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신앙 마라톤(히 12:1-3)
장봉생목사(수서은혜교회)
육상 마라톤과 신앙 마라톤
얼마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이봉주선수가 마라톤 우승으로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모든 경기는 운동선수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결과를 쟁취합니다. 그런데 100미터 단거리 우승자에게는 감탄하지만 마라톤 우승자에게는 감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의 긴 시간을 극복한 그 노력에 후한 점수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연히 좌우에 늘어선 군중들의 환호를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 인생도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 경주와 같지 않을까요? 구름같이 둘러선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히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교회사를 수놓은 아름다운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거룩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신앙동지들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관중이 아닙니다. 다 한곁같이 인생 마라톤의 의미를 몸소 체험한 경력자들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롬1:16)의 산 증인들이며,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상주시는 이심을 굳게 믿는 믿음(히11:6)의 산 증인들입니다. 이 증인들에게 둘러싸여 우리는 오늘도 긴 신앙 마라톤의 1999년 지점을 달리고 있습니다.
신앙 마라톤이 육상 마라톤과 다른 점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중간에 코스를 이탈했어도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중간 탈락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 마라톤의 코스는 무엇보다 엄한 공의의 룰(rule)이 적용되지만, 그와 함께 무한한 사랑의 룰이 동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신앙 마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잘 달릴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둘째는 기록이나 등수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신기록 달성과 일등에 대한 집착은 다 경쟁주의의 산물입니다. 신앙 마라톤은 남보다 먼저 달리는 경주가 아니라 모두 함께 달리는 경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스를 이탈했다가 다시 들어온 사람, 못가겠다고 주저 앉은 사람들을 축하와 격려로 손잡고 함께 달리는 이색 마라톤입니다. 그래서 감탄보다 감동의 경주인 것이다. 왜나하면 감탄은 탁월함에 대한 감정표현이지만, 감동은 훌륭함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기립하여 진심어린 경외의 박수를 보내는 것은 탁월함이 아니라 훌륭함 즉 희생적 삶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요즘과는 다르게 오래 전 개교기념일에는 전교생이 참가하는 단축 마라톤이 유행이었습니다. 출발은 함께 했지만 도중에 버스를 몰래 타고 학교 앞까지 가서 내리는 얌체형, 코스를 이탈해서 샛길로 빠져나가는 잔머리형, 아예 날 잡아가라고 주저앉아버리는 포기형 등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정직하게 달리는 사람은 어떤 점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되어버립니다. 얄밉기도 하고 힘빠지기도 합니다. 경쟁 마라톤에서 이런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최소한 눈총은 맞아서 부상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마라톤은 신기록 작성이나 일등 차지를 목표로 하는 경쟁 마라톤이 아니라 예수님의 새계명(요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을 목표로 하는 동고동락 마라톤이기 때문에 경쟁의식도 없고 피해의식도 없습니다. 경쟁하지 않고 함께 돕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신앙 마라톤을 지배하는 원리는 결과보다 과정 중심이며, 일보다 사람 중심입니다.
신앙 마라톤을 위한 세가지 요령
신앙 마라톤을 위해서는 세가지 요령에 충실해야 합니다. 첫째, 벗어버릴 것은 빨리 벗어버리십시오(히12:1). 벗어버려야 할 것은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했습니다. 무거운 짐이란 운동선수의 몸을 둔하게 하는 군살을 말합니다. 신앙의 군살은 소유욕입니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내 위치가 더 보장되며, 내 살이 더 화려하게 될 것이라는 착각이 그 원인입니다. 그러나 육상 마라톤에서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해야 잘 달릴 수 있듯이 신앙 마라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더 소유하면 할수록 달리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몸도 무거워서 주체를 못하는데 어떻게 남까지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신앙 마라톤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나의 가난함이 늘 남의 부요함이 된다는 신앙상식에서 벗어나면 무거운 짐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늘 자기 포기 자기 부인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죄는 얽매이기 쉬운 것입니다. 죄는 틈만 보이면 우리를 얽어매려합니다. 그래서 죄의 올무라고 합니다. 날마다 죽노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은 날마다 벗어던지는 싸움의 전투강령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기도의 외침이 무엇입니까? 오늘도 잘 벗어던지게 하옵소서여야 합니다. 우리는 늘 대면하는 환경과 쉽게 친구가 되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절대 말씀 앞에서 자신의 투명성을 늘 점검하지 않으면 다들 묶여있는 주변인의 모습이 정상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얽매이기 쉬운 죄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증인들은 그래서 존재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달리면서 자꾸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벗어버려야 하는 무거운 짐과 얽매여져 있는 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법의 올무가 풀려나와 자유의 줄달음을 칠 수 있습니다.
둘째, 계속해서 참고 달려야합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12:1)라고 했습니다. 장거리 경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참을성이 없으면 출발하자마자 포기할 것입니다. 아니 출발 전부터 포기할 생각을 먼저하고 있을 것입니다. 마라톤 우승자의 영광은 곧 인내의 결과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에게 한없는 존경과 부러움의 박수를 보내기 까지 합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며, 코스마다 그 난이도가 다릅니다. 초반에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후반에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르막길을 남보다 더 잘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길을 더 잘 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육상 마라톤 선수들은 자신의 체질적 특성을 잘 알고 있으며, 뿐 만 아니라 자신이 달리고자 하는 코스의 특성을 미리 관찰합니다. 그런 후에 전략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달려간 신앙 마라톤 코스를 성경과 역사를 통하여 잘 아는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 과신(過信)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합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참을성이 없는 사람인 것을 정직히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바늘에 찔리는 것에서 부터 가까운 사람의 바늘갈은 한마디까지 참지 못하는 연약함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신 주님에게 배워야 하겠습니다.
셋째,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라톤 경주의 끝에는 결승선 테이프과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립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 보내는 그의 마지막 서신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고 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분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로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결승점의 기쁨과 감격은 지금의 고난을 능히 참게 하는 힘이 됩니다. 참된 증인이신 예수님께서 이 길을 그것도 가장 어려운 난코스를 달리신 후에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멀리 손짓만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신앙의 동지 여러분!
우리가 피곤하고 낙심될 때마다 생각합시다.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 곧 예수님을 생각합시다(히12:3). 신앙 마라톤 역시 달리는 경주인지라 피곤하고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인생 마라톤에 가장 피곤하고 낙심될 때가 언제일까요?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배신과 반역의 칼을 맞아야 하는 인간관계일 것입니다. 바로 그 난코스를 참으시며 달리셔서 마침내 승리의 면류관을 안으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참고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1999년에도 여전히 피곤하고 낙심할만한 코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험난한 코스를 피하지 말고 그 코스가 더 힘있는 우리를 피하도록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달려갑시다. 시작한 것은 끝이 있습니다. 신앙 마라톤도 언젠가 끝이 날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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