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케 하시는 하나님
(느 2:8-10)
(느 2: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느 2:9)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느 2: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 자기 가정과 직장과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바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는 우리들도 예외가 아니지만 그 것만이 아니라 플러스알파 또 하나의 소원이 더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큰 소원만 품으면 다가 아니라 큰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또한 성경 여러 곳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이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열심을 다하며 살면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은 수고가 없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 65: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1. 느헤미야의 기도
오늘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2500여 년 전( B.C. 445)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 당시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이야기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왕의 술상 준비를 책임지는 관원이 될 정도로 왕의 절대 신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느헤미야는 먹고 입고 마시는 일상적인 염려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금 수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누구도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걱정이 흔히 가진 자의 탐욕처럼 더 많이, 더 높이, 더 강하게 되기 위한 염려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떠나 온 조국과 고난당하는 동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 하는 아름다운 고민이었습니다.
(느 1: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여기서 ‘물은즉’이라는 말(la'v, 샤알)은 ‘묻다, 요구하다, 간청하다’라는 뜻의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예루살렘을 다녀온 동생 하나니 일행이 스스로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궁금했든지 묻고 또 묻는 모습에서 느헤미야가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는지를 말해주는 진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느헤미야의 관심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소식을 듣고 궁금증이 풀려서 안심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정도로 떠나 온 조국과 동족의 참상을 생생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느 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여기서 ‘능욕’이라는 말(hP;r]j,, 헤르파)은 ‘비난, 치욕, 조롱, 경멸’이라는 뜻으로 비록 그들이 바벨론 땅에 포로되는 것을 면하고 고국에 남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나고 보니 포로로 잡혀 온 유다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죽지 못해서 사는 참혹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포로로 잡혀 오지 않았다면 자기가 그와 같이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인데 포로로 잡혀 와서도 왕궁에서 왕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는 최측근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동생의 일행으로부터 그 말을 듣고서는 마치 자신이 그 비난과 치욕과 조롱을 당하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앉아서 울고 또 울고 여러 날이 지나도록 슬픔에 젖어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2) 느헤미야의 기도
느헤미야는 슬퍼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급기야는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되 그저 슬퍼하기만 한 기도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죄악이 마치 자신의 죄악인 것처럼 하나님께 자복하며 회개하는 기도였습니다.
(느 1: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만일 범죄하면 여러 나라에 흩어 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신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사 41:16)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들을 날리겠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물론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평안할 때에도 기도해야 하지만 특별히 위기를 만났을 때는 느헤미야처럼 금식하며 기도해야 함을 본보여 주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역사가 불교가 말하는 원처럼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알파에서 시작하여 역사의 종말인 오메가를 향해 직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난날의 역사가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미래의 종말을 예언하신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느헤미야 시대에 살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이 느헤미야 때와 다름없이 민족적인 위기와 교회적인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처신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인지를 오늘 성경 느헤미야를 통해서 본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2. 느헤미야의 기도 응답
느헤미야의 기도는 하루 이틀이나 한두 주간으로 끝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닥다스 기슬르월에 시작한 기도가 삼사 개월이 지난 니산 월에 느헤미야가 왕 앞에 나가 포도주를 진상하는 중에 응답을 받을 정도로 시간이 걸렸습니다.
(느 2:1)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느헤미야의 수척해진 얼굴을 왕이 알아차리고 집요하게 그 이유를 물었기 때문에 사실대로 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가 걱정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떠나온 조국의 예루살렘의 참담한 소식과 고통당하는 동족의 형편을 왕에게 아뢰면서 자기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어 무너진 성을 건축하게 해달라는 어려운 요청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왕의 진노로 죽임을 당할 수 도 있는 어려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왕이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필요한 물자와 재원까지 다 지원해 주겠다는 통 큰 약속까지 받았습니다.
1) 하나님께 영광
느헤미야는 그것이 왕의 넓은 아량이나 자신의 간청의 결과가 아니라 모든 것을 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개입의 결과였음을 공감하고 즉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느 2: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가 ‘왕이 허락하고’보다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허락’이라는 말도 와우계속법 미완료동사로 계속해서 허락한다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왕의 허락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만, 그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은 눈에 보여지지 않지만 오직 믿음의 사람은 그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보고, 느끼고, 감사하고, 영광 돌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와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음을 안다면 “아하! 그래서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로구나” 매순간마다 깨닫고, 느끼고, 감사하며,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
(사 50: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2) 근심하는 사람들
예루살렘 귀환은 우연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가 (렘 29:10) '바벨론에서 70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는 예언한 말씀대로
1) 바벨론에 포로가 된 지 70년 만에 스룹바벨의 인도로 일차 귀환(B.C. 536),
2) 그 뒤 약 80년 후 2차 귀환(B.C. 457),
3) 그 뒤 13년 후 오늘 성경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귀환하게 하신 것은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의 귀환이 예루살렘에 남아 온갖 고초를 겪는 잔류 민들에게는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러나 느헤미야의 귀환을 하나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호른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의 일행으로 그들은 마치 낙오된 약자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약자들의 등을 쳐서 자기 배를 불리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과 어떤 사람이며 또 어떤 일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 느헤미야를 가리켜 마치 예언자처럼 매우 의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느 2: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여기서 ‘흥왕하게’라는 말(b/f, 토브)은 ‘좋은, 선한, 즐거운, 이익, 번영, 복지’라는 뜻으로 때로는 ‘부흥’이라고도 번역하기 때문에 오늘 설교 제목을 부흥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예루살렘이 처참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가 그 성을 좋고, 아름답고, 복된 땅으로 회복시킬 사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잔류민들은 전혀 알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이방 족속인 산발랏과 도비야가 미리 알아차리고서 느헤미야를 가리켜 ‘이스라엘 자손을 부흥시킬 사람’이라고 긍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그와 같은 사명자요 능력자라는 사실을 산발랏과 도비야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느헤미야가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부흥시킬 경우 상대적으로 사마리아가 기득권을 상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근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근심하더라’는 말([r'y:, 야라)도 역시 와우 계속법 미완료로 느헤미야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는 산발랏이나 도비야가 근심할 정도로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의 신임과 절대 지지를 받고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해 귀환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느헤미야를 강력하게 지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재건을 위해 귀환한 것을 시기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도록 산발랏과 도비야를 비롯한 여러 적대 세력들이 선동과 이간과 모함과 투서와 회유와 협박과 폭력과 테러와 같은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성벽 재건을 중단하려고 계속적으로 도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3. 느헤미야의 부흥
만일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와 같은 처지였다면 과연 성벽 재건을 완공할 수 있었을까요? 장담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착공한지 불과 52 일만에 천신만고 끝에 완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그 비결이 무엇이었다고 느헤미야가 고백에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도비야와 산발랏과 같은 원수들이 느헤미야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헐뜯으려는 속셈으로 거짓증인을 매수하고, 겁을 주어 죄를 짓게 하려고 끈질긴 방해 공작 때문에 인간 느헤미야도 낙담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 아뢰고 도우심을 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피할 길을 주시고, 이길 힘을 주시고 원수들의 계략을 막아주심으로 마침내 완공할 수 있었다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 결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부흥시킬 사람이라고 예상하며 근심했던 대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52일 만에 성벽재건 공사가 완공됨으로 드디어 예루살렘을 부흥시켰습니다.
(느 6:14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느 6:15)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세상에 어떤 경기를 막론하고 초반의 승리만으로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은 최종 결승까지 가야만 알 수 있습니다.
산발랏과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반에는 기득권을 가진 산발랏이 기선을 잡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제 성벽공사가 끝나자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자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느 6:16)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여기서 ‘낙담하였으니’라는 말(lp'n, 나팔)은 본래 허물어지는 담에서 온 말로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뜻의 와우 계속법 미완료로 산발랏의 완전한 패배와 더불어 느혜미야의 완벽한 승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이 누구의 힘이었습니까? 사람들의 눈에는 느헤미야의 탁월한 리더십과 담력과 인내와 배짱이었다고 생각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 모든 결과는 공의롭고 진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느헤미야와 함께 하시고, 때마다 일마다 도우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승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느 9:33)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의 부흥은 부흥케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요, 느헤미야는 단지 그 하나님이 부리시는 종으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림으로 느헤미야서를 끝내고 있습니다.
(느 9:36)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 곧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그것의 열매를 먹고 그것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에서 느헤미야의 승리는 한 마디로 부흥케 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그렇게도 위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날 성경 역사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의 배후에는 흥하게도 하시고, 쇠하게도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 도우심을 받았던 사람이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창 21: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 이삭과 아비멜렉
(창 26: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3) 야곱과 라반
(창 31: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4) 요셉과 보디발
(창 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5) 다니엘과 다리오 왕
(단 6:20)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물론 그와 같은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이 바로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오늘 우리 각 사람에게도 이루어졌음을 믿고 감사하며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각과 언어와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사가 형통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도 이방신을 믿는 사람보다 더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것을 능히 극복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더 잘되게 하시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야 할복이 부귀권세가 아니라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가 받아야 할복이 부흥케 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아닌가요?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사람을 통하여 축복을 나누시며, 느헤미야와 같은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부흥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풍랑이 없는 하늘위에 있지 않고 언제 풍랑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크고 작은 시험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그러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고 뿐만 아니라 성도 간에 화목하고, 맡겨진 부서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신자를 등록시키고,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붙잡아 주고, 개별적인 양육과 공동체적인 교육과 훈련 과정을 통해서 믿음이 성도가 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롭고 부흥하고 성장하며 널리 선교하는 교회는 그 시험을 오히려 안고 더 빨리 가게 하는 범선과도 같은 교회요, 독감 유행 철에도 여전히 건강한 사람처럼 교회 풍조는 나날이 바뀌어도 건강한 교회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흥케 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엊저녁에 저버린 태양이 새아침이 되면 어두움을 박차고 힘차게 솟아오르는 것처럼 한 세대는 지고 새로운 세대가 아침 해처럼 솟아오릅니다.
설령 구름이 끼어 그 해를 볼 수 없을지라도 해가 돋지 않으면 어두움은 절대로 물러가지 않습니다.
우리 수원제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교회가 이 보다 더 부흥 성장하여 더 많은 선교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아침의 날을 준비하시는 가운데 마침내 후임 목사님이 다음 주일에 부임하시게 됩니다.
이를 앞두고 말씀을 준비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에 주시는 감동과 확신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산발랏과 도비야가 느헤미야를 가리켜 예루살렘을 흥왕케 할 사람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후임 김근영 목사님을 우리 교회에 보내시는 것은 우리 교회를 흥왕케 하시려고, 우리 교회를 부흥케 하시려고 보내주시는 목사님이라는 확신과 더불어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반갑게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산발랏과 도비야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느 2: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물론 청빙위원회와 당회 절차를 거치고 최종적으로 우리 성도들이 투표를 해서 결정을 한 일이지만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인도하시고 결정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또한 우리는 나의 생각에 따라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모든 일을 순적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모아 후임목사님을 청빙에 온 교우들이 하나가 되어 가결하게 해 주시고, 이제 때가 되어 다음 주에 부임을 하여 수원제일교회 리더십의 인수 절차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를 위해 새 부대를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무리 유능한 목회자도 때로는 힘들고 낙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 자신이 부단히 기도해야 하지만 인간인지라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비판이나 비난보다는 용기와 위로의 말이 큰 힘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큰 도움이 아니라, 위로의 작은 말 한 마디, 격려와 기도가 목회자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됨을 대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전 3: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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