 질서 있는 골로새교회에 대해서는 기뻐하였습니다.
(골 2: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세상 모든 질서의 기본은 가정입니다. 만일 모든 가정들이 하나님이 가정에 주신 질서를 잘 지킨다면 반드시 행복한 가정이 되고, 그러한 가정들이 모인 사회와 교회도 평화로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만이 아니라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부여하신 창조의 질서는 어떤 것일까요?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물론 이 질서는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국회를 통과한 국법이 아닙니다. 이 질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친히 돕는 배필을 지어 가정을 만드시면서 세우신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필요에 의해서 바꾸거나 폐기할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기 때문에 인간이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영원한 법입니다.
2. 아내가 지켜야 할 질서
사도 바울은 평생 독신으로 지낸 반면에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미 가정이 있었습니다.
(눅 4: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그러므로 가정에 대한 지식은 사도 바울보다 베드로 사도가 경험적으로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부부의 질서에 대해서 사도 바울보다 베드로 사도의 권면이 훨씬 더 현실감이 있음을 오늘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벧전 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물론 남녀평등이 보편화되고 있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볼 때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은 한 쪽으로 치우친 가부장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고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질서이기 때문에 무조건 맹종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에 팔과 다리는 둘이지만 머리가 둘일 수 없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정에 머리를 부부가 아니라 남편으로 세우신 깊은 섭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배에 선장은 하나이듯이 가정에 선장을 남편으로 세워 가정이 산으로 가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uJpotavssw, 휘포탓소)도 남성우월주의에서 나온 수직적인 상하관계의 순종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고 세워주는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복종을 뜻합니다.
순종을 우리에게 본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권위가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을 성자 예수님이 담당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uJphvkoo", 휘페코오스)하심으로 구속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복종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가정에서 부부의 질서를 지키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당시 유대 사회나 로마 사회나 여성을 비하하는 세상 풍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여성들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불신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벧전 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여기서 ‘값진 것’이라는 말(polutelhv", 폴뤼텔레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감정하시기를 ‘매우 값비싸고 우수한 것’이라고 하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남편 앞에서 벌벌 떨고 노예처럼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라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우리가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물건값을 지불해야 만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남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세상에 없다면 만일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남편을 구원시킬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결코 남편이 잘해주기 때문이 아니며, 남편이 옳기 때문이 아니고, 그렇지 못할 지라도 남편의 구원을 위해 남편의 더 좋은 믿음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라면 망설이지 말고 순종할 때 무엇보다 남편과 아내 간에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가정이 평안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와 같이 남편에게 순종을 잘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큰 몫을 한 대표적인 여인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성경에 보면 아브람이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사라의 간섭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사라의 만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러 차례 실수를 반복하고 사라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 때에도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사라의 순종과 협력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창조 질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운동경기에서 우승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상대방보다 힘이 더 센 사람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힘을 어떻게 적절하게 방어하고 허점을 공격할 줄 아는 선수가 우승을 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남자의 약점은 아내가 자기보다 더 세지거나 화려하게 치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내가 약해보이는 듯 하지만 착한 행실과 온유한 심정으로 쉽게 분노하지 않고 평정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모습이 남편을 무력하게 만드는 강력한 무기라는 것입니다.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결코 남편이 잘해주기 때문이 아니며, 남편이 옳기 때문이 아니고, 그렇지 못할 지라도 남편의 구원을 위해 남편의 더 좋은 믿음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라면 망설이지 말고 순종할 때 무엇보다 남편과 아내 간에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가정이 평안할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왕이 되고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기 전에 가정에서 왕처럼, 대통령처럼 받들고 순종할 때 남편은 세상에 나가 왕 같은 자신감과 대통령과 같은 리더십을 행사하여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아내도 는 왕후나 영부인처럼 사모님 소리를 듣게 되는 영광을 남편과 더불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남편이 지켜야 할 창조의 질서
오늘 성경을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책임은 여러 가지인 반면에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책임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또는 그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 같이 여겨 지식을 따라 동거하고”
마치 하나님께서 아내에게는 무거운 짐을 더 많이 지우시고 정반대로 남편의 짐은 가볍게 하신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이 하늘만 아니라 땅도, 오른 손만이 아니라 왼손도,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만드셨습니다.
금이 자갈보다 작아도 값이 비싼 것처럼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요구하신 가정에 대한 책임과 창조질서는 결코 아내의 책임보다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아내를 위해 무엇을 해주기 전에 아내를 알아야 한다.
아내는 보이는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을 하기만 하면 되지만 남편은 보이지 않는 아내 성품이나 마음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 까닭은 남자는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여성은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고 아내를 쉽게 판단하고 내 멋대로 아내를 대했다가는 노년에 크게 후회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벌어다주고, 아내가 좋아하는 선물을 자주 사주기만 하면 되는 다가 아닙니다. 아마도 우리 중에 깜짝 쇼를 하여 아내를 기쁘게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물을 사다 주었을 때 좋은 소리를 들은 남편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내는 남편처럼 단순한 존재가 아님을 가장 잘 나타날 때는 함께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고르고 또 고르고,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시간만 보내고 사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아내의 모습을 종종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남편은 무슨 일을 쉽게 결단할 수 있는 힘을 아내는 무슨 일을 빈틈이 없이 실속있게 처리할 수 있는 섬세한 마음을 갖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마치 성능 좋은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겸비한 명차와 같이 부부가 조화를 이루어 온전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 자손이 땅을 정복하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남편들이 그러한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아내에게 순종을 요구할 때, 부부간에 소통에 장애가 오고 적과의 동침처럼 억지 동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질서를 아는 남편은 아내의 얼굴이 아니라, 아내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2) 아내는 남편보다 연약한 그릇임을 알고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여기서 ‘더 연약한’이라는 말(ajsqenhv", 아스데네스)은 ‘강하지 않은, 힘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보다 더 쉽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주부가 설거지를 할 때 스테인리스 그릇과 유리그릇을 똑같이 다루지 않는 것처럼 남편들은 아내를 유리그릇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오래 전에 이미 상처를 받은 것을 남편이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처 난 유리그릇을 함부로 다룰 대 결국 손을 베게 되는 것처럼 가정에 손해가 오는 것입니다.
지난 날 남편이 아내가 마음이 깊기 때문에 자기를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라고 전제하고 자기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한 것이 연약한 그릇인 아내에게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게 된다는 것을 남편들이 이해하고 평소 아내에게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 갈등하고 있는 문제는 오늘 내일에 새인 문제가 아니라 오래전에 남편이 무심코 뿌리는 가시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이미 오래 전에 남편으로 받은 상처 때문에 남편을 향해 마음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예 화
연약한 그릇으로 지음을 받은 아내들은 남편이 삼일절, 광복절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받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돌아오는 아내의 생일을 챙기지 않고 아무리 바뻐도 결혼기념일을 잊어 버라는 것은 6. 25가 일어나는 것보다 더 참혹한 가정 파탄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남편인 것입니다.
흔히 남편들은 해마다 돌아오는데 그까짓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느냐?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끼고 있다고 속아서는 안됩니다.
2) 평소에 그 무엇보다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성경은 남편이 가정에서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대상은 아내라고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여기서 귀히 여기라는 말(ajponevmw, 아포네모)은 ‘존중하다, 몫을 나누어 주다’라는 뜻입니다.
간혹 남편들이 가정에 돌아오게 되면 아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취미에 시간과 마음을 쏟는 남편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수석이나 골동품 수집이나 취미 생활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동조하기보다 귀찮게 여기는 아내들을 T.V 에서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가 조금만 호응을 해주면 정말 아내를 더 사랑할 것인데 하는 바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들은 아내의 그러한 변화를 기대하지 말고 남편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남펀이 아무리 아끼고 좋아할지라도 언젠가는 다 버려야 할 때가 오지만, 아내는 좋으나 싫으나 세상에서는 물론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함께 가야 할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게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예 화
천국과 지옥-우리 남편 천국에 있어요, 지옥에 있어요. 그러면 나는 천국에 안갈래요.
3) 아내와 소통이 되어야 하나님과도 소통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있는 우리들의 간절한 소원 은 1) 설교 말씀이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성령의 은혜가 시간마다 넘치고, 2) 내가 드리는 기도가 향연처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적인 소통이 시온의 대로처럼 열려지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물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생활보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은밀히 범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정 문제가 교회 문제이고, 부부간의 소통이 하나님과의 소통에 직결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막히지’라는 말(ejgkovptw, 엥콮토)은 ‘방해하다, 훼방하다’라는 뜻의 현재 수동태로, 지난날이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나의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라고 아내를 무시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남편은 아내와만 소통이 단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안 되고, 기도를 해도 응답이 안 되는 영적인 단절이 온다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 그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성들이 점차 남성화되어가고 남성들의 영역에서 남자들 못지않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가정에서 어머니 역할과 아내 역할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공백이 생기기 때문에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데 있어서 득보다 실이 더 많게 됩니다.
이와 같은 창조 질서 가정질서가 지켜지지 않고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풍조와 사상들이 점점 더 악하고 음란한 세상으로 만들어가기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의 미래가 더더욱 걱정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요즘 사회에서 노인이 되면 남자들이 왜 여성 앞에 쪽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이가 많아 힘이 달리기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제정해 놓으신 가정의 질서를 무시고 남존여비 사상과 가부장의 권위를 앞세워 남편들이 아내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그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내나 남편을 막론하고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창조의 질서로 돌아가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아내다운 아내가 되고, 남편다운 남편이 되는 것이 마지막 남은 과제입니다.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아내를 사랑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고, 아내의 심정을 이해하고 아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의 그러한 마음을 인정하고 신뢰하기만 하면 남편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할 수 있는 용기와 각오가 있습니다.
(막 11:25) “그러나 너희가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먼저 용서하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그와 같은 상처를 주고받기 때문에 가정에 화목이 깨치고 부부의 소통이 단절되고 그 때문에 신앙생활마저 무미건조한 가정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부간에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의 방법은 상대방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막 11:25) “그러나 너희가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먼저 용서하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을 따라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화해와 용서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부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가정의 문제는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질서를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켜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해하는 일이 가정이 소통되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또한 하나님과 소통하는 성숙한 믿음의 부부의 자세입니다.
'설 교 > 이규왕목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려운 날에 누구를 의지할까? /시 56:3-11 (0) | 2015.06.13 |
---|---|
주님께 맡기세요/(시 55:22-23) (0) | 2015.06.03 |
천국에서 작은 자, 천국에서 큰 자/마 5:17-19 (0) | 2015.06.03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딤전 5:1-4) (0) | 2015.06.03 |
제자들과 예수님/마 19:13-15 (0) | 2015.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