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나의 든든한 요새/시 59:9-17

미션(cmc) 2015. 7. 4. 10:38

나의 든든한 요새
(시 59:9-17)


(시 59:9)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시 59:10)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시 59:11) “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 (시 59:12)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시 59:13)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셀라)” (시 59:14) “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시 59:15)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시 59: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 59: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지난 5 월이 가정의 달이었다면, 6월은 호국의 달로 오늘이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25일은 1950년 6월 25일 사변 6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전쟁이었는가? 하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 화
 지난 14일 강원도 설악산 저항령 고지에서는 돌밭에 나뒹구는 녹슨 철모와 헤진 전투화, 왼쪽 상박골(위팔뼈) 하나가 발견됐다. 돌밭으로 이뤄진 곳이다 보니 땅속에 묻혀 있는 유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엄청한 포격으로 시신이 산산히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지역 중 가장 높고 험준한 곳이다.
 저항령은 해발 1천708m의 대청봉과 1천600m의 황철봉 사이에 있는 곳으로, 1951년 5월7일부터 17일까지 국군 수도사단과 11사단이 북한군 6사단 및 12사단에 맞서 혈전을 벌였던 고지입니다.
 맨몸으로 등산을 하기도 어려운데 그 높은 곳에서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전투를 벌린 것입니다.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양양과 간성을 탈환하고 향로봉 지역의 북한군까지 격퇴해 설악산 일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전투에서 아군이 빼앗겼다면 지금 설악산은 금강산처럼 우리가 갈 수 없는 산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먼저 고지를 점령하는가에 따라 그 고지와 연결된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기 때문에 고지전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은 나의 요새’라고 한 ‘요새’가 바로 요즘으로 말하면 선점한 고지와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 59: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여기서 ‘요새’라는 말(bG;c]m, 미스가브)은 ‘안전한 높은 곳. 산성, 피난처’라는 뜻이고, ‘피난처’라는 말(s/nm, 마노스)도 ‘도피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 ‘요새, 피난처’는 지금 나에게는 필요가 없을까요? 꼭 전쟁시에만 필요한 것일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시편 기자와 같은 요새와 피난처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임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생사의 위기 상황
 우리는 모두 다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사람마다 세상에 대한 평가는 다를 것입니다.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원하는 소원은 다 똑같이 살기 좋은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1)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하고,  2) 어떤 사람은 불안한 세상이라고 하고, 3)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해서 사는 세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제 각각 다른 세상이 아니라 똑같은 세상에 살지만,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가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기자는 어떤 세상을 살았을까요?
 시편 기자는 결코 살기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세상이었습니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습니다. 또한 지금 당장도 시편 기자를 죽이려는 자객이 집 주변에 잠복해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시 59:1)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우리 중에 아무리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시편 기자만큼 어려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1) 원수들이 시편 기자를 치려하였습니다.
(시 59:1)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여기서 ‘원수’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뜻하는 복수입니다.

 2) 그 원수들은 무자비한 자들이었습니다.
 (시 59:3)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여기서 ‘강한 자들’이라는 말(z[', 아즈)은 ‘강력한, 흉포한, 사나운’이라는 뜻으로 힘만 강한 자가 아니라 은밀하게 숨어서 기다리다가 기회가 오면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는 저격수를 뜻하는 것입니다.
 
 3) 그 원수들은 들개 떼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시 59:6) “그들이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당시 들개들은 하이에나처럼 시체의 썩은 고기를 뜯어먹거나 오물더미 속을 헤집고 다니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지금 시편 기자를 죽이려는 원수들이 마치 굶주린 떼처럼 시편 기자의 주변을 두루 돌아다니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주석가 '델리취'(Delitzsch)는 이를 가리켜 '다윗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성을 파수한 것'으로 해석하였는데 설득력있는 해석입니다.

 4) 그 원수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악이고, 그 입술은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시 59:7) “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시편 기자를 괴롭히는 원수들은 입만 열면 시편 기자를 죽이기 위해 모함하는 악한 말을 토해냈습니다.
 시편 기자가 무슨 잘못이나 죄를 범하거나 상대방에게 무슨 손해를 끼쳤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 59:3)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이 얄팍한 인간은 인기가 있고 강한 자에게는 서로 도와주겠다고 아첨하지만 힘이 없고 약해지면 쉽사리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기 잘하는 것이 인간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약할 때 우리를 괴롭히는 자의 악을 계산하셨다가 행한대로 심판하시며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자가 억울한 고통을 겪을 때 다가와 주시고 만나주실 뿐 아니라 앞서서 전화위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진정한 믿음
 시편 기자가 원수들의 위협 속에서 불안을 너머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을 때 누구도 시편 기자를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위기 중에 처했으나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고, 아무리 신세 한탄을 한다고 해서 저절로 위기가 극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만 한 채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피를 말리는 고통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럴 때 어떻게 했을까요?
(시 59:9)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여기서 ‘바라나이다’라는 말(rm'v, 샤마르))은 ‘지키다, 주의하다’라는 뜻으로 도움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좌절하고 포기하기 쉬운 고통 중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주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위기 중에서도 주님을 잊지 않고  주님을 바라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1)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악한 자를 벌하시는 분이시며
(시 59:5)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
 여기서 ‘벌하소서’라는 말(dq'P;, 파카드)은 천벌을 내리시라는 뜻이 아니고 ‘계산하다, 방문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입니다.
 이는 미래의 심판을 위한 자료 수집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악인에게 현재 형벌이 내리지 않는다고 안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 악한 자들과 악한 나라를 비웃으시는 하나님이시며,
(시 59:8)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 현재 악인이나 악한 나라를 벌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악인들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의인을 대적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마지막에 받을 형벌을 준비하시며 비웃고 조롱하신다는 것입니다.
(시 2: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 2: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3) 반대로 고난 받는 시편 기자는 변함없이 영접해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시 59:10)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여기서 ‘영접하시며’라는 말(!d';q;, 카담)은 ‘만나다, 앞서가다, 정면으로 오다’라는 뜻의 미완료형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시편 기자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다가와 주시고, 만나주시고, 지금도 여전히 앞서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한 지성인, 학자, 종교인, 정치가, 왕들, 사상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들의 영향력으로 기독교 국가이었던 한 나라가 통째로 공산국가가 되고 사회주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가 폐쇄를 당하고 수많은 성직자들이 순교를 당하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못 보시고 잠잠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식사 때가 가까이 오면 어머니는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불을 피우는 것처럼 그 사람, 그 나라, 그 사상을 심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3. 노래하고 찬송하리라
 시편 기자는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원수들로 집을 지키게 하고 마치 저격수처럼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건져주세요. 나를 구원해 주세요’라는 절박한 기도로 시작하였었습니다.
(시 59:1)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시 59:2) “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물론 그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원수들을 멸하시거나 시편 기자를 위험에서 건져 내신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의 절박한 기도가 어느 사이에 찬송으로 뒤바뀌었습니다.
(시 59: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시 59: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바로 이것이 시편 기자와 오늘 우리와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우리가 만일 시편 기자와 같은 위기를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들도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어떤 대안을 준비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예비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현실에 기대했던 변화가 일어나지 않게 되면 낙심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셨다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는 그런 우리와 무엇이 다를까요? 그것은 시편 기자가 기대한 것은 하나님이 마련해 주시는 피난처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피난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현실은 마치 죽음이 임박해 오는 사지처럼 생각되었고, 그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또 다른 피난처로 도피하는 것만이 사는 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 어디에도 죄와 질병과 죽음이 없는 완전한 요새나 피난처는 없습니다. 인간이 사는 곳은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완벽한 요새나 피난처는 그 어디에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비록 시편 기자가 현재 위기에 처했으며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시편 기자를 위기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군의 하나님이 시편 기자와 함께 하셔서 요새와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만 하면 시편 기자가 서 있는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요 요새가 됨을 믿었습니다.
 비로소 시편 기자의 입에서는 한숨이나 절망의 탄식대신에 시편기자의 편이 되어주시고 시편 기자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주께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시 59: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 59: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그 결과 시편 기자를 죽이려고 삼천 명의 군대를 풀고 시편 기자를 죄인으로 몰아 집을 겹겹이 포위했던 사울 왕을 하나님이 버리셨을 때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설령 높은 산위에 세워진 든든한 요새가 아니라, 때로 은신해 있는 동굴이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라 주님이 요새요 피난처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새가 되시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 어떤 환난 중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이 세상에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시는 주께 피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 때입니다. 이 나라와 이 민족과 교회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요새로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르스의 폭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는 지금 예전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 하나는 사람들이 집밖에를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집이 가장 안전한 피난처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는 그 집이 원수의 표적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불안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 시편 기자가 깨달은 것 한 가지는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안전한 피난처가 세상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현실이 불안할지라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서 있는 그 자리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와 안전한 피난처라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밤 같은 고난의 날들이 성도에게 슬픔과 두려움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이 마치 바울과 실라의 처지와 같을지라도 이제 우리도 오늘 시편 기자처럼 주 만이 나의 요새요, 피난처가 되심을 믿고 우리도 바울처럼 찬송합시다. 기도합시다. 감사합시다. 기뻐합시다.
 지금 우리 민족을 고통스럽게 하는 감옥 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 시대의 불행을 보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오늘 우리들의 요새요 피난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 화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쇠사슬에 묶여 빌립보 감옥에갇혔으나 한 밤중에 주를 찬송하였을 때 하나님은 감옥 문을 열어주셨고 간수의 가정을 열어주셨고 빌립보를 열어 주셨습니다.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바울이 간수에게 전한 이 말씀은 지금도 온 세상을 여는 전도의 열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빌립보에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빌립보서의 말씀은 지금도 어 걱정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제거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나라 이 백성이 인권이라는 말을 빙자한 사이비 정치인들이 오로지 기득권과 대권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인권이라는 말을 빙자하면서부터 공권력이 무력화되고 하나님이 제정하신 창조질서와 가정질서를 붕괴시키는 부도덕한 동성애를 합법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흔히 종교 편향이라는 이름으로 복음 전도의 길을 막고 교회 부흥을 차단하려는 사악한 세력들로부터 이 나라와 교회를 지켜 나가는 일이 최대의 과제입니다.
 타락한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기고 패배하게 된 원인이 군사적인 열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부도덕하고 불신앙적인 이스라엘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삼상 4:21) “그녀는 죽어 가면서도 빼앗긴 법궤와 죽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으니 남을 것이 무엇이냐?'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갓난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는 뜻이다.”
 이 나라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요새로 삼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잘못된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기만 하면 하나님이 이 나라 이 백성을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때로는 대한민국이 싫다고 떠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떠나고 싶지만 조건이 맞지 않아서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남북이 대치 상황에서 전쟁이 나도 벌써 수십 번 전쟁이 났어야 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이 나라의 경제가 발전해왔고 이슬람의 테러나 미국과 같은 총기사고가 없는 안전한 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비록 메르스의 태풍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지만 태풍은 잘만 견디면 썩은 물이 뒤집어 지고 그 때문에 연안에 물이 정화되고 물고기들이 다시 몰려드는 것처럼, 메르스의 태풍 때문에 의료 체계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개선되어짐을 더 큰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계기가 됨으로 더욱 안전한 나라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