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대상 16:29-36

미션(cmc) 2015. 7. 12. 07:39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대상 16:29-36)    


(대상 16:2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대상 16:30)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대상 16:31)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모든 나라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 (대상 16:32)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이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대상 16:33) “그리 할 때에 숲 속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임이로다” (대상 16: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대상 16:35)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에서 건져내시고 모으사 우리로 주의 거룩한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광을 드높이게 하소서 할지어다” (대상 16:36)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오늘은 지나온 반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맥추감사절입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첫 번째 추수한 밀 수확이 끝날 때 비록 수확은 많지 않을 지라도 첫 소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출 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오늘 우리가 구약 시대 살지 않고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고 우리가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방황하던 광야보다 더 삭막한 곳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광야에서 먹은 만나와 메추라기보다 더 좋은 생명의 만나와 성령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처음 농사를 지어 첫 열매를 수확이 많지 않았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맥추절을 지켰던 것처럼, 우리의 전반기 동안 삶이 비록 풍요롭지 못했을지라도 맥추절 감사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불신자와 달리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값없이 구원을 얻었고 전반기도 동안 수많은 재난과 질병의 홍수 속에서도 우리의 육신과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지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마땅히 감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4)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5) 우리가 빈손으로 세상에 태어나 이 시간까지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비롯하여 영혼의 양식까지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님을 대접할 때 내 수준에 맞추지 않고 남에게 빌려서라도 손님의 수준과 취향에 걸맞게 대접을 함으로 손님이 흡족해 하는 것을 내가 볼 때 내 마음도 덩달아 기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맥추감사도 사람이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라면 과연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26절을 근거로 오늘 설교 제목을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라고 정한 것입니다.

 1. 다윗의 소원
  사람마다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는가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신앙을 저울질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던 다윗의 소원이 무엇이었을까요? 만일 오늘 우리가 다윗의 처지라면 내가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되어 사울 왕을 내 손으로 죽이는 것이 아닐까요?
 예 화
 우리나라의 이조 시대의 왕조실록이 사극으로 또는 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상당수의 왕들이 구중 궁궐에서 주지육립의 향락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에게 곤장형을 내렸습니다.
 그것도 그들의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에게 자신들의 모친을 치게 하였을 때 사정을 봐주자 화가 난 연산군은 몽둥이를 빼앗아서 1천 번 이상 매질을 하여 숨을 끊어놓고서도 계속 매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다윗왕은 왕이 되고 난 다음 무엇을 하였습니까?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옷을 찢고 슬퍼하며 금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복수에 혈안이 되어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대원군과는 너무나 대조적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삼하 1:11)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삼하 1:12)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그것도 모자라서 사울왕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위해 `사울과 그의 집안이 차지하였던 토지를 모두 돌려주고, 므비보셋은 언제나 다윗 왕의 식탁에서 식사하게 하였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살게 하였습니다‘(삼하 9 장).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소원은 솔로몬처럼 화려한 궁궐이나 천명의 후궁이 아니었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안치되어 있는 여호와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또한 다윗 왕의 마지막 소원은 그 법궤를 안치할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첫 번째 시도했다가 웃사가 죽는 불상사를 쓰라린 경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첫 번 째 시도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돌이켜 다시 도전을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무사히 옮겨 성막 가운데 모셔 놓고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1) 먼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2) 제사를 마친 후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축복하였습니다.
 3) 백성들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선물로 떡덩이와 야자열매와 과자와 건포도로 만든 과자를 골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만일 다윗의 소원이 눈에 보이는 법궤를 옮기는 것이었다면 이제 법궤를 무사히 옮겼으니 만족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진정한 소원은 가시적인 법궤를 옮겨 놓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진정으로 소원한 것은 법궤가 없는 불완전한 성막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의 성막 안에 안치함으로 비로소 하나님께 온전히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조건을 완비하였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을 찬양하기위한 성가대와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아삽을 대장으로 세워 그 일을 계속해서 하게 한 것은 다윗의 소원이 단순히 법궤를 옮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궁극적인 소원이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어렸을 때, 내가 너무 가난하였을 때, 나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그 소원이 이루어졌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
 하나님의 법궤를 성막에 무사히 옮긴 다윗 왕이 제사를 마치고 레위 사람과 아삽에게 명령한 것은 성막 앞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일만을 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는 일에 대해 명령을 받은 아삽이 무슨 내용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시편들이 오늘날까지 잘 전해오고 있습니다.
 (대하 29:30)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과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령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그들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예배하니라”
 여기서 ‘찬송하게, 찬송하고’라는 말(ll'h;, 할랄)은 단순히 노래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밝게 비추다 라는 뜻입니다. 찬송이 바로 우리의 어두운 영혼에 빛을 밝게 비취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레위인들은 다윗과 아삽이 지은 시편을 기쁜 마음으로 찬송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몸을 굽혀 예배하게 하였습니다.
 아삽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대변하는 선견자로서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것이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의 시라고 표제가 붙은 시는 시편 150편 가운데 50, 73, 75, 76, 77,79, 80, 81, 82, 83 편 모두 10편입니다.
(시 50:1) “[아삽의 시]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각 시편에는 어떤 역사적인 배경 가운데 이 시를 지었는지 표제에 명시되어 있는데 아삽의 시라는 표제를 눈 여겨 보지 않고서는 과연 어떤 시가 다윗의 시이고 어떤 시가 아삽의 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윗과 아삽이 모두 다 자기를 위한 노래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노래인가? 에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동일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다윗이 아삽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큰 줄거리와 방향을 정해서 다윗 자신도 아삽도 동일하게 노래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  감사하는 찬양을 지어 부르게 한 것입니다.
(대상 16:7)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를 세워 먼저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 감사하는 찬송을 성가대원들만 거룩한 성전 안에서만 부르도록 제한을 두지 않고 만민에게 알려서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는  노래를 만인이 부르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대상 16:8)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대상 16:9)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
 여기서 ‘노래’를 부르는 목적이 여호와께 감사 찬양하는 노래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하는 노래를 레위인만이 아니라 전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과 권능을 돌리는 찬양을 감사라는 그릇에 담아 드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대상 16:28) “여러 나라의 종족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예배는 천천만만의 양과 소가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바로 오늘 성경 본문 대상 16:29 에는 그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기에 합당한 제사와 합당한 찬양 합당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상 16:2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여기서 ‘합당한’이라는 말(d/bK, 카보드)은 ‘풍부, 다수, 부, 명예, 영광, 존경’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의 중요성과 가치와 의의를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사 40: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세상에 많은 노래가 있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어울리는 노래,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노래는 그 부르는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오케스트라가 얼마나 장엄한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노래들은 인간들을 슬픔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는 오로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으로 지어진 노래, 불리워지는 노래, 들려지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나, 그 노래를 듣는 사람 모두의 마음은 다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높이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저 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라면 설령 그것이 사람들의 취향에 맞고, 맞지 않고 하는 것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그 찬양을 듣는 회중이 다함께 드리는 예배라면 그 예배가 바로 아벨의 제사처럼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여기서 ‘찬송 중에 계시는’이라는 말(bv'y:, 야샤브)은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 라는 뜻의 분사형으로 지금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과 지상 교회의 성도들과 천상 교회의 성도들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해주는 성경 말씀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이 친히 보여주신 영원한 나라를 보고 기록한 ‘하나님 나라 탐방기’입니다.
 (계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가장 주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나오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그렇게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합당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대상 16:2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3. 하나님께 합당한 맥추감사절
 오늘은 특별히 2015년 전반기 동안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온 세계에 베풀어 주신 일반은총과 특별 은총을 기억하며 특별히 감사하는 맥추 감사예배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더더욱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든 순서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2015년 전반기 동안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온 세계에 베풀어 주신 일반은총과 특별 은총을 기억하며 특별히 감사하는 맥추 감사예배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더더욱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든 순서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주일마다 예물을 드리지만 오늘 우리가 특별히 구별하여 드리는 맥추 감사헌금은 마치 구약 시대 첫 열매처럼 전반기 동안 불경기가 연속되는 가운데 풍성한 소득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빈약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맥추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맥추절 다음에 풍성한 소득을 거둘 수 있는 수장절을 준비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준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기뻐하시고 그와 같은 감사로 드리는 에배가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대상 16:2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금년 상반기는 세월호에 이어 메르스 사태로 더욱 심화된 불경기로 인해 맥추 감사헌금을 드린다고 하는 자체가 솔직히 마음에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화
 돈 많은 부자가 사주는 비싼 음식은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아주 가난한 성도가 정성을 다해 대접할 때 마음이 짠하면서 깊은 여운이 남을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눈을 감고 지난 반년 동안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족과 교회와 민족과 국가와 세계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손가락을 꼽아 가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몇 가지가 될까요? 한번 실천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 무엇보다 가장 큰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이라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은 손가락 하나로 헤아릴 수 있는 사소한 은혜가 아니라 특별한 은혜입니다.
  2) 국내외적으로 어디를 가든지 재난과 사고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족과 교우들과 민족과 국가를 지켜 주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3) 지난 상반기에 한번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설령 병원에 다닌다고 할지라도 매일 장례식장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이처럼 건강하게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4) 설령 건강치 못해서 골골대며 자주 병원을 드나들어도 차도가 없어 불편한 마음과 육체적인 고통을 겪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이 언젠가는 반드시 한 번이상은 겪어야만 하는 필수과정을 나도 겪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에게 하늘나라와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주시고 교회를 통해서 이처럼 나를 위로하심을 생각할 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주신 것이 내게 주실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물류창고는 그 크기가 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록한 성경을 읽고, 들을 때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좋은 것을 주시려고 예비해 놓으셨음을 믿는 미래적인 감사도 빼어 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여기서나 거기서나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가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나의 마음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마치 환자가 의사에게 환부를 다 드러내 보이듯이 주님께 나의 미워하는 마음, 용서가 되지 않는 마음, 감사가 일어나지 않는 마음을 주님께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이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나를 치료해주시기 위해 내 마음에 주인이 되시도록 내 마음에 주님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의 주인이요 또한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내주하심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세 이래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과 구원하심을 받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하는 기도, 감사하는 찬양, 감사는 예물, 감사하는 예배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있든지 없든지 높은 창공에는 반드시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설령 밤이 왔다고 태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등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장사가 잘될 때나, 매사가 안 된다고 불평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우리의 믿음이 한결같이 변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감사해야 할 일과 불평해야 할 일이 함께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둘 중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예화  가을 밤나무 아래서 가시 껍질이 아니라 토실토실한 밤알을 주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하여야한다는 말씀을 거부하거나 불신하거나 토를 달지 말고 그렇게 순종하겠습니다고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합당한 믿음이며 기뻐하시는 믿음입니다.
(대상 16:35)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에서 건져내시고 모으사 우리로 주의 거룩한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광을 드높이게 하소서 할지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가장 합당한 모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흠없는 제물을 드리는 것처럼 감사는 합당한 예배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오늘 성경 (대상 16: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는 명령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대상 16:36)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