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BC106-48)는 로마 공화정의 두 독재자 중 한 사람이었던 술라(Lucius Sulla.d. BC78)의 오른팔이었다. 예수탄생 100년 전 로마의 정계는 큰 변화가 있었다. 원로원을 중심한 공화정이 무너지고 독재자들이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공화정 즉 리퍼블릭(The Republic)은 라틴어 레스퍼블리카(res publica)에서 유래된 말이다. 레스는 ‘사물’이라는 뜻이요 퍼블릭은 ‘공공의’라는 뜻으로 이는 국가가 개인 것이 아니고 공민 모두의 재산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화정을 종결시킨 두 독재자는 마리우스와 술라였다.
마리우스는 전쟁의 영웅이었으나 평화의 시대를 이끌만한 인물이 못됐다. 결국 로마는 술라가 집권을 했고 로마의 최고의 명장으로 회자되는 폼페이우스는 술라의 좌장이 된다. BC64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며 하스모니안 왕조를 몰락시킨 폼페이우스는 3년에 걸쳐 계속적인 정복전쟁을 펼친다.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점령, 로마의 국경을 유프라데스강까지 넓힌 정복자로 로마를 세계적 제국으로 만든 로마 최고의 전쟁영웅이었다. 총 22명의 왕들을 굴복시킨 그는 1000개의 도시를 정복하였고 정복지에서 막대한 금은보화를 챙겼는데 역사는 금은 2만 달란트나 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BC61년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더 대왕이 입었던 망토를 걸치고 네 마리 백마가 끄는 황금마차에 올라 로마로 개선했다. 그는 로마에 입성 카피툴리우스 언덕의 주피터 신전에 제를 올린 후 로마 권력의 최고 정점인 집정관에 오른다. 당시 로마는 삼두정치체제였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카이사르가 바로 제1차 삼두정치를 이끈 인물이었다.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크라수스는 재정을 맡았고 카이사르는 정치를 관장한 것이 제1차 삼두정치였다. 집정관에 오른 폼페이우스는 정치를 관장하던 카이사르와의 투쟁에서 실각한다.
그 후 전쟁영웅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도피했고 그곳에서 피살당한다. 그 날이 BC48년 9월 29일 이었는데 이날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생일날이었다. 칼로써 흥한 그는 칼을 맞고 죽음으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또 한 명의 삼두정치의 거인 크라수스는 유프라데스 동편의 제국 파르티아를 치러 갔다가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로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손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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