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소동 이야기
먹고 살만한 나라가 되면서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기호품이 된 것이 명품이다. 본래 명품이란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이나 작품이다. 그런데 요즘 사용하고 있는 명품(masterpiece masterwork)이란 유명 디자이너나 유명회사에서 만들어 낸 유명 상품이란 말로 값비싼 제품, 유명상표란 말로 사용한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명품소동을 일으킨 것은 19세기 조선이 세계 여러 나라와 접촉하면서였다. 조선은 대체로 교역이 이웃나라인 청나라를 통해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 들어 거상이 생겨나면서 조선 사람들 사이에는 중국제 모자가 유행했다. 당시 연말이 되면 청나라를 다녀오는 사신들을 따라 청에 가서 모자를 들여 온 상인들은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이 모자를 휘항이라고 불렀다.
모자에 대한 조선인들의 모습을 보고 샤를루이바라라는 사람은 1892년 그의 저서 조선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은 모자의 왕국이다. 세계 어디서도 이렇게 다양한 모자를 지니고 있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 공기와 빛이 알맞게 통하고 여러 용도에 따라 제작되는 조선의 모자 패션은 파리 사람들이 꼭 알아둘 필요가 있다.”
19세기 당시 모자는 국내에서 생산된 것도 있었지만 당시도 오늘날처럼 차별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청에서 수입한 사치품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모자 수입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야에서도 들끓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양호와 정약용도 모자 수입을 반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디 모자 뿐이겠는가!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상품들이 청나라를 통해서 조선에 들어온다. 그 대표적인 것이 면직물이었다. 당시 이러한 면직물은 서양에서 들여온 무명이라 해서 서양목이라고 불렀다. 서양목은 산업혁명 이후 기계로 짠 것이어서 가격도 저렴하고 품질도 좋았기에 손으로 직접 짠 국산 옷감은 도저히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한 때 서양목의 수입을 허락해서 국가의 어려운 재정을 충당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서양목 수입을 막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19세기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 밀려오는 외국의 자본주의와 접하면서 명품 소동에 휘말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