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우리도 부활의 증인/(행 2:29-33)

미션(cmc) 2017. 4. 23. 06:27

우리도 부활의 증인
(행 2:29-33)


(행 2: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행 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 에 증인이로다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행 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3, )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세상을 사노라면 누구나 다 크고 작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럴 때 최선을 다하여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을 빌려 잘 극복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노력하면 할수록 마치 늪에 빠진 사람점점 더 힘들어질 때 아무도 도와주는 이도 없고 주변에서 동정과 조롱의 눈 빛 만을 보낼 때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력하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많은 죄인임을 실감하면서 모든 희망을 접은 채 실의에 빠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오히려 그것을 변화의 뜀틀로, 전화 위복의 기회가 되게 할 수 있을까요?

1. 희망을 잃어버린 제자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려고 제자들에게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라고 말씀하실 때 오히려 제자들은 꿈과 희망에 부풀어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청탁을 넣기까지 하였습니다.
(마 20: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각가지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주옥같은 천국 복음의 말씀에 매료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대 환호하였습니다.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러나 그들의 기대했던 것과 달리 예수님을 시기하는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거짓 증인을 세워 고발하였을 때 로마 총독 빌라도의 불법 재판을 받으시면서 침묵으로 일관하시고 무자비한 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온 몸이 찢기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과 좌절을 넘어 절망의 늪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죽이듯 하는 무자비한 군인들은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미쳐 죽지 않은 사람은 일부러 다리를 꺾거나, 죽은 사람은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회생 불가능하게 하였습니다.

1)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지 세 시간 만에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다리를 꺾지 않았는데 그것은 성경에 예언을 이룬 것이며, 죽은 것을 확인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요 19: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 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그러한 광경을 목도한 제자들이라면 비록 예수께서 제 삼일에 다시 살아 날것이라고 말씀하셨을지라도 부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접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을 것입니다.
(마 17: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여기서 매우 ’근심하더라’는 말(lupevw, 뤼페오) 은 ‘대단히 고통스러워했다’는 뜻으로 제자들이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희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고통스러워하였다는 뜻입니다.

2) 더구나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요셉이 마치 미라를 만들 듯이 질긴 세마포로 감싸서 바위 속에 판 새 무덤에 넣어 큰 돌로 문을 만들어 덮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 돌문을 여실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 27: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3)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돌문을 인봉하고 군인들을 파수꾼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하였으니 다시 살아나신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 27: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마 27: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그와 같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는 아무리 보아도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이 웃음과 희망을 갖게 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참으로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주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는 사람은 오래 동안 교회를 다니고, 수준 높은 신학을 한 교수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어서 역사적인 부활을 부인하거나 부인할 수 없으면 의미적인 부활로 왜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믿지 않았으면 차라리 신학교 교수가 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 한 사람들입니다.

2. 말씀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합리적이라고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합리적인 인간의 논리로는 도저히  입증할 수 없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오래 전부터 동정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실 것과 십자가에 고난과 더불어 부활에 대한 예언과 약속도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시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30: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사26:19) '주의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우리의 시체가 일어나리라' (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예수께서 그 예언의 말씀을 하나하나 다 이루셨다면 부활의 약속도 반드시 이루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실 것을 여려차례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요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그와 같은 부활은 꾸며낸 신화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설정한 가설이 아닙니다. 결코 착시나 환상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거 하시려고 일시에 열두 제자는 물로 일시에 오백여명에게 보이시고, 맨 나중에는 부활을 조롱하며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에게 보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키신 능력입니다.
(고전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물론 역사적으로 초유의 사건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조차 믿어지지 않아서 의심하다가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을 정도로 인간의 이성으로 믿기는 고사하고 이해조차 어려운 진리입니다.
(눅 24: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눅 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 부활신앙으로 변화를 받은 베드로

어느 제자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베드로조차 낙심한 나머지 삼년 전 예수님이 처음 부르셨던 그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를 잡겠다고 다른 제자들까지 선동하여 옛 생활로 되돌아갔던 사람입니다.
(요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렇다면 하물며 오늘 우리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거나 부활이 믿어진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누구나 다 예수를 믿기 전부터 교회를 다니기 전부터 부활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언제,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의 도움을 받고서야 비로소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1) 부활을 약속하신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십 여차례 보이시고 만나주시고, 마음을 열어 성경을 풀어 주셨을 때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2)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작별을 앞두고 당신이 떠나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하시면서 주님이 떠나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인데 그 성령은 주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게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여기서 ‘생각나게 하리라’는 말(uJpomimnhvskw, 휘포밈네스코) )은 ‘깨닫게 하다, 기억하게 하다, 회상 시키다’는 뜻의 미래의 약속이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변하고 방언을 말하는 광경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한 말씀입니다.
성령 받기 이전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서도 의심했던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받고 난 다음 무엇보다 성경 말씀을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으로 오래 전에 기록되었지만 지난날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과 내일과 영원한 미래를 포함하는 예언의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며 예수님이 그 예언된 약속대로 부활하신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행 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지난 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까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는 무리들이 두려웠기 때문인데 바로 지금 베드로의 눈앞에 그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 사람들을 향해 담대히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베드로가 성경의 깨달음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얼마나 놀랍게 변화되었는지 전혀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오늘 성경에 베드로 사도도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변화를 받은 이후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았지만 주님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을 기억하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
(벧전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가 그렇게 변화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 열매가 달리는 것을 보면 그 다음에 계속 열매가 맺는 것처럼 설령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하면 자기도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부활하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물론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믿으면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비상 통로가 있습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나 그 믿음을 가지려면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찾아가야 하고 전해야 하고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교회로 인도해야만 생명의 복음인 십자가와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일을 천사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기계에다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복을 받게 하시려고 다음 주 가족사랑 축제를 주신 것은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도 많이 복음을 전했으나 자랑할 것이 없음은 부득불 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였다면 오늘 우리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여기서 ‘부득불’이라는 말(ajnagkhv 아낭케)은 ‘강제, 강요, 압박’이라는 뜻으로 현제 그 부담을 느끼고 있는 상태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래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괴수노릇을 했던 사람이 기독교인들을 체로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이방인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발령을 받았습니다.
(행 26: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선한 일은 억지로도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금번 가족사랑 축제가 즐겁고 기쁜 날이 되려면 마음에 우러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복받는 일입니다. 비록 부담스럽지만 복음을 위해 싫은 소리를 듣고 욕을 먹는 것이 상급을 쌓는 일임을 알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화하고 만나 차와 식사를 나누고 선물을 하고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을 자라게 하는 요람인 교회로 인도하는 증인의 삶을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도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신실하여서 성경대로 억지로 순종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러한 나에게 택하신 영혼을 붙여 주시고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 영혼을 구원하는 천국 어부의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