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 각종 설교 모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

미션(cmc) 2009. 1. 26. 20:49

'지상설교'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 사도행전 2:46-47

최만수 목사(대구태현교회)


 

희망찬 1999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무엇인가 새롭게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세계가 이웃인 오늘날은 분명히 변화하는 자만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우리 국민들도 구조조정으로 뼈를 까는 고통의 대가를 치르면서라도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모든 면을 변화시키면서 이끌어 가야 할 성도들이 모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교회에서부터 먼저 변화가 시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올바로 될 때 수평적인 관계 변화가 저절로 됩니다.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는 것은 예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지으셨기에 찬송의 생활이 회복되어야 관계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가 채택하고 있는 예배 모범에는 예배 의식에 대해 『엄숙한 태도와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곁눈질이나 졸음이나 웃거나 그밖에 모든 합당치 못한 행동은 일체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모범이 정해신 시기는 총회헌번 서문에 보면 1932년 제 21차 총회에서 한글 사용법대로 헌법을 수정한 것을 사용하다가 1990년 제 75차 총회에서 예배모범 일부만 수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예배 모범은 60-70년전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당시 한국교회는 오르간 하나만 가지고 예배를 드렸고 보릿고개가 있어 생계의 위협을 받고 살았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 우리는 1930년대와는 완전히 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도시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농어촌교회까지 기타, 키보드, 드럼, 북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찬양의 모습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헬라어로 예배(프로스퀴네오)란 말은 「~부터」(프로스)란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와 'UNDERLINE' 'END OF UNDERLINE'「입맞추다」(퀴네오)란 동사의 합성어로 되어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제사법에 의해서 의식적으로행해졌지만 신약의 예배는 엄숙한 태도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입맞춤과 같은 극치의 기쁨과 환희, 감격 속에서 행해졌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본래의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6-47절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여 떡을 떼며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신약의 예배는 물론 구약의 제사때도 찬송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까요? 하나님편에서 볼 때 찬송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대상에는 피조물 가운데 예외가 없습니다. 남녀노소, 유무식 모든 사람에게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음 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열정을 가졌느냐 살펴볼 때 교회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를 위하여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찬양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공적 예배가 있는 주일낮 오후예배 때 2-3장의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 외 특별한 모임에는 2,3 절은 생략하고 1절과 마지막 절만을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순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비중이 크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성도가 구원에 대한 진정한 감격과 감사를 안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을 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현대 교회마다 드려지는 예배는 한 시간 내에 마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24절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여기 신령이란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날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 초대 교인들에게 강림하신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4절의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서 말하는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성령님이 예배를 이끌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예배중 설교자가 설교를 20-30분 하는 것처럼 찬송을 부르는 시간에 성령이 역사하신다면 찬양도 20-30분 할 수 있습니다. 통성기도 시간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기도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시편 69:30-31절에 성도가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은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게 함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찬양을 이렇게 원하시고 기뻐하신다면 한국교회가 찬양사역에 전문인을 양성해 교회마다 전문적인 찬양사역자를 두어 찬양하게 해야 합니다. 역대상 25:7절에 지금부터 수천년전 다윗시대에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는 288명씩이나 두었으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을 하게 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배자 입장에서 찬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43:21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불러 주시고 구속해 주신 목적도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또 위대한 신앙인이 직접 간접으로 찬양했던 것은 우리에게 모범이 됩니다. 다윗은 시인이요 음악가로써 시편 150편 중 2/3을 기록하여 하나님을 직접 찬양했습니다. 역대하 5장 12-13절을 보면 솔로몬은 노래하는 자, 악기 만지는 자, 120명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히스기야도 역대하 29장 30절에 레위사람을 세워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소리내어(시 47:1) 서서(시 134:1) 손뼉 치면서(시 47:1) 춤을 추면서(시 150:4, 롬 15:20) 몸으로(시 134:2)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시 150:3-5)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날까지 한국의 전통적인 예배는 너무나 엄숙하고 경직된 상태에서 드려졌습니다. 구원(소테리아)이란 단어는 위험이나 임박한 죽음에서 구출될 때 사용되어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가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예배는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만 드릴 수 없습니다.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를 깨달은 성도는 온 몸을 가지고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해야 합니다. 찬양이 살아 있을 때 성도가 한층 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실감할 수 있으며 성령님께서 내 심령에서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설 교 > 각종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제를 해결받자   (0) 2009.01.26
네 이름값을 했느냐   (0) 2009.01.26
신앙 마라톤  (0) 2009.01.26
우리를 언제나 놀라게 하신 하나님   (0) 2009.01.26
말씀으로 돌아가자  (0) 2009.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