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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이야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루터가 발견한 ‘하나님의 의’는 중세인들이 도달해야 할 영적 기준이었다. 루터는 1512년 그의 나이 29세 때 신설대학이었던 비텐베르그의 사제이자 강사였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515년 루터는 보헤미야의 개혁자인 후스가 화형당한지 꼭 100년이 되는 해에 중세 천년의 전통을 뿌리째 뒤흔드는 새로운 발견을 한다.
중세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기초한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는 유사성을 이루는 것으로 같은 종류가 되는 방법론(like is known by like) 이었다. 이 사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비슷한 일들 함으로서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세 천년의 구원이란 인간이 선행을 통해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노력이었고 그것에 대한 성취라고 믿었다. 당시 루터는 로마교회의 사제로서 인간이 전적타락으로 갖는 내적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루터가 영적 번민에 대한 해답을 얻은 성경이 롬 1장 17절이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 즉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선물이 바로 은혜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의로움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되면서 이 의를 이루기 위해 중세인들이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헛된 것임을 깨닫는다.
루터의 발견은 당시 총체적 위기 속에서 구원의 확신도 없이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가던 중세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였다. 루터가 주장한 오직을 뜻하는 라틴어 ‘솔라’는 루터사상의 주어가 되었다.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의로워지는 것이며,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임을 천명했다.
또한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o)가 교회의 중심이며, 교황은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최고의 규범이라고 했다. 루터의 이 주장은 더 이상 교황이 필요 없는 새로운 교회로의 출현이었으니 이것이 새로운 기독교의 출발로 이어졌던 것이다.
30대 중반의 사제 루터가 테제의 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내 건 이 사건은 중세의 마감이라는 엄청난 역사의 격변인 종교개혁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