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같은 가정, 가정 같은 교회
(시 149:1-5)
(시 149: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시 149:2)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시 149:3)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 149: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 149:5)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우리가 자고 깨면 매일 마다 가정에서 일어나 직장이나 사업장이나 학교로 출근을 하고 해가 저물면 가정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갖고, 주일이면 교회에 나아와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셋 중에 어느 곳이 가장 중요한가? 라고 묻는다면 어떤 사람은 교회, 어떤 사람은 직장, 어떤 사람은 가정이라고 제각기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나 가정이나 직장은 마치 몸의 장기처럼 유기적인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면 다른 것도 덩달아 부실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몸의 중요한 장기를 가리켜 오장 육부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장기는 물론 심장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장기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까닭은 하나가 부실해지면 다른 장기들도 영향을 받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에 모든 장기는 다 소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2017년 ‘새 부대를 준비하는 온전한 교회’가 되자는 표어는 교회 생활만 잘 하자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도 새 부대를 준비하는 온전한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온전한 가정은 어떤 가정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고자 합니다.
1. 차별화된 그리스도인의 가정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서 성인이 된 후에 독립하여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가정이 없다면 인류의 역사가 지금까지 유지되지 못하고 이마 오래전에 종말을 고하였을 것입니다.
가정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친히 만들어 주셨음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태어나고 자라서 이룬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가의 여부에 따라 행복도 좌우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만드신 후 제멋대로 살도록 버려두시지 않고 일정한 궤도와 법칙과 질서를 정하시고 그 것을 지켜 나가게 하셨기 때문에 창세 이래로 우주만물이 여전히 보존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만드신 가정도 제멋대로 살아가도록 내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마치 우주의 궤도와 질서와 법칙처럼 가정이 지켜야 할 질서와 법도에 대해서 부모의 책임과 자녀의 책임 남편의 책임 아내의 책임에 대해 성경에 자세히 기록하여 주셨기 때문에 온 가족이 각자의 위치에서 그 말씀을 지키면 행복한 가정이 되게 하셨습니다.
(골 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골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골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물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가정을 가지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요, 도덕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때로는 불신자가 신자보다 더 부모 공경이나 자녀 교육을 더 잘 하는 것처럼 보여 질 때도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의 가정이 무신론자의 가정과 차별화되어야만 ‘과연 신앙인의 가정은 다르다구나!’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의 가정과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의 가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입니다.
(시 149: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여기서 ‘새 노래’는 사람들이 육신의 위로와 열락을 위해 부르는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라 영원히 늘 새로우신 하나님을 높이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르는 노래가 곧 찬양입니다.
물론 옛 노래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 새 노래라는 찬양이 때로는 생소하거나 시대의 유행과 걸맞지 않기 때문에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옛 노래와 달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새 노래는 비록 현실이 힘들지라도 노래할 때마다 희망과 용기와 위로와 기쁨을 얻게 하는 신령한 노래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와 같은 새 노래를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서 찬양할지어다”라는 오늘 성경 말씀처럼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릴 때만 아니라 성도들의 가장 소중한 모임인 가정에서도 가장 많이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크리스천은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 나이가 많고 작고와 상관없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올 때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집인 찬송가를 필수품을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교회 나올 때만 예배하고 찬송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단절’이라고 말하는데 주일과 주일 사이가 그와 같은 예배와 찬송이 단절될 때 엿새 동안 세상에서 온갖 유혹과 시험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주일에 받은 은혜가 무용지물이 되고 무기력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게 젖을 주되 일주일에 한번만 준다거나, 학교를 보내되 일주일에 한번만 보낸다면 그 아이가 제대로 자라고 성적이 올라가겠습니까? 하물며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기독교 방송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의 생활을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에게 가정과 교회, 교회와 가정은 별개의 장소가 아니라 한 집안에 있는 거실과 내실과 같이, 한 지체안에 있는 중요 장기와 같이 한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두 공간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만 잘 믿고 가정에 가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정
우리가 교회에 모여 예배나 기도나 찬양이나 말씀을 나누지 않고, 성도의 교제나 친교만을 하고 헤어진다면 온전한 믿음, 진정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배우고 친교 한다면 , 우리가 가정에 돌아가서도 그와 같은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말씀과 친교가 단절되지 말고 연장선상이 되어 이어져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가정이 가족들 간에 교제와 사랑과 나눔은 없고, 반목하고 불화만 잦다면 아무리 한 지붕아래 함께 잠을 자고 음식을 나눈다고 할지라도 진정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마땅히 가족들이 먼저 자기의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고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지낼 뿐만 아니라 마치 교회에서처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가정이 될 때 그 가정이 바로 교회와 같은 가정인 것입니다.
이는 가족들이 가정에 모여 밥만 먹고 잠만 자고 각기 학교나 일터로 헤어지는 하숙집이 되지 말고 마치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가정이 될 때 그 가정이 곧 교회와 같은 가정입니다.
성경에서 교회와 같은 가정을 시작한 가정이 교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모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며 제단을 쌓았던 아벨의 가정이요, 셋의 가정이요,, 에녹의 가정이요, 노아의 가정인 것입니다.
(창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8: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그와 같은 가정 제단이 바벨탑 사건과 더불어 다 무너져 버린 후 그 가정 제단을 다시 회복한 사람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우상의 제단을 쌓았던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상 숭배하던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서 첫 번깨 한 일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한 일이었습니다.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이유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앱 1: 6) “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가족 중에 불신자가 있을 때는 온가족이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제일 순위이었다면, 온 가족이 예수를 믿는 가정의 기도의 일 순위는 자녀들의 학업이나, 가장의 사업이나, 가족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우리 가족이 가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게 하여 주세요. 라는 소원이 기도의 일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가정이라면 하나님은 그 예배와 찬송과 기도를 받으시고 그 가정에 임하시는 최고의 축복을 받은 가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여기서 ‘계시는’이라는 말(bv'y: 야샤브)은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 라는 뜻의 현재 분사입니다.
과거에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가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아름다운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줌으로 그 후손이 복을 누리고 산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가정이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가정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당장 실현하기 어려운 가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혹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 오래 기도하고 전도하는 가운데 점차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된 것처럼 온 가족이 처음서부터 예배하고 찬송하는 가정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가능한 가족들부터 시작을 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단지 예수를 믿는 가정이 다가 아니라,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교회와 같은 가정위에 하나님은 세상 끝 날까지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왜 그와 같은 축복이 나만이 아니라 우리 자손들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야 할까요? 그것은 갈수록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고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때로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만 그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고 입을 열어 새 노래로 찬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부어주시는 유일한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
3. 기쁨으로 찬양하는 가족
우리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디를 막론하고 예배를 드릴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형식과 습관에 젖은 예배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이라는 말은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의무감이나 부담감으로 반복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한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조차 마음에 기쁨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예배나 찬송은 그와 같이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라 즐거워하는 예배 즐거워하는 찬송이어야 한다고 오늘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149:2)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여기서 ‘즐거워하며’ 라는 말(jm'v, 사마흐)은 미완료 단수이고, 그 다음 ‘즐거워 할지어다’라는 말(lyG, 길)도 미완료 이지만 단수가 아니라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복수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할 때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어쩌다가 아니라 매번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해 아래서 모든 예배는 하나님이 다 기뻐하시는 예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배에 등급을 먹여 차별화하여 어떤 예배는 중요하게 어떤 예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그 모든 예배는 동일하신 한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모든 예배를 똑같이 소중히 여기고 모든 예배를 다 즐겁게 생각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모든 예배가 다 소중하고 모든 예배가 다 즐거운 예배가 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 우리가 찬송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요, 우리를 통치하시는 왕으로 그 은혜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고 그 은혜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며 예배나 찬송은 그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며 받으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내게 그와 같은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서 감사하고 찬송하고 영광 돌리는 일이니 예배는 어디서 드리든지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일입니다.
(시 149:2)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여기서 ‘즐거워하며’ 라는 말(jm'v, 사마흐)은 미완료 단수이고, 그 다음 ‘즐거워 할지어다’라는 말(lyG, 길)도 미완료 이지만 단수가 아니라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복수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할 때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어쩌다가 아니라 매번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그와 같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때 춤을 추면서 찬양하고, 입으로만 아니라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시 149:3)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성경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한 사건은 이스라엘이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였을 때미리암이 이스라엘의 딸들을 이끌고 춤을 춘데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하면 우리는 애굽의 바로 왕보다 더 악독한 사단의 권세와 홍해보다 더 깊은 죄악과 죽음의 바다에서 구원함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기로 확정하는 성도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 고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며 그 고난조차 때가 되면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할 때 입술로만이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나 워십과 같은 몸 찬양으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은 함께 모여 이렇게 예배할 때만이 아니라, 하루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어가는 침상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하루를 올려 드리는 찬양의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의 하루는 매우 성공적인 삶인 것입니다.
(시 149:5)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처럼 교회와 같은 가정을 이루며 사는 성도들이 주일마다 모이는 교회는 마치 명절에 큰 집에서 모이는 것처럼 영혼의 큰집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서 ‘권속’이라는 말(oivkei'o" 오이케이오스)은 집에 속하는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몸일 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요 우리는 그가 지으시고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의 자녀들로 교회는 영적인 큰집입니다.
교회는 마치 가정처럼 나이 많은 어른들과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과 미래를 꿈꾸는 어린이들과 갓난아이들이 모이는 영아부까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영적인 가정입니다.
설령 혈연적으로 남이라고 할지라고 모두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며 교회 안에 어른들을 우리 부모처럼 생각하며 존경하고 교회 안에 청소년들을 우리의 자녀처럼 사랑하는 영적인 한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때때로 전 세대가 주일에 주일학교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전 세대가 함께 모여 한 가족 예배를 드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영아부에 이르기까지 서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온 가족 기도회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소에 우리가 살기에 빠듯하지만 적금을 들고 보험을 붓는 것은 누구나 암에 걸릴 수 있고 누구나 사고를 당할 수 있고 누구나 죽음을 때가 있기 때문에 아직 건강한데도 장의 보험까지 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지금은 내게 아무런 절망이나 고통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설마! 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언젠가 각자의 생애에서 십자가와 같은 고난과 무덤과 같은 절망이 찾아오게 될 때 오늘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둔 사람은 비로소 아하! 그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라고 감사하며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기로 확정하는 성도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 고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며 그 고난조차 때가 되면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듯이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평소에 어떤 말씀이든지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귀기울여 듣고 아멘으로 받는 것이 언젠가 내게 찾아올 시험이나 유혹이나 환난을 대비하는 영혼의 적금이요 보험처럼 유용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은 성경에 정해진 가정 질서를 온 가족이 성실하게 잘 지키는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고, 성도들이 모이는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만 아니라 한 가족처럼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될 때 우리 교회는 가정과 같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교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성도들을 향해 얼굴을 향하시고 그와 그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영원토록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민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민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 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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