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백향목

장시 이야기

미션(cmc) 2016. 12. 17. 20:36

장시 이야기


일제가 철도를 부설하면서 도시에 근대적 시설물들이 들어서던 1910년대 농민들은 여전히 지난 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영세 농가는 땔감 판매를 위해 나무를 해다가 팔기도 하고 임금노동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빈농들은 농사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하찮은 수입도 생계를 좌지우지 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형편이 조금 나은 중농은 직물짜기 같은 가내 수공업을 통하여 가정경제를 유지해 나갔다. 당시 농민들은 마을 구성원이 되어 지역 질서 유지에 협력하면서 고달픈 생계유지에 시달려야 했다.

총독부는 자신들의 통치를 신정치라고 미화 하면서 조선인의 삶이 나아진다고 허풍을 떨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가의 현금 수요가 늘어난다. 이는 조세수탈로 인한 착취 때문이었다. 과중한 소작료와 물가상승으로 인한 생활고는 식민당국의 공과금과 더불어 민초들의 목을 매고 있었다. 민초들은 화폐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내핍 생활에다, 가족의 노동력을 총동원하여 수고했지만 농사일로 인한 소득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민초들로 불린 농민들은 행상 짐 나르기, 농사일 돕기 등 다양한 노동으로 연명하였는데 이런 일들이 농촌의 장시로 불렸던 5일장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장시는 당시 민초들의 삶의 무대였다. 닷새마다 찾아오는 장날이 되면 남는 곡식을 팔기도 하고 돼지나 닭 같은 가축을 매매하고 계란을 내다 팔면서 생필품을 구입하였다. 당시 장시는 이렇게 생계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농민 공동체의 최고의 무대였다. 장시가 서는 장날이 되면 볼 일이 없는 사람들도 장에 나가 세상소식을 듣곤 하였는데 이런 것을 제공하던 장소가 주막이었다. 가뜩이나 가난했던 당시의 민초들은 모처럼 손에 쥔 몇 푼 안 되는 돈을 걸고 투전판을 벌이는가 하면 장터에서 벌어지는 씨름대회나 그네타기, 줄다리기 등이 당시 민초들의 오락이었다. 그 시절 농민들의 최대 과제는 삶 그 자체였다.

나라가 패망하면서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는 식민지의 재편이 가속화 되던 당시 가난에 시달린 대다수의 농민들은 생계유지 외에는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일본의 수탈을 위한 제도가 범사회적으로 확대되면서 대부분의 농민들은 과도한 착취로 인한 궁핍에 시달리면서 신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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