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참새와 제비/(시 84:1-4)

미션(cmc) 2017. 7. 13. 18:19

참새와 제비
(시 84:1-4)


(시 84:1)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 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시 84: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하나님의 말씀인 오늘 성경을 보면 위대한 장군의 승전가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참새와 제비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저의 어린 시절이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예 화
제가 농촌에서 자랄 때 일년 내내 집 주위와 논과 밭 주변에서 사계절 내내 볼 수 있었던 새는 참새였습니다. 비가 오게 되면 참새는 벼 짚으로 덮은 지붕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감추었습니다. 겨울이면 그 참새를 잡아서 구워 먹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잡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잽싼 새였습니다.
또 하나는 참새와 달리 겨울에는 따뜻한 곳을 찾아 강남에 갔던 제비가 따뜻한 봄이 오면 돌아와서 벼를 심기 위해 갈아엎은 논에서 수도 없이 작은 흙을 물어다가 침으로 개서 처마나 선반 구석에 집을 짓고 몇 개의 알을 낳아 새끼를 까던 제비새끼가 떨어져 다칠까봐 조바심했던 아련한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왜냐하면 흥부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성전을 사모하는 사람
오늘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시편 기자의 심정이 적나라하게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 84:1)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여기서 ‘사모하여’라는 말(#s'K;, 카사프)은 ‘간절히 사모하다, 그리워하다, 열망하다’라는 뜻으로 지금 성전을 멀리 떠나 있는 상태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심신이 쇠약할 정도라고 하는 것울 볼 때 성전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본 시편은 고라의 자손인 노래한 성전 순례자들이 부르는 성전 예찬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마치 사람의 심장과 같아서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성전이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을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은 홍해와 삭막한 광야 길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인도와 보호가 절대로 필요하였습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친히 자청하여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를 통해 계시하여 만들게 하신 성막입니다. 성막 안에는 지성소 성소 제단과 물두멍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법궤가 있는 지성소요, 법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 위에 금으로 만든 그룹이 날개를 펴서 서도 마주하고 있는 두 그룹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민 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그와 같은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까지 메고 들어갔으며, 다윗이 그 법궤를 다윗 성에 옮겨 놓았을 때 너무 좋아서 덩실 덩실 춤을 출 정도였습니다.]다윗의 말년에 마지막 소원은 그 법궤를 성막이 아니라 견고하게 안치할 수 있는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자신이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마치 자기가 건축하게 된 것처럼 기뻐하면서 그가 평생에 모은 전 재산을 성전 건축을 위해 헌납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사모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 건축을 위해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대상 29: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대상 29: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이었고 하나님조차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지만 그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누구보다 혹독한 징계와 채찍을 당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이 아닌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왕궁을 버리고 부득불 쫓겨나서 도망할 때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법궤를 메어왔으나 다윗은 그 법궤를 하나님의 궤를 메어가지고 갔지만 부득불 사독과 아비아들을 시켜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가 놓게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까이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것이 얼마나 다윗을 슬프게 하였든지 감람산 길을 올라갈 때 머리를 풀어 얼굴을 가리고 맨발로 울며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삼하 15: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삼하 15:30)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이를 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가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내지 않았다면 법궤는 도망다니는 다윗을 따라 다녀야만 하였습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아는 다윗은 법궤를 사유화하기를 원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 법궤를 공유할 수 있도록 돌려 보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궤를 돌려 보내는 다윗은 언제 다시 여호와의 법궤를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도망자의 발걸음을 가면서 그의 마음과 육체는 기력을 잃었을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 장막 곧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음의 기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시 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성전의 사모하는 마음으로 회복을 위해 간절히 부르짖어 성전 회복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성경 시 84:2 하에서 ‘부르짖나이다‘ 라는 말(@n"r:, 라난) )은 ’갈급히 외치다, 큰 소리로 부르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 고라의 자손이나, 다윗 왕이 그처럼 사모하고 사랑했던 하나님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믿는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면 오늘 우리가 다윗처럼 사모헤야 할 성전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성령으로 교회에 임재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 곳이 성막이나 성전이나 교회나 심지어 성령이 내주하시는 우리의 마음  조차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뿐만 아니라 지상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인간들이 교회라는 건물을 세우기 전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그 몸을 제물로 드리게 하시고 그 피 공로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을 찢으시고 보이는 세계 도처에 주님의 몸이라고 말씀하는 교회를 세워 여기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행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정말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처럼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참 복을 받은 사람

우리가 만일 다른 교회가 부흥하고 다른 사람이 복을 받아 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둘 중의 하나의 마음이 들 것입니다. 하나는 그것을 시기하는 나쁜 마음과 또 하나는 나도 그런 복을 받고 싶어 하며 부러워하는 순진한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부러워하는 것과 시기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1) 시기하는 것은 그 사람이 더 이상 잘 되지 말고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 하와를 유혹하던 뱀과 같은 마음입니다.
 2) 부러워하는 마음은 나도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이 어떻게 복을 받았는지를 살펴서 나도 그렇게 해서 복을 받아야 하겠다는 것은 우리도 소유해야 할 좋은 마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부귀권세를 누리며 잘 되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기자가 어떤 연유로 인해서 왕궁에서 쫓겨나서 도피자의 길을 걸을 때 마음에 간절히 원하고 또한 부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경우에 어서 빨리 강력한 왕권을 회복하여 자기를 배신하고 괴롭게 한 원수에 대한 철저한 복수와 응징이 아니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그런 복을 부러워하거나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하면서 부러워하였습니다.
(시 84: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여기서 주의 집에 ’사는 자’라는 말(bv'y: 야샤브)은  하나님의 성막을 봉사하며 찬양하는 일에 봉사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성전 문지기와 같은 사람들이 성전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섬김이들을 가리켜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복이 있나니’라는 말(rv,a,, 에셰르)은 ‘행복, 복, 지복’ 이라는 뜻으로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이 미래에 무슨 복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의 성전에 머물러 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섬기는 그 자체가 큰 복이라는 뜻입니다.
(시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는 성전에서 제사장이나 레위 인이나 찬양하는 고라의 자손들만 복 받은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천적과 비바람을 피하며 오물을 흘리는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용납하시는 것을 생각하니 성전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시편 기자는 그 참새와 제비가 부러 웠던 것입니다.

3. 눈물 골짜기를 지날 지라도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가 복되다고 한 길은 시온의 대로라고 하였고 또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러한 길만 있고 시온의 대로로 가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대조적인 눈물 골까지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시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와 같은 눈물 골짜기를 가로 질러가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시편 기자와 같이 성전에 나아갈 수 없고 난민처럼 돌아갈 수 있는 고국이 없고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도는 나그네처럼 세상에 처량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마치 복받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 길이 힘들고 어려워 끝까지 완주하기 어려운 길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길을 가는 자에게 그 때마다 힘을 주시기 때문에 마침내 그 길을 완주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시온의 대로처럼 평탄한 길이 아니라 오늘 성경 말씀처럼 눈물 골짜기의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의 길과 주를 섬기는 종들과 신앙의 박해와 어려운 환경에서도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선한 싸우는 성도들이 가는 걸어가는 믿음의 길은 시온의 대로가 아니라 좁고 협착한 길이요 때때로 눈물 골짜기를 통고하해야만 하는 고난의 길입니다.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힘을 주시고 또한 이른 비를 쏟아 부어 많은 오아시스가 있게 하시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복되도다고 한 것입니다.
 (시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 길이 시온으로 직행하는 고속도로이기 때문에 복되다고 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길은 사명자만이 가는 길이요 그 사명자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마치 눈물골짜기를 가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름이면 가나안 땅에 다다를 수 있는 넓은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없는 홍해와 광야로 인도하셨으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힘을 주셨기 때문에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 15: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 길을 지나왔고 또한 앞으로도 가야 할 좁은 길이요 언제 또다시 눈물골짜기를 맞게 될지 모르지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에벤에셀의 축복으로 여기까지 도우신 것처럼 어떤 형편에서든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며 때를 따라 도와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여기서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는 말(uJpofevrw, 휘포페로)은 어떤 어려움 만날지라도 그것을 ‘지탱하다, 견디다, 참다’라는 뜻이지만, 내 힘으로가 아니라, 능력주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능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심으로 광야에서도 주야로 행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거친 세파에서도 굴하지 않고 한 걸음씩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 84: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이 세상에서 나 라는 존재는 상대적인 존재로 소유나 지식이나 지위를 가지고 따진다면 마치 오늘 성경에 나오는 참새와 제비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서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며, 질고와 사고와 죄와 죽음이 가득한 눈물골짜기 길에서도 때로는 그늘이 되어주시고 인도자가 되어주시고 마침내 천국에 이르도록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저 영원한 천국에까지 갈 수 있게 된 것은 한 순간 잊지 않으시고 그 날개 품으로 감싸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손에게까지 그렇게 하시겠다니 만만 감사할 뿐입니다.
(시 102: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 102:28)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내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한결같이 사랑하시는지 그 은혜에 감격하여 시편 기자는 노래하였습니다.
(시 144:3)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찬송 301 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있을 때 잘해’ 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이렇게 자유롭고 예배하고 참새와 제비처럼 자유롭게 교회를 출입할 수 있는 때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놓친 고기가 크게 생각된다는 말처럼 언젠가는 그 모든 것들을 놓치게 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예 화
저도 그와 같은 경험이 몇 번 있었는데 어떤 때는 병원에서 다른 환우들과 식당에서 예배를 드린 적도 있고, 퇴원 후에는 요양하는 곳 가까이에 농촌 교회나, 때로는 해외에서는 현지 교회에 나아가서 낯선 사람들과 예배 형식이 전혀 다른 예배에 참석하여 손님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가 모교회가 그리워서 노트북을 켜 놓고 실시간이나 녹화된 예배를 시청하면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지만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서 중간 중간에 끊기기 때문에 집중이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아마도 은퇴를 하게 되면 그런 기회가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예행 연습을 시키셨는지도 모릅니다. 암튼 그 무엇도 오늘 이처럼 좋은 환경에서 아름답게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행복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은혜를 누리는 기회를 주셨을 때문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나아와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예배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와 같은 예배를 드릴지라도 하나님이 만족해 하시지 않는 이유는 지구 도처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염려와 근심 속에서 결국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가는 눈물 골짜기를 가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은 마치 눅 15장의 탕자의 아버지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위에 세우신 이유요,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이 최초의 선교사로 이 세상에 파송되어 오신 것처럼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성장하며 선교하는 교회’가 영구 표어인 우리가 땅끝까지 복음을 선교하는 사명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갈수록 세상 사람들이 그와 같은 복을 받게 하려고 이 땅위에서 세우신 교회를 하찮게 여기고 폄하하기까지 할지라도

1)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주님을 사랑한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를 기뻐하는 예배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바랍니다.
3)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소원이요 명령인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고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고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협력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드리는 것도 복된 일이지만 성장하며 선교하는 교회라는 표어아래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선교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겠다고 해마다 선교 대회를 여는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은 더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