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며 선교하는 교회
(행 2:43-47, 13:1-3)
(행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번성하라고 하신 명령은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져가고 있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명령은 교회를 통해서 지금도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다가 심판을 받은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그 탑이 얼마나 높았든지 하나님이 친히 내려 오셔서 그들이 쌓은 성과 탑을 보시고 놀라실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탑이 너무 거대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탑을 쌓는 의도가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창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교만과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그 탑을 쌓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사람들이 시날 평지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그 탑이 보이는 곳까지만 가서 더 이상 흩어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그같은 행위는 바로 하나님께서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시는 문화 명령에 역행하는 죄인 것입니다.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기서 인간들이 의도한 ‘이름을 내는 일과 흩어짐을 면하자’는 말(hc;[,, $WP)은 모두가 미완료 동사로 지속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고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것을 막지 않으면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대형버스가 사람을 가득 실고 급경사를 내려가는 상황처럼 누군가가 그것을 깨우쳐 주지 않고 막지 않으면 결국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창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 11: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여기서 ‘언어를 혼잡하게’ 라는 말(ll'B, 발랄)과 ‘그쳤더라’라는 말(ld'j, 하달)은 역시 와우 계속법 미완료 형으로 하나님이 계속해서 막으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성과 탑 쌓기를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본래 언어가 하나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수많은 종류의 언어로 변했기 때문에 마치 사투리가 같은 사람들끼리 흩어질 수밖에 없게 되어 결국 오늘날과 같은 다인종 다문화의 세계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바벨탑 사건이 ‘성장하며 선교하는 교회’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1. 성장하는 교회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공생애 기간에 올인 하신 일은 크게 세 가지 1) 가르치고 2) 전파하고 3) 치유하신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께서 삼년 동안 그렇게 하셨다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천국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건강을 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명령하셨습니다. 더구나 주님은 지상에 선교의 교두보가 될 만한 단 한 개의 교회조차도 세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교회를 세울 땅을 사라고 명령하시거나 건축 자재를 준비하라고 하시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며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perimevnw, 페리메노) )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기다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기도를 뜻합니다.
그 결과 오순절에 기도하던 성도들이 모두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께서 시키시는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방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물론 이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같은 말을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바벨탑과 흡사하게 거기 모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하였습니다.
구약 성경 곳곳에 마지막 새로운 때를 예언하고 있는데 그 새로운 때는 이전 시대의 때와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렘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짐승의 제사가 더 이상 소용이 없는 새로운 시대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또 새로운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때가 바로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마지막 때 곧 성령이 만민에게 물 붓듯이 임하시는 때 곧 오순절의 성령의 임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행 2: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행 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그 결과 바벨탑 사건처럼 사람들이 분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방언을 서로 자기 말로 알아듣는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행 2: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가 분열된 이래 성령께서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다 하나의 언어처럼 알아듣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복음 안에서 언어가 각기 다른 만민이 하나 되는 선교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이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셨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하심으로 이전에 성전 중심이 교회 중심으로, 제사 중심이 예배 중심으로, 율법 중심이 복음 중심으로, 유대인 중심이 만민 중심으로 발전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1)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날, 믿은 사람의 수는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2)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서로 교제하고,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3) 사도들을 통해 많은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4)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살아갔습니다.
5) 그들은 재산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6)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 뜰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함께 모여 기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7)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늘어나게 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는 그 같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과 성장을 거듭하는 중에 이웃과 주변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침으로 좋은 소문과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계속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할 여지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더하게 하시니라’는 말(prostivqhmi 프로스티데미)은 미완료 능동태로 지속적인 부흥과 성장의 가능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을 부으셔서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 성장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이미 앞서 살펴 본 베드로의 설교에 명확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부흥과 성장을 거듭하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만을 위한 복음의 종착역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로 말미암아 땅 끝까지 복음이 확산되어나가는 복음의 시발역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성장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확산시켜 나아가는 시발역이 될 때만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바로 이 점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흩어지기를 거부한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과 성장을 거듭하는 가운데 이방 선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으로 문을 굳게 닫아걸고 이방 선교에 무관심한 예루살렘 교회에 큰 환란과 핍박이 몰아닥치게 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순교를 당하고 핍박자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접수하여 마침내 문을 닫게 하시고 남아 있던 신실한 신자들을 억지라도 온 세상으로 흩어지도록 강섭리하셨습니다.
(행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서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는 말(diaspeivrw 디아스페이로) 은 수동태로 자의가 아니라 타의 곧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흩어지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마치 곡식을 땅에 뿌릴 때 흩어 뿌리는 것처럼 수 천명이 모여 예배하던 예루살렘 교회가 종교 박해로 말미암아 더 이상 문을 열수 없게 된 상태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마치 흩어지지 않으려고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것과 너무나 닮은 꼴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성장은 그 교회가 얼마나 양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는가 하는 수학적인 데이터로 평가되는 산술적인 성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해서 얼마나 널리 널리 전도하고 선교하는 교회인가? 여부로 판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교회 건물이 크고 아름다워도, 아무리 많은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교회 시설과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 교회가 얼마나 많은 지역과 얼마나 많은 나라에 복음을 확산시켜 나가는가에 따라 그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인가? 하는 것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2. 선교하는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능동적으로 복음을 온 세상에 흩어 뿌리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사울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수 많은 성도들이 동서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어찌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나그네 신세가 되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후회하거나, 포기하거나, 은둔하여 조용히 혼자만 믿은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이곳저곳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무하였습니다.
(행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여기서 ‘흩어진 사람들’은 핍박을 피하여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뜻하며, ‘두루 다니며’라는 말(dievrcomai, 디엘코마이)은 ‘사방으로 가다, 통과하다, 퍼지다’라는 뜻으로 특정 장소에 안주하지 않고 여러 지역을 계속해서 통과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는 뜻입니다.
1) 사마리아 교회
한 예를 든다면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전하여 온 성을 발칵 뒤집어 놓은 집사 빌립의 선교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여기서 ‘전할새’라는 말(eujaggelivzw 유앙겔리조)은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는 뜻의 현재 진행형인 동분사로 그 흩어진 사람들이 오히려 자발적으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 전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농사철에 먼저 논과 밭을 갈아엎은 후에 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하는 것처럼 흩어진 평신도들이 복음의 불모지를 전도로 갈아엎었을 때 뒤를 이어 집사 빌립이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매우 전략적인 선교가 초창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행 8: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여기서 ‘전파하니’라는 말(khruvssw(2784, 케륏소)은 앞서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는 말고 의미가 좀 다른데 ‘크게 소리 질러 선포하다, 알리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선포하실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막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내적인 부흥과 성장에만 급급하다가 제동이 걸려 핍박으로 인해 복음 전도가 위축된 것이 아니라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평신도 전도자들이 여러 지역을 통과하면서 전도하는 중에 마침내 복음이 안디옥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입니다.
(행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여기서 ‘말씀을 전하는데’라는 말(lalevw, 랄레오)은 ‘동분사 현재 능동’으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의 말씀을 전함을 뜻합니다.
교회가 하나가 세워져서 부흥하고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의 땀과 눈물의 기도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흩어진 평신도들에 의해 복음이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마침내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분명히 이 일은 사람들이 한 일이기 보다는 예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e[somai, 에소마이)’고 약속하시고 명령하신 말씀처럼 성령과 믿음의 사람들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처럼 예배와 성경 공부에만 치중하고 복지에만 연연하는 평범한 교회가 아니라 외형적으로는 예루살렘 교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교회이지만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이 보실 때는 예루살렘 교회를 뛰어넘는 이상적인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1) 말씀을 잘 가르치고 배우는 말씀 중심의 교회
여기서 선지자와 교사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실력있는 지도자들입니다. 사람들이다. 안디옥 교회에 그와 같은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성도들이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였음을 뜻한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성령과 깊은 영적 교제가 있는 기도 중심의 교회
안디옥 교회의 기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보다 영적으로 더 깊은 기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그처럼 깊은 기도를 하게 된 이유는 자기들의 소원을 구하는 일반적인 기도가 아니라 기도가 ‘주를 섬기기 위한 도구’ 가 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 한 것입니다.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성령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선교 중심의 교회
안디옥 교회는 성령이 교회에 선교를 명령하였을 때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였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지명한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가 꼭 필요로 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그들을 요구하셨을 때 안디옥 교회는 기꺼이 순종하고 두 사람을 안수한 후 선교사로 파송하는 선교적인 교회였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서로 교제하며 교회를 양적으로 질적으로 부흥 성장시키는 것이 교회의 존재이유나 목적이 아니라 선교를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선교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3.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선교를 위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안디옥 교회는 지상 교회 중에 최초로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후원하는 멋진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지시함에 순종하여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였을 때 복음이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에까지 전파되어지는 시발역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과 더불어 우리 수원제일교회가 존재하게 된 시발점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로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성장의 모델이 예루살렘 교회라면, 우리가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선교의 모델은 안디옥 교회인 것입니다.본래 우리 한국 땅은 조상대대로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처럼 우상과 온갖 반 성경적인 죄악들이 만연했던 영적인 불모지였었습니다.
그랬던 우리나라에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처럼 누구 못지않게 실력과 열정이 있었고,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를 헌신짝처럼 내 던지고 조상 대대로 우상숭배와 악습과 편견에 깊이 젖어 있는 이 땅에 와서 생명 다해 복음을 전한 열매가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가져온 것입니다.
가난과 무지로 말미암아 서양 선교사들의 눈에는 미개하게 보였겠지만 그래도 이 땅을 어미 닭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젖을 물린 엄마처럼 복음의 젖을 물려주고 환자를 고치는 의사처럼 이 땅을 치료하였기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물론 선교사들의 헌신과 그 배후에는 성령의 강력하신 도우심과 역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는 말씀을 배우는 사경회와 새벽기도 산기도를 일삼는 기도하는 교회로, 핍박을 받으면서 가족과 가문에 복음을 전하여 우상을 버리고 기독교 가정으로 대물림을 하는 놀라운 변화와 더불어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가 놀라는 부흥과 성장이 거듭되는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마다 선교의 바람이 불어 세계 도처에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그곳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신학교를 세워 자생력을 얻도록 하는 살아있는 선교가 한국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한국 교회를 사랑하시고 부흥과 성장을 가져다 주셨고 그와 더불어 국가의 경제 성장과 발전을 통해서 불과 백삼십 여년 만에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가 세워지고 한국은 세계적인 국가로 변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잘 것 없는 한국과 교회위에 놀라운 축복을 쏟아 부어주시는 이유는 거룩해서도 아니고 정직해서도 아니고 믿음이 좋아서도 아니고 선교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최우선적으로 하신 일이고 그것이 바로 주님이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신 일이고 그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이고 주님이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는 이유이고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왜 한국교회를 그렇게 복주시고 한국을 그렇게 복주시는지를 깨닫고 초심을 잃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성장하면서 고린도교회와 같은 죄악이 침투하여 교회를 약화시켰고, 맛을 잃은 소금처럼 빛을 잃은 등대처럼 존재감을 상실하면서 한국교회는 서구 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침체 일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한국 교회가 이 시대를 깨우치는 파수꾼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서 경제 발전과 더불어 죄악이 만연하면서 가정이 깨어지고 정치적인 분열과 혼란이 거듭되면서 국가 경제는 부도직전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도 구조조정을 하고 심지어 선교 후원을 중단하는 교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이역만리에서 하루아침에 파송교회도 없이 유리방황하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나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와 한국 경제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 ‘처음 사랑의 회복’이 내적으로는 구호에만 그치지 말아야 하고 온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로 돌아가고 개인적으로는 전도를 통해 한해 한 영혼을 꼭 주님께로 인도해야 하고, 성경 말씀을 일독해야 하고, 교회가 선교사 한명이라도 더 협력하고 더 파송해야 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동반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살고 우리 가정이 살고 교회가 지속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하는 정로이며 교회들이 분열과 분쟁을 법정으로까지 끌고 가는 일을 치욕으로 알고 중단하고 용서와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일상생활에서 적용하고 실천하므로 교회의 권위와 그리스도인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바로 복음 전도의 밭갈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수원제일교회를 사랑하셔서 성장하며 선교하는 교회라는 영구 표어 아래 오늘 또 한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수원제일교회가 오늘 성경의 안디옥 교회처럼 말씀 중심, 기도 중심, 선교 중심의 교회가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 행 1:8 의 말씀처럼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일을 위해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선교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는 성도들을 매사에 크게 축복하여 주실 것이며 하늘나라에 가서 가장 큰 상급을 선교사들과 더불어 받게 될 것입니다.
(사 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예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 젊은 선교사 부부가 미국 선교에서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이 젊은 부부가 충남 공주에 가서 선교를 시작하고 첫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광복이라고 지었습니다. 또 두 딸은 올리브와 로저라는 딸을 낳았습니다.
1906년 2월 논산지방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다가 비가 쏟아저서 상여간에 잠시 피신을 하였는데 그 전날 장티부스로 죽은 사람을 장례한 용품을 상여간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가 감염되어 졸지에 세상을 떠나 선교사 부인과 어린아이들만 남게 되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2년 후에 선교사 사모가 윌리엄이 선교사가 되어 자녀들을 데리고 다시 공주오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47년간 그곳에서 선교 사역을 하는 중에 두 딸이 풍토병에 걸려 두 딸이 죽고 우광복만 남았고 공주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나오고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하고 다시 한국으로 나왔습니다. 그 때가 해방이 되어 하지장군이 미군정관으로 한국을 통치하던 때에 한국어와 영어에 능통한 통역을 구하는 중에 우광복이 하지 장군의 참모가 되어 한국 정부 수립에 관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지 장군이 우광복에게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우광복에게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우광복은 어머니와 상의하여 어머니가 추천해 주는 50명을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중에 48명이 다 기독교인이었고 제헌 국회위원의 태반도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1948년 5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이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열도록 부탁을 하기를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터인데 이윤영 의원이 나오셔서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부탁을 하여 기도로 국회가 열린 것이었습니다.
이 때가 기독교인은 전국민의 5%도 안되는 때였는데 윌리암 사모와 우광복이 추천한 50명이 대한민국 건국지도자들이 되게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만일 그 때 공산주의 자가 건국지도자를 추천했다면 대한민국은 오늘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때부터 한국의 기독교는 10년만에 500만이 되었고 20년만에 일천만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한 선교사 가족의 헌신이 이 대한민국 건설에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로 소천하여 공주 영면 동산에 앞서간 두 여동생과 나란히 묻혔습니다.
선교가 한 가정을 살리고 한 민족을 살리는 것입니다. 선교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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