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시저라고 불린다. 이 사람은 공화정의 나라 로마를 부정하면서 제왕처럼 군림한 종신 독재관이었다. 그의 이름은 후대 황제들이 칭호로 사용할 만큼 존귀해졌다. 카이사르는 BC 59년 로마 집정관에 올랐고 서유럽인 갈리아 원정에 성공, <갈리아 전기>를 직접 쓴 문무에 능한 인물이었다. 카이사르는 9년의 원정길에서 800여 개의 도시와 300여 개의 부족을 복속시킨 전쟁영웅이었다.
당시 로마는 제1차 삼두정치가 행해지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이 정치를 맡은 카이사르, 군권을 쥔 폼페이우스, 재정을 맡은 크라수스였다. 삼두 정치의 균형은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서 사망하면서 흔들리게 된다. 당시 원로원은 독재를 덜 할 것 같은 폼페이우스를 최고 지도자로 옹립한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갈리아에 머무르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단독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단신으로 로마에 들어가는 것이 마지막임을 안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명령을 거절하고 루비콘강을 건넌다. 카이사르는 4개의 군단을 거느리고 루비콘을 건너며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 후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그리스의 북부 데살리아 전투에서 격돌한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한다. 이 때 이집트 왕 포틀레마이오스는 폼페이우스의 목을 쳐 카이사르에게 바친다. 당시 이집트는 포틀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7세(BC 69~BC 30)가 공동 통치하고 있었다. 이 때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다. 이에 위협을 느낀 포틀레마이오스 13세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를 공격한다. 카이사르는 로마군의 지원을 힘입어 포틀레마이오스 13세를 제압한 후 클레오파트라를 단독왕으로 앉힌 채 로마로 귀환한다. 이 때 귀환하면서 카이사르가 보낸 짧은 전문이 바로 베니 비디 비키(Veni Vidi Vici) “왔노라 보왔노라 이겼노라”였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된다. 이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암살한다. 이때 이 암살자가 카시우스와 부르투스였다. 때는 BC 44년 3월 15일이었다. 수십 여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카이사르의 몸을 23번이나 찔렀다. 그 중에는 카이사르가 아들처럼 사랑한 부르투스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에투투 부르테 “부르투스 너 마저도”란 탄식을 남기고 원로원에 세워진 폼페이우스의 입상 아래 쓰러져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