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암5:4~15) |
최요한 목사(남서울비전교회) |
성품의 변화 수반된 올바른 예배가 기본돼야
▲ 최요한 목사 |
메츠라는 유명한 독일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메츠가 군대에 있을 때 2차 대전이 일어나 연합군과 싸우다 포로로 잡혀 3년간 영국에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을로 돌아왔는데 동네에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거기서 날마다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중에는 같은 교회 출석하던 교인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날마다 사람을 태우는 연기가 굴뚝에서 피어 올라가도 교회가 모른 척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라”고 늘 가르쳤던 메츠의 아버지나 그가 다녔던 교회 목사님과 모든 교인들이 그 포로수용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교회에서 3년간 신앙생활을 태연하게 했습니다. 무죄한 인간이 죽어가는 국가적인 범죄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면서 정의를 외쳐야 하는데도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메츠가 이렇게 절규를 합니다. “이웃의 죽음을 외면한 채 자신의 영혼의 구원만 추구하는 것은 악마적이다.” 이웃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없이 자기 영혼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 당시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는데, 세상적으로는 굉장히 유능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대단히 부요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는 우상숭배가 가득했고, 사치와 억압, 인신매매가 극성이었습니다. 부자와 권세 있는 자들의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와 학대가 극심했습니다.
아모스는 그런 불의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준엄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바른 예배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을 하는데, 그들이 왜 갑자기 망하게 됩니까? 예배를 안 드렸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배드리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종교의식을 행하는 자리까지는 나아갔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우상을 섬기고 성품의 변화가 없이 자기 욕심으로 가득찬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오는 것과 하나님 만나는 것을 같은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에 가서 예배드리고 절기를 잘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바른 예배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신앙이 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멀리 유다 땅인 브엘세바까지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모스 선지자는 그것이 바른 예배가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나 죄악된 마음을 품은 채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른 예배는 변화를 수반합니다. 예배를 드리고도 변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바른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삶의 모습이 불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정의를 외치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죄악이 만연한 심각한 상황임에도 지혜자가 잠잠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가 침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쪽 유다의 드고아 땅에 살던 아모스를 들어 정의를 외치게 했던 것입니다.
아모스서를 설교했던 칼빈의 말이 있습니다. “아모스는 삼키기 힘든 쓴 약이다.” 아모스 내용 자체가 정말 삼키기 힘든 강한 쓴맛이 나는 약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삼켜서 들어야 될 말씀입니다. 교회는 선지자적인 사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1900년대 초에 야소교 신자들이 부정과 비리에 대해 계속 탄원하는 바람에 평양의 사또 두 명이 임지에서 쫓겨나고 세 번째 부임해야 할 사또가 평양에 가기를 거부하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왜 상소를 올렸냐면 야소교 신자 두 명이 불의한 일만 보면 정의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정의로운 비판자가 되고, 불의에 대한 감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정의로운 사회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셋째,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고대 성문에서 행해지는 중요한 역할이 있는데, 재판정의 역할입니다. 민사나 형사에 관한 사건들을 다루고 판결했습니다(신 21:18~21; 22:13~21, 23~27; 룻 4:1~11; 욥 5:4; 31:21). 성문에서 재판한 이유가 있습니다. 출입이 잦은 곳이니까 뇌물을 주거나 재판을 굽게 할 수 있는 여지가 다른 곳에 비해서 적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성문에서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는 겁니다. 권력자들이 자신의 입맛대로 판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문에서부터 공의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공의를 행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엡 2:10).
설교노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 중심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데 실패했습니다.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성품의 변화가 수반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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