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약해질 때
(시 61:1-8)
” (시 61: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시 61:5)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시 61:6)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시 61:7)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시 61:8)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우리 중에 평생 단 한 번도 감기조차 걸려 본적이 없을 정도로 늘 건강하기만 했던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할 것입니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건강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며칠간 약만 먹고도 병이 낫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고 낫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 고침을 받은 사람,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아직도 별 차도가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 어떤 질병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아픔입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첨단 의료 장비로도 검출이 되지 않고, 수술을 해서 치료를 받을 수도 없고, 그 병이 악화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할 정도로 무서운 병입니다.
우리 중에 육체의 질병에 걸려본 적이 없어도, 마음이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육신이 아프면 물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지만 마음이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1. 낮은 곳
오늘 시편 기자를 보니 시편 기자도 마음이 약해질 때가 있었으니 그런 경우 시편 기자는 어떻게 했는지를 오늘 성경을 통해서 배움으로 몸이 건강한 것이 행복이라면 마음이 건강한 것은 더없는 행복임을 깨닫고 약해진 마음을 강하게 담대해야 하겠습니다.
1) 담대했던 시편 기자
현대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생소한 질병들이 자주 나타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공황장애’라는 질병으로 아마도 들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공황장애는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데도 마음이 불안하고 숨이 차고 누군가가 자기를 죽일 것 같은 공포와 극심한 불안 가운데 두려워 떠는 병입니다.
아마도 시편기자는 그와 무관한 사람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시편 기자는 어려서부터 용감무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 화
오래 전 탄자니아를 방문하였을 때 한참 학교에 다녀야 할 어린 소년이 혼자서 긴 막대기 하나만을 들고서 여러 마리의 양의 풀을 찾아 메마른 들판을 헤매이는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게 생각이 납니다.
그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가난해서 학교에 보내지 않고 어려서부터 목동 노릇을 하는 것이 가업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아마도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동 생활을 하면서 성장한 소년 다윗은 양을 노리는 맹수가 나타나면 겁먹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을 물어가는 사자와 곰을 따라가서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올 정정도로 담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삼상 17: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삼상 17: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소년 다윗이 아버지 이새가 군대에 간 형들의 안부를 알아가지고 오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형들을 만나러 전선에 갔다가 불래셋 군대의 거장 골리앗의 우세에 눌려 온 이스라엘의 군대와 사울 왕까지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다윗이 자원하여 갑옷이나 창검이 아니라 물맷돌만으로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그 목을 벨 정도로 용맹했던 사람입니다.
(삼상 17: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삼상 17: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 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2) 두려워 떠는 시편 기자
시편 기자가 사울 왕에게 미움을 받아 쫓겨 다닐 때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잘 감당했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왕이 된 이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윗답지 않은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시 61:2)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여기서 마음이 ‘약해질 때’라는 말(#f'[;, 아타프)은 ‘고개를 돌리다, 기력이 없다, 실신하다’라는 뜻으로 심신이 매우 쇠약해진 상태로 마치 실신한 것과 같은 상태임을 뜻 합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적의 군대의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시편 기자가 가장 신뢰했던 사람으로 부터의 배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배신자를 얼마든지 엄벌할 수 있지만 그 배신자가 남이 아니라 누구보다 사랑했던 자식이요, 충성을 다했던 신하들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들만은 배반할 줄 몰랐던 사람들이 시편 기자를 배신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배신자들과의 싸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시편 기자는 멀리 도망 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곳이 ‘땅 끝’이라고 하였습니다.
(시 61:2)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여기서 땅 끝이 지구 끝이 라는 말이 아니라 시편 기자가 요단강을 건너 동편의 땅 마하나임이었을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하고 추측하고 있는데 구태어 그곳을 땅끝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윗이 가장 사랑하는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과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언제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 막연하게 생각되기 때문에 땅 끝이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더구나 이 사실을 적들이 알고 뒤쫓아 온다면 지리적으로 전투하기가 매우 불리한 저지대이기도 하기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시편 기자와 같은 처지라고 하면 시편 기자처럼 마음이 짓눌려서 매우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날 그렇게도 담대했던 사람이 지금 이처럼 나약해졌을까? 의문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의 두 얼굴입니다.
과거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도 시편 기자요, 현재 이리 저리 고민을 해 보아도 답이 없어서도 불안해하고 두려워 떠는 사람도 동일한 시편 기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두 얼굴로 누구든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담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안에 떨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영원히 담대하고 영원히 절망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든지 때로는 담대했다가 때로는 불안했다가 이리 저리 왔다갔다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나는 그 중에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2. 높은 곳
시편 기자의 몸은 비록 땅 끝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소가 있는 시온과 거리가 너무 멀고 원수들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언제 되돌아갈 수 있을지 막막한 상태였습니다.
더구나 시편 기자가 도피하여 있는 땅끝은 지대가 낮기 때문에 원수들이 쉽게 공격해 올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시편 기자에게는 원수들보다 더 높은 도피처가 필요하였습니다. 그곳이 원수를 피할 수 있는 견고한 망대였습니다.
(시 61: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채 버려 둔 지역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곳이 예루살렘에 해당하는 여부스 족속들이 사는 높은 지대였습니다.
(수 15:63)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물론 사울 왕 때에도 여부스는 정복되지 못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포기하지 않고 여부스를 공격하려고 할 때 지금 까지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여부스를 감히 다윗이 정복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다윗을 조롱할 정도였습니다.
(삼하 5:8)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그러나 다윗은 포기하지 않고 여부스를 공격하여 마침내 여부스 성을 빼앗고 그 성의 이름을 다윗성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였습니다.
(대상 11:5) “여부스 원주민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 다윗이 시온 산 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물론 다윗의 뛰어난 전략도 한 몫을 하였고,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는 백성의 우두머리와 지휘관으로 삼겠다고 현상금을 걸었을 때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여부스에 먼저 올라가서 우두머리가 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물론 요압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하기 위해 보내신 천사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대상 21:1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더니 천사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시편 기자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배신을 했을 때 그 성을 싸움에서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포기한 곳이기 때문에 이제 땅 끝에 와 있는 시편 기자가 그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한다고 하는 것은 저지대에 있는 시편 기자에게는 매우 불리한 처지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시편 기자의 마음은 더욱 약해지고 눌렸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와 같은 불리한 상황에서 원수를 이기기 위해서는 원수보다 더 높은 요새와 망대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적을 올려다보지 않고 내려다 보면서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와 같이 마음이 눌려 있을 때 약해져 있을 때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구한 것은 원수들보다 더 높은 망대와 요새였습니다.
(시 61:2)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물론 그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 주변에는 예루살렘을 내려다 보면서 적과 싸울 수 있는 요새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시편 기자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으로 예루살렘 보다 더 높은 요새와 망대와 바위가 없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예루살렘은 물론 세상 그 어느 요새보다 지극히 더 높은 망대와 요새와 산성이 있음을 알 았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망대 중에 지금 원수들이 차지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보다 더 높고 더 크고 더 강력한 망대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러한 망대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망대는 시편 기자가 의뢰하고 있는 주님이 견고한 망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 61: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여기서 '견고한 망대‘라는 말(z[, 오즈)은 원수들 보다 더 강력한 ’힘, 능력, 세력, 권능‘ 의 망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단 한번도 점령된 적이 없는 망대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강력한 피난처는 오직 주님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구한 것은 새로운 피난처가 아니라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시편 기자를 구하시면 누구든지 시편 기자를 묶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만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그곳은 겨우 몸만 피하는 곳이 아니라 편안함까지 보장된 주님의 장막이요, 가장 안전한 피난처인 주님의 날개아래라는 것입니다.
(시 61: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만일 시편 기자가 예루살렘 성에서 평안히 머물러 있을 때는 이와 주의 장막이나 피난처를 찾지 않았습니다.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원수들에게 쫓겨 땅 끝에 처하고 낮은 곳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 시편 기자는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 잡혀 우왕좌왕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높은 망대, 평안한 주의 장막, 안전한 피난처인 주님만을 바라보았음은 오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3. 승리의 기도
오늘 성경을 크게 둘로 나누면 1-4절까지 전반부와 나머지 5-8절까지 후반부로 날 수 있는데 너무 대조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전반부가 시편 기자가 마음이 억눌리고 약해져서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면 후반부에는 마치 모든 문제 역전된 것처럼 하나님께 거룩한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미 시편 기자는 왕의 자리에서 축출되었지만 그 왕위에 오르고 내리는 이는 주 하나님이심을 믿는 승리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1) 기업의 회복
시편 기자가 겉으로 보기에는 예루살렘과 먼 마하나임 땅 끝에 와 있고 아직 왕권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이입니다. 또 그 대상이 시편 기자가 공격할 수 없는 배신자이지만 시편 기자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그가 욕심으로 쟁취하거나 원치 않는 세습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기업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61:5)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설령 지금 그 왕권이 배신자에 의해 빼앗긴 것 같지만 그 왕권은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는 압살롬의 수중에 있지만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왕권이 영원히 견고하게 될 것을 약속한 말씀을 시편 기자가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삼하 7: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흔히 사람들 사이에 주고 받는 차용증이나 유가 증권처럼 믿을 수 없는 약속이 아니라 천지는 변해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2) 영원한 왕권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스라엘의 왕권이 견고하기 위해서 왕인 자기에게 장수의 복을 주시고, 또한 그 왕권이 사울의 왕가처럼 한 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자손손에 이를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영원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시 61:6)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시 61:7)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이러한 기도는 어찌 보면 독재자의 장기집권 야욕처럼 생각될 수도 있으나 시편 기자가 영원하기를 소원한 왕권은 세속적인 왕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아의 왕권이 영원하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삼하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여기서 ‘네 몸에서 날 네 씨’라는 말([r'z, 제라)은 다윗의 몸에서 낳을 여러 아들이 아니라 단수로 타락한 인류의 영원한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오실 것이라는 구속의 약속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이와 같은 믿음은 그가 경영하는 모든 것이 만사형통할 때, 누가 보아도 가능성이 있어보일 때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짓눌려 있고 그가 배신자에게 쫓겨나 내일에 대한 보장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놓치 않고 있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시편 기자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정권에 대한 야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 61:8)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시편 기자의 그와 같은 믿음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시편 기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원수들이 완벽한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보였지만 인간의 도모가 아무리 치밀하다고 할지라도 다윗에게 왕권을 주신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 왕권이 메시아의 왕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이 아무리 궤계를 꾸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폐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죽이고자 치밀한 계획을 세운 아히도벨의 간계를 다윗의 충복 후새를 통해 무력화시키셨습니다.
(삼하 17: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이를 계기로 압살롬의 권세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고 다윗의 군대보다 월등히 우세하였던 압살롬의 군대를 패하게 하시고 압살롬은 요압 장군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고 다시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였습니다.
(삼하 18:14)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삼하 18:15)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이후로 다윗은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겠다는 약속을 실행에 옮겨 다수의 시편을 지어 하나님을 예배할 때마다 찬양하게 하였고, 다윗이 간구한 것처럼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까지 세세무궁토록 찬양되어지고 있습니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오늘 시편 기자 다윗이 마음이 억눌릴 때에도 마음이 약해졌을 때에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 때에도 끝까지 붙들었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세우신 영원한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렇게 신실한 믿음의 사람 시편 기자도 일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었다면 오늘 우리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누구나 한 평생 고난이 없기를 소망하지만 때로 시편 기자처럼 오늘의 고난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에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억눌릴 때가 얼마든지 있음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늘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좋은 사람들도 고난 중에 마음이 약해질 때가 얼마든지 있었음을 성경에서 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지금까지 출애굽과 광야 사십년의 여정을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 때는 여호수아의 마음도 약해질 때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거듭 말씀하신 것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 병거와 많은 군대를 준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도자 여호수아가 마음이 약해지지 말고 강하고 담대해야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수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우리의 영원한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하셨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 마지막 밤 사랑하는 세 제자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함께 기도하기를 명하셨으나 다 졸며 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만 홀로 기도하실 때 그 마음이 얼마나 눌렸든지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눅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그 때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을 돕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든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승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눅 22: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선교의 대가 사도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예수님 다음으로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때로는 두려워 떨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던 적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도리어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면서 마지막 순교의 제물이 되기까지 충성을 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바울 역시도 확신에 찬 고백을 하였습니다.
(롬 8:38)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죽음도 그렇게 할 수 없고, 생명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옥의 모든 세력을 다 합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멀리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에 대한 우리의 염려도 내일에 대한 우리의 공포도” (롬 8:39) “또는 하늘 높이 올라가거나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가거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마치 쇠와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용광로에서 바로 나온 쇠는 쉽게 구부러집니다. 그것을 가리켜 연철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쇠로는 칼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연철을 여러 번 뜨거운 불과 차가운 물에 여러 번 담금질을 하고 쇠망치로 두드려 주면 쉽게 부러지지 않는 강철이 됩니다. 스프링이 됩니다.
연철이나 강철이나 원재료는 똑같은 쇠지만 그것을 얼마나 담금질을 하고 두드리는가에 따라 강도가 달라집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연철처럼 세상에서 쉽게 동화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여러번 고난의 담금질과 망치질을 당한 사람은 마음이 눌릴 때 약해질 때 강철처럼 부러지지 않고 스프링처럼 튀어 오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시편 기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시편들이 다 그러했지만 시편 기자의 초기 현실은 낙심하고 포기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후반 부 결론은 늘 찬양과 하나님께 영광돌림으로 대단원을 장식하였습니다. 오늘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시 61:2)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 61:8)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그렇다면 절망에서 시작하였으나 영광으로 마무리를 하게 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끈을 놓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에게 담금질과 망치질을 하시는 까닭은 강철과 같은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믿음의 끈을 놓치 말고 마음이 약해질 때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편 기자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한 피난처, 견고한 망대, 안락한 장막, 안전한 날개 아래로 피하여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승리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에게 절망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도 능히 역전시키실 수 있는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 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고 믿음이 약해지는 것이고 기도가 약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약해질 때 우리도 오늘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의 기회로 삼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히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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