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 각종 설교 모음

평화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

미션(cmc) 2009. 1. 27. 09:29

[우리시대의 설교] 평화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눅 9:46~50)
최현범 목사(부산중앙교회)

예수님 눈으로 바라봅시다

작은 자 귀하게 여기고 모든 사람을 동역자로

   
   
2006년 한 대기업의 대리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가를 설문조사 했다. 그 결과 첫 번째는 업무량이나 실적에 대한 압박이 아니라, ‘조직 내 인간관계 갈등’이었다. 어디 그것이 직장에서 뿐이겠는가?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사람이 함께 모여서 사는 곳에서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바른 신앙은 인간관계에도 변화를 가져다줘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은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관계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요구된다. 오늘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이 부분에 교훈을 얻도록 하자.

첫째로, 작은 자를 귀하게 보는 눈이다.

“누가 크냐”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이것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누가 더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느냐? 누가 더 지도자로 인정을 받는가? 이것이 중요한 관심거리이다. 그리고 크다고 여겨지는 자는 환영 받고 따르는 자도 많다.

제자들에게도 항상 이런 긴장이 있었다. “우리 중에 누가 크냐” 그리고 이런 시각이 갈등의 원인이었다. 주님은 이것을 아시고 자기 곁에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시고, 이가 가장 큰 자라고 가르치신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세상의 잣대와는 전혀 다른 잣대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 시각의 변화야말로 평화의 열쇠다. 소위 겉으로 드러나는 힘과 권력을 좇아 움직이는 해바라기들이 모인 곳에서는 평화가 어렵다. 경쟁과 질시, 분열과 다툼, 우월감과 열등감이 혼재한다. 이것을 치유하는 길은 예수님의 눈을 갖는 것이다.

예수회 사제면서 예일대와 하버드대 교수였던 헨리 나우만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정신지체아들을 돌보는 라르쉬공동체의 목회자로 갔다. 그가 만난 이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전혀 살수 없는 중증지체장애인인 아담이었다. 이 둘 중 누가 선생이고, 누가 큰 자인가? 참 ‘뻔한’ 질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뻔하게 여겨지는 보편적인 사고의 틀을 깼을 때, 나우만은 놀라운 내적 치유와 변화를 경험했다.

나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 나보다 가진 것과 배운 것이 적은 사람, 나보다 어리고, 미숙하고 연약한 사람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데서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과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이 마법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평화가 있고, 진정한 섬김의 사랑이 넘칠 것이다.

둘째로, 모든 사람을 동역자로 볼 수 있는 시각이다.

루 윌리스가 쓴 벤허를 보면, 유다의 귀족 벤허와 그의 소꿉친구면서 총독의 사령관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온 멧살라가 감격적으로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로마의 통치를 반대하는 무리를 색출하고자 했던 멧살라는 벤허에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를 강요한다. 자신의 친구로서 로마의 편에 서서 반역도 색출을 협조하든지, 아니면 적이 되든지 중간지대는 없다. 멧살라는 세상을 아군과 적군으로 이분법화하는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가장 좋은 친구를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요한이 바로 그러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당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귀신을 쫓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예수의 뒤를 좇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 따르지 않음을 인해서 이것을 금하였다. 요한의 시각은 나처럼 하지 않는 사람은 내 편이 될 수 없다는 시각이었다.

우리는 이처럼 편을 가르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에 갇혀, 조금이라도 내편이 되어주거나 나와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의 영역에서 몰아내는 우를 범하기 쉽다. 이런 시각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등을 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과 끼리끼리 어울리는 습성을 갖게 되고 이것은 공동체내에서 분열과 분쟁을 야기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요한과 정반대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50절) 예수님의 시각은 나를 대놓고 대적하지 않는 사람은 다 나를 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떤가? 이 예수님의 시각을 가져보자! 그러면 내 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와 단 40%만 생각이 맞아도 다 나를 위하는 자이다. 내 편이다. 나와 기질과 생각이 많이 다른 사람도 따지고 보면 다 내 편이다. 교회 안에서 내편이 아닌 자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달라야 얼마나 다르겠는가? 몇 퍼센트 다르겠는가? 만일 우리가 주님의 안경을 쓴다면 교회에 다툼과 분쟁이 생길 이유가 없다. 꽁한 마음으로 원수시하고 내 삶에서 몰아내고 내어 쫓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혈연, 지연, 학연, 게다기 극한 이념의 갈등으로 이리저리 나눠지고 갈라지고 있다. 함께 할 수 없는 적이 많은 사회이다.

먼저 주의 제자된 우리들이 마음을 넓히자! 요한의 안경을 벗고 예수님의 안경을 쓰자! 그래서 먼저 교회에서부터 참 평화의 공동체를 실현하자. 그리고 나아가 이 사회를 평화의 공동체로 세워나가는 자들이 되자.  

설교노트
공동체에는 평화가 필요합니다. 평화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힘이나 영향력을 좇아서는 안됩니다. 작은 자를 귀하게 보고, 모든 사람을 동역자로 여겼던 예수님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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