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하나님의 침묵/(시 83:12-18)

미션(cmc) 2017. 3. 31. 15:12

하나님의 침묵
(시 83:12-18)


(시 83:1) [아삽의 시 곧 노래]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시 83:2)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시 83:3)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시 83:4)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시 83:5)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시 83:6)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시 83:7)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사람이요 `(시 83:8) 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셀라)


교회를 처음 나왔을 때 간혹 ‘새신자 교육, 비전학교, 제자훈련’라을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때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아마도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만도 쉽지 않은데 무슨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하고 기도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말이 나와 무관한 것처럼 생소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그와 같은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 까닭은 죄로 인해 영적으로 무지해졌기 때문에 성경을 배우고 신앙을 훈련받지 않으면 구원의 진리를 알 수 없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서는 말씀대로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열심히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t['D, 다아트)은 ‘참된 통찰력’이란 의미로 선척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배움과 경험적인 지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지식만 가지고 있다고 다가 아닙니다. 지식 중에서 위험한 지식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바로 알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성경을 달달 외우고 눈만 뜨면 성전과 회당에서 날마다 성경을 가르치고 율법을 문자대로 지켜야 된다고 고집하면서 심지어 예수님을 고발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오늘 시편 기자 아삽도 하나님을 오해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기자 아삽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오해하였는지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 우리도 그와 같은 오해를 하고 있지 않은지를 돌이켜 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고자 합니다.

1. 시편 기자의 오해
(시 83:1) ‘[아삽의 시 곧 노래]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여기서 ‘침묵하지 마소서’ 라는 말(ymiD, 데미)은 ‘멈춤, 쉼’이라는 뜻으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무관심한 상태입니다.
이어서 ‘잠잠하지 마시고’라는 말(vr'j, 하라쉬)은 ‘벙어리가 되다’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는데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 말입니다.
또한 ‘조용하지 마소서’라는 말(fq'v, 사카트)은 ‘가라앉다, 평온하다, 진정하다’는 뜻으로 마음에 아무런 동요가 없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끝마다 '마소서, 마시고, 마소서' 라는 부정 불변사(la, 알)를  거듭 사용하여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을 촉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성경에 열개의 적대국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었으나 하나님이 침묵하신 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시 83:6)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시 83:7)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사람이요
여기에 나오는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자손들이고,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서자로 야곱의 자손 이스라엘과 적대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인척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이들은 한 결 같이 이스라엘을 못살게 군 나라들입니다.
더구나 그 이유가 성과 땅을 뺏고, 재물을 약탈하고, 노예 삼는 일반적인 전쟁과 달리 아예 이스라엘을 말살하여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려는 음모 때문이었습니다.
(시 83:4)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여기서 ‘멸하여’ 라는 말(dj'K;, 카하드)이나, ‘기억되지’ 라는 말(rk'z:, 자카르)이나 둘 다 미완료 동사로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뜻입니다.
평소 그 나라들은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불편했던 때가 많았으나 오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일에는 한 마음이 되어, 동맹을 맺고, 연합하여 막강한 세력 집단을 만들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시 83:5)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시 83:8) 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셀라)
실상은 그와 같은 행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치 부모와 자식이 공동운명체인 것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분연합되어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나라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고 시끄럽게 떠들고 먹이 감을 공격하기 위해 머리를 드는 맹수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려고 하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숨넘어가는 사람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한 것이 바로 오늘 성경의 발단입니다.

2. 시편 기자의 이해 

오늘 시편 기자가 처음에는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오해를 하였었으나 지난 날 그에 못지 않은 위기에서 여러 번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시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패망케 하신 사건들을 떠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의 수효가 마치 메뚜기 떼와 같고 해변의 모래와 같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믿음의 300명 용사와 함께 하셨을 때 마침내 13만 5여명의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케 하셨던 사건을 기억하였습니다.

2) 여선지 드보라를 세워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쳐 이기게 하심도 하나님의 능력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야빈은 이스라엘에게는 단 한 대도 없는 철병거를 구백승과 수다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처들어왔을 때 여선지 드보라와 바락을 통해 시스라와 야빈을 멸망시킨 사건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아도 다 지켜보시며 때가 되면 반드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원수들을 보복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시 83:9)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소서’ (시 83:10)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시 83:11) ‘그들의 귀인들이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달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목장인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소유로 삼고자 대적하는 이방 나라들을 향해 저주하는 기도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시 83:13)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시 83:14)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시 83:15) ‘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마치 거센 바람앞에 힘없이 굴러가는 검불같게 하시고, 불이 숲을 태우고, 화염이 산을 삼켜 버리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들을 주의 광풍으로 멸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저주의 기도였습니다.
과연 그와 같은 기도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여전히 침묵하셨을까요? 아니면 대적들을 물리쳐 주셨을까요?

예화
유다의 여호사밧 왕 때에 모압과 암몬과 마온이 연합군을 조직하여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처들어 왔을 때에 왕은 온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예루살렘으로 모여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성전 새 뜰이 모였을 때 여호사밧왕은 군중 가운데 서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대하 20:12)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여호사밧은 찬양대를 조직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부대 선두에 세워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사랑은 영원하다!‘ 라고 찬송을 부르자 여호와께서는 연합군인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들이 에돔 사람을 쳐서 그들을 완전히 죽이고, 다음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들끼리 싸움이 붙어 서로 치고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대적과 싸우셨다는 말을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모든 인접국들이 듣고서 하나님을 몹시 두려워하여 감히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여호사밧은 평화로운 가운데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하 20:30)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그의 하나님이 사방에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위기를 만났을 때 침묵하시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 상황에서 기도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우리가 더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위기를 만났을 때 성전에 나와 기도하면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반드시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대하 7: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대하 7: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여기서 ‘이제가’ 오늘 우리에게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고, ‘이곳이’ 바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컫는 우리 교회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지금 그러한 교회가 되도록 회복시키시는 것에 대해 우리는 크게 감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처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교회를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기 위해 더욱 힘써 모여 난국에 처한 나라와 민족과 한국교회는 물론 건강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3. 저주를 넘어 사랑으로

물론 율법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으라’(출 21:24) 는 말씀대로 시편 기자 아삽이 원수를 향해 저주의 기도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원수라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조차 원수를 향해 저주하는 기도가  마땅한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와 같은 쌍방 저주는 끝이 없이 이어져가게기 때문에 세상은 피비린내가 잦아들 날이 없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율법을 복음적으로 이렇게 재해석하셨음을 산상보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물론 율법을 문자대로만 해석하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통해서 율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인가를 밝히 보여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구약 시대나 신약시대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시랑과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그렇다면 오늘 성경 아삽의 기도는 원수를 저주하는 율법적인 기도였을까요? 결코 아니었습니다.
시편 기자 아삽이 원수가 망하기만 바라는 저주의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때문에 원수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찾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시 83:16)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여기서 ‘찾게 하소서’라는 말(vq'B, 바카쉬)은 ‘얼굴을 구하다, 몹시 바라고 원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하나님의 원수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을 갈급하게 구하고 찾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선교적인 기도였습니다.
(시 83: 17, 18) 저희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케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여기서 ‘알게 하소서’라는 말([d'y,, 야다)은 믿음의 가장 첫 단계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고 삶을 통해서 경험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해하고 바로 알게 되는 것을 뜻하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다고 오해하던 시편 기자의 탄식이 변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래로 송두리째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오늘도 사람들이 형통할 때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수치를 당하게 될 때 하나님을 찾고 자신의 죄를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겸손한 사람으로 변모되는 모습을 때때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개인적인 어려움 때문에 아삽처럼 하나님이 나에 대해 무관심하시며 나의 기도에 대해서 침묵하고 계신다고 아삽처럼 오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행여나 그렇게 생각했다면 바로 오늘 아삽처럼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임을 알고 하나님이 아니라 잠자는 나의 영혼을 깨우는 기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사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레 포기하고 낙심하고 침묵한 채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이스라엘이나 우리 민족이나 고난에 대해 외면하지도 침묵하지도 않으시고 묵묵히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형벌과 심판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경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고, 회개하기만 하면 구원하시겠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신 4: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여기서 우리는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도, 멸하지도, 잊지도 아니하시다’고 하신 삼중언약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위기를 만났을 때 성전에 나와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대하 7: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대하 7: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오늘의 이곳이 바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컫는 이 교회이며,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모여 예배드리는 이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압니다. 느낍니다.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시는 몰인정한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화
지난날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대한민국에 대해 침묵하시는 것처럼 생각되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임진왜란과 개항기와 한일 합병 때의 정치적인 상황, 왜정 삼십 육년간의 피압박의 상황, 육이오 사변과 휴전 직후 초토화된 국가 경제, 4.19. 5.16, 5. 18, 아엠 에프 외환위기 등 수많은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교회는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대해 침묵하시는 것처럼 생각되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나니 오히려 그와 같은 위기들이 결국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서 더욱 강하게 만들어왔습니다. 교회는 급성장하였습니다. 세계 선교대국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비록 오늘의 대한민국과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이 마치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오해하기 쉬운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 민족과 교회의 밝은 미래를 위해 여전히 일하시고 준비하시고 계심을 믿고 우리가 침묵하지 말고 입을 넓게 열어 민족과 교회와 자신을 위해 부르짖어 구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순간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한순간도 우리 민족과 교회를 잊어버리시거나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때를 따라 서서히 준비하셨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으나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침묵한 채 부르짖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시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 121:2, 개정)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를 깨우시고 나를 깨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베드로처럼 시험에 들지 않고 깨어 기도하라고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자! 이제 우리 모두 일어나 주님과 더불어 기도의 동산으로 합심하여 모여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입술을 열어 기도하게 하시고 새 그림을 그려 주시고, 새 힘을 부어 주시고 각 사람을 통해서 수원제일교회의 제 2의 새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여기서 ‘이루어지게 하시리라’는 말(givnomai 기노마이)은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늘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