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에 대한 고발장
(시 58:1-11)
(시 58:1)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시 58:2)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시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시 58:4)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시 58:5)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시 58:6)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시 58:7)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시 58:8)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시 58:9)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 (시 58:10)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시 58:11)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불의한 자들이 판을 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떤 사람들은 똑같은 방법으로 보복을 한다고 하지만 더 무자비한 방법으로 원수를 갚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법에 호소를 하고 판단을 기다리지만 만족할만한 판결이나 징벌이 가해지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불의한 자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오늘 성경 말씀은 국가의 통치자들이 불의와 결탁하고 불의한 세력에 대해 침묵하는 동안 의롭게 살아보려는 약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만 어디 가서 풀길이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법치주의 시대에도 악인이 활개를 치고 있다면 지금으로부터 삼천여년 전 시편 기자가 살던 시대는 악한 자들과 억울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한 세상에서 정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시편 기자는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갔는지 오늘 성경을 통해서 불의가 만연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적인 자세인지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1. 불의한 통치자
오늘 성경은 시편 기자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나 도망다닐 때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기도 중에 하나라고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시 58:1)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여기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통치자’라는 말은 원어 성경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들이라는 말이 번역 성경에 삽입이 된 것은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이라는 말씀에 인자들이 바로 당시 압살롬의 배후에서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통령 측근한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 전문가를 참모로 두고 있는 것처럼 압살롬 측근에도 압살롬을 돕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 압살롬이 자식의 도리를 망각하고 배은망덕한 일을 하고, 심지어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는 패륜을 범하는 것을 측근에서 보면서도 그 잘못을 지적하기는 고사하고 다 침묵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 58:1)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그 이유는 패역무도한 압살롬이 통치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압살롬의 주변 사람도 역시 그와 유사한 사람들만 모였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는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보편적인 진리처럼 생각되고 있습니다.
똑같은 나라이지만 어떤 지도자가 통치하는가에 따라 그 나라의 경제와 안녕과 질서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을 우리가 이미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패륜아 압살롬이 통치하는 이스라엘 형편이 어떨 것이라고 짐작이 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도자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가? 여하에 따라 측근의 사람도 지도자의 성향에 맞는 사람을 뽑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통치하는 나라는 정의롭지 못하게 때문에 불공평하게 되고 폭력이 난무하고 백성들이 불의와 부조리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도자의 리더십이 마치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강물처럼 백성들에게까지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가 통치자들의 불의에 대해서만 탄식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여파가 사회 전반에 메르스처럼 파급되는 것에 대해서 탄식을 하였습니다.
(시 58:2)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여기서 ‘중심에 악을 행하며’라는 말은 사람들의 죄악이 우발적인 충동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꾸며진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악을 도모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또한 ‘폭력’이라는 말(sm;j;, 하마스)은 '해를 끼치다, 포악하게 다루다, 불법, 부당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편 기자의 당시 사회는 폭력이 좌우하는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왜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는 것일까요? 그 원인이 제도적인 문제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모두가 다 인간이 원인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선하게 태어나는가? 아니면 악하게 태어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인 답변은 서로 엇갈립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서 악에 물들 뿐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정 반대로 악하게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의 판단 기준인 성경은 인간이 선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2. 불의한 세상
오늘 시편 기자도 동일하게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대해서 탄식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어린아이를 낳아 길러본 부모는 이 성경 말씀이 허구가 아니라 사실임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부모가 가르쳐 준 적이 없는 거짓말을 하고 형제지간에 욕심과 시기와 분노와 폭력성이 어린아이 때부터 가지고 있음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는 것처럼 이와 같은 죄악도 자라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와 국가를 어지럽히는 사회악의 근원이 되는데 점점 악독해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악한 자들의 음모가 마치 치명적인 독사의 독과 같다고 비유하였습니다.
(시 58:4)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여기서 ‘독’은 악한 자들이 시편 기자를 죽이려는 ‘온갖 중상모략과 거짓말과 악독한 말’을 비유한 것입니다.
마치 독사의 독이 몸에 스며들어 사지와 심장을 마비시켜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악한 자들이 시편 기자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묘한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거짓 증인을 세워 시편 기자를 악한 사람으로 매도하여 민심을 시편 기자에게서 돌리게 하고 마치 시편 기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마치 정의인 것처럼 사건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당시 중동 지방에 피리를 불어 코브라를 춤추게 하는 마술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악한 사람들은 마치 귀머거리 독사처럼 누구의 조언이나 충고나 바른 말에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 58:5)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치료약이 없는 병인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죄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고 뿌리 깊은 나무처럼 죄악이 영혼 깊숙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 고통 받는 시편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회제도나 규범이나 악인을 징계하는 통치자들이 있었지만 침묵한 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가 억울하게 악인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든지 정당방위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도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도 다윗을 호위하며 따른 군대가 육백여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이스라엘 모든 군대를 진두지휘하는 왕이 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었습니다.
(삼상 27:2)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이 없기 때문이지 힘이 있으면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3. 하나님에 대한 탄원
시편 기자가 보복하지 않은 것은 마치 날카로운 독이빨을 벌리고 물려고 달려드는 독사같은 원수들을 이길 자신이 없거나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지만 전혀 미운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천사와 같은 착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가 원수를 갚지 않는 대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원수를 보복하여 주시기를 탄원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1) 악인들에게 치명타를 날려 재기 하지 못하게 하시고,
(시 58:6)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2) 악인들의 세력이 강한 것 같지만 점차 소멸되게 하시고,
(시 58:8)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3) 악인들의 세력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사막의 바람처럼 쓸어가 버려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시 58:9)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
그 결과 의인들에게 악인이 보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승리의 날이 오기를 하나님께 탄원하였습니다.
(시 58:10)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이 같은 말씀을 곰곰이 살펴보면 시편 기자의 보복 심리가 대단하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아무리 정의라는 이름으로 보복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악이 제거되고 종식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중국의 무협영화처럼 또 다른 보복을 낳는 시작이 되기 때문에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연속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지극히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원수의 범죄에 대해서 고발을 하게 된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세상에 악이 활개를 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는 한결 같으심을 증거하기 위한 고발이었습니다.
(시 58:11)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오늘 시편 기자가 생각하고 있던 하나님의 공의는 악에 대한 철저한 보복을 통해서 하나님은 결코 악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보복 살인이라는 것이 마치 정의로운 일인 것처럼 사람들이 관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도 한 동안 원수에 대한 보복이 마치 하나님의 정의인 줄로 오해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자비한 보복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슬람과 기독교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지금도 여전히 종교라는 이름으로 가장 무자비한 테러와 폭력과 전쟁이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자비한 보복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부패한 인간 세계에서 보복은 끝없는 보복이 반복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세상은 진정한 평화와 행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완벽한 치료는 재발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원수에 대한 완전한 승리는 보복이 없는 승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원수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무엇일까요?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원수를 보복해달라고 고소장을 올린 다윗을 따르는 종교인들이 아닙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셔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닮으려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오늘 십자가 높이 세운 한국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보복을 청원하는 고소장이 수북하게 쌓여가고 부끄러운 치부들이 공공연하게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다윗과 같은 보복심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오늘 나의 실상이 아닌지요?
하나님의 정의 또는 교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파벌을 만들고 서로 대적하고 불신하고 상대방을 침몰시키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들여 법정공방을 하고 기독교인들끼리 코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한국 교회가 아닌가요?
예화
미국이라는 나라는 청교도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범한 두 가지 큰 죄악은 조상 대대로 미국 땅에 살아왔던 원주민들인 인디안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일과 미 대륙을 개발하기 위한 인력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인격을 가진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차별을 하고 마치 가축처럼 노예로 오랫동안 부린 일입니다. 만약에 그와 같은 흑인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미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노예 해방후부터 지금까지 흑인들이 하던 그 일들을 미국으로 이민을 간 유색 인종들이 그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미국은 백인들만의 힘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안에는 백인우월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유색인들을 차별하는 인종차별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백인 우월주의라는 그릇된 편견에 사로잡힌 딜런 로프라는 21살 먹은 젊은 청년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에 있는 임마누엘에 감리교회 안에 들어가서 수요 성경공부를 하는 흑인들에게 총기를 난사하여 죄없는 신자 9명을 숨지게 하였습니다.
그것도 살해 의도를 가지고 마치 새 신자처럼 교회안에 들어가서 성경 공부 팀에 함께 어울려 한 시간 쯤 보내는 동안 교인들이 너무나 친절해서 한순간 흑인들을 살해하는 것을 포기를 할까? 라는 마음을 먹을 뻔 했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총기로 난사를 하여 성경공부를 하고 있던 목사와 교인들을 9명이나 죽게 한 것입니다.
범인 딜런 로프는 그렇게 끔찍한 죄를 범하고도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인 우월주의에 쇠뇌를 당하여 미국 땅에서 흑인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서야만 한다는 빗나간 애국심으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범죄가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진짜 놀라운 일은 총기 살해범 딜런 루프의 보석을 결정하기 위해 재판을 하기 위해 범인을 격리하여 놓고 영상으로 유가족들과 대화를 하게 했을 때 유족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딜런 루프가 인종전쟁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시인을 했을 때 유가족들은 그의 잘못된 편견이 그와 같은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을 유족들이 알고서는 범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이해한다, 당신을 용서한다. 당신은 내게서 가장 소중한 한 사람을 빼앗았고 난 더 이상 그 어머니와 대화할 수 없지만 당신을 용서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미라 톰슨이라는 사망자의 가족인 앤소니 톰슨은 범인에게 ‘나와 우리 가족은 당신을 용서한다. 그러나 이번 일을 회개의 기회로 삼아서 죄를 고백하고 당신의 삶을 가장 귀한 분인 예수님께 드려라 그렇게 해서 더 나은 삶을 살라. 과거가 어떠했든 그가 당신을 변화시키실 것이다’라고 당부를 하는 장면이 뉴스를 통해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을 완전히 승리할 수 있는 고발장인 것입니다.
그 같은 소식을 들은 오바마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서 ‘희생자 가족들이 사건을 대하는 자세에서 미국인의 선량함이 드러났다. 끔찍한 비극의 한 가운데에서도 품위와 선량함이 빛난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교회 앞에는 흑인과 백인 수천 명이 함께 모여 밝고 흰 장비를 희생자의 영전에 바치며 애도하는 모습에 찰스턴 사장은 ‘증오로 가득찬 사람이 잘못된 생각을 품고 왔으나 이 공동체는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히 뭉쳐서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비록 피부색은 검은지 몰라도 그들의 마음은 백옥같았습니다. 인종차별주의라는 그릇된 편견에 사로 잡힌 백인 청년은 비록 얼굴은 하얀지 몰라도 그의 마음은 그릇된 증오심과 인종차별이라는 검은색으로 도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남북분단의 이념 대결과 정치적인 여와 야, 보수와 진보로 같은 민족끼리 보복의 악순환이 종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원수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교회 사수라는 명분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가 갈가리 찢겨지고 있습니다. 목회자끼리 교인들끼리 원수가 되어 증오심에 가득차서 폭력도 불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 교회는 좌초된 배처럼 점차 침몰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은 어찌하든지 오늘 나부터 ‘보복이냐? 용서냐?’ 라는 갈림길에서,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닮고 실천한 임마누엘 감리교회 유족들과 같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화목을 이루신 것처럼 어떤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교회는 교인들은 화목해야 합니다.
(롬 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여기서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dunatov", 뒤나토스)은 ‘능력있는, 막강한 힘’이라는 뜻입니다. 그렀습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화목하려면 원수를 보복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회개시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게 하시든지 아니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게 하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실 것입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우리는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하나님께 원수를 멸해달라는 고소장 대신에 원수를 회개시켜 달라고 용서해달라는 고소장을 올려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진정한 힘이요, 성숙한 신앙이요, 그렇게도 소원하는 평화의 지름길입니다. 원수에게 악으로 보복하려고 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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