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문명이야기
1910년 8월 28일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5년 후인 1915년 9월 11일 야심찬 이벤트로 우리 민족을 유린하였다. 그것이 물산공진회였다. 50일간 계속된 이 행사에는 당시는 천문학적인 숫자인 120만명이 참여하여 대호황을 누렸다. 전국이 떠나가도록 문을 연 시정 5주년의 이 행사는 무단통치 시대를 무색케 한 문화이벤트였다. 저들은 폭력적 지배 이면에 열등한 조선을 다스릴 힘이 문명이라고 생각하여 이러한 행사로 제국의 우월성을 나타내려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519년의 유서가 깊은 궁궐에서 문명화된 통치를 볼 수 있도록 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를 연 것이었다.
이로써 대외적으로는 자신들의 치적이 서양제국과 다를 바 없음을 선전하면서 조선인들에게는 열등감으로 가득 찬 식민주의를 내면화시키고자 했던 것이 물산공진회를 개최한 의도였다.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다 총독부가 이룩한 치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전시관을 설치한다는 명분하에 찬란한 문화유산을 일거에 철거시켰다. 조선인의 정기가 가득한 궁궐 안에 연예관과 미술관을 설치했는가 하면 기생들의 가무와 마술은 물론이고 불꽃놀이를 하면서 관람객들을 매료시켰다. 개항 이래 도입되기 시작한 근대적 문물은 경성의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경성을 비롯한 전국의 대도시들은 근대적 도시화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조선인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갔다. 당시 조선총독부 주도로 밀려들어온 근대문물은 새롭게 이 땅의 주인이 된 왜놈들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물가는 2배 이상 폭등했다. 따라서 파산자가 속출하면서 종일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든 조선인들이 넘쳐만 갔다. 1918년 경성 이화동에 살던 귀남이는 식칼로 손가락을 베어 영양실조로 누운 아버지 입에 그 피를 넣어 드렸다. 가렴주구 앞에 2000만 동포들은 쓰러져가고 있었다. 일제의 강점으로 500년 수도 서울 한성은 경성(京城)으로 바뀌었다. 서울의 중심거리 종로는 북촌이라 불리었고 진고개로 불린 충무로 일대는 도쿄상점가를 그대로 재현하여 이 도시의 지배자가 일본임을 과시하였다. 지금도 일식집을 상징하는 긴자는 당시 충무로 일대를 경성의 긴자로 불리게 됐다. 이렇게 경성은 새로운 지배자들의 문명화에 침식당하면서 생활에 못이긴 낙후된 조선인거주 지역들은 빈민의 거리가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