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그리스도인의 변화(갈 1:15-18)

미션(cmc) 2009. 5. 2. 16:00

그리스도인의 변화 

(갈 1:15-18)


 

(갈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 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갈 1: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지난겨울 눈이 내렸을 때에도 한번 다녀 온 적이 있었는데  며칠 전 이른 아침 새벽 기도를 마치고 가까운 방화수류정을 갔을 때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친 이른 아침 시간인데도 여러 사람들이 이미 좋은 자리에 삼각대를 바쳐 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사진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붉은 철쭉이 화사하게 피어있고 호수에 반영된 영화루를 사진에 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마니아들이 모여 온 것입니다.
 며칠 동안 봄바람이 심하게 불다가 그 날 아침 날이 개었던 것입니다. 사람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타지에서 육년 째 온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엿새 째 진을 치고 있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아들까지 데리고 대전에서 올라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새봄을 맞이하여 아름답게 변화된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시간이 흘러 갈수록 아름답게 변화하지만, 생명력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아무리 오래 세월이 흘러가도 믿음에 성장과 변화가 없고 오히려 퇴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아름답게 변화되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변질되어가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어떻게 해야 나의 믿음도 새봄을 맞이한 꽃처럼 아름답게 변화 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변화되기 전의 바울-핍박자 바울
  오늘 성경 말씀의 주인공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 과거의 모습을 돌이켜 보게 되면  바울과 같은 사람은 예수를 믿을 것이라는 신뢰가 전혀 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과거에 바울은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하나님을 믿던 유대교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오로지 유대교만이 유일하고 참된 종교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유대교에 장애가 되는 것은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지상에서 발을 못 붙이도록 박멸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탄압하는 일을 과업을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갈 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여기서 ‘심히’ 라는 말은 지나치게 했다는 뜻이며, ‘박해’라는 말은 사냥개처럼 그리스도인들을 추적하여 못살게 굴었음을 뜻하며,‘멸하고’라는 말은 전쟁터에서 적을 섬멸할 때 사용하는 말로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그와 같은 기독교 핍박의 원인은 기독교 때문에 무슨 불이익을 당한 사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가 믿고 있는 유대교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 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여기서 ‘연갑자’는 동년배라는 뜻이며, ‘지나치게’라는 말은 점점 나아간다는 뜻이며 ‘더욱 열심이’ 라는 말은 열광적이라는 뜻으로 바울이 자기 또래의 사람들 가운데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유대교를 광신적으로 믿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사도들만 남고 평신도들은 다 떠남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문을 닫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행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서 죽임 당한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의 충성스런 스데반 집사를 가리키며, ‘흩어진다(diaspeivrw)’는 말은 여기서 농부가 씨를 두루 두루 흩어 뿌릴 때 사용하는 말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로 말미암아 동서 사방으로 흩어졌음을 뜻합니다.
 핍박을 피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복을 받아 평안히 살지는 못할지언정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고 고향 친척을 떠나 나그네 신세가 될지라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 다메섹으로 사마리아로 소아시아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자 바울은 예루살렘가 문을 닫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마치 피 맛을 본 이리처럼 흩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하기 위해 다메섹에까지 쫓아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 바울을 누가 전도하고 설득하여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스스로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더구나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다고 하는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 같은 핍박자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됨은 물론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구원의 서정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눅 18: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탄압하도록 내버려 두셨으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핍박으로 인해 처자식과 집을 포기하고 떠나는데도 그냥 보고만 계셨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님이 보고만 계시거나 수수방관만 하고 계신 것이 아니었음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 택하신 하나님
(갈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여기서 ‘택정하시고’ 라는 말은 따로 분리한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바울을 모태에서부터 사도로 쓰시기 위해 이미 구별하여 놓으셨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바울만이 아니라 세상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모태에서부터 구별하시고 택하시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증거는 자신의 언행심사를 돌이켜 보면 나 같은 것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스스로도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러한 나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은 내가 선악 간에 무슨 일을 하기 전 모태에서 구별하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며 더욱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정반대로 나의 주변에 가족이나 이웃 중에 내가 볼 때는 변화되기 전의 바울처럼 도저히 예수를 믿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너무 빨리 정죄하거나 버리지 말고 행여나 그 사람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택하셨으나 아직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음을 깨닫고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행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2) 부르신 하나님
(갈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여기서 ‘은혜’라는 말은 아무런 공로가 없는 자에게 값을 받지 않으시고 주신 고귀한 선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한 ‘부르신’이라는 말은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의 이름을 부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잔치에 초대하거나  법정에서 이름을 불러 일으켜 세울 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모태로부터 택하셨으나 바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주님을 핍박하는 어리석은 일을 범하며 살았으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바울을 버리지 않으시고 때가 되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으니 은혜 중에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때가 제 각기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일찍 교회를 나오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바울처럼 뒤늦게 부르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은혜를 체험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지 구원의 서정이 그 유명한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 나타내신 하나님
(갈 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나타내시기를’이라는 말은 계시라는 말로 덮개를 벗기다. 드러내다, 나타내다 는 뜻입니다.
 바울을 모태에서 택정하신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바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행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바울은 자기에게 나타내신 주님을 본 후에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생명을 걸고 해야 할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깨닫지 못한 채 살아왔으나, 이후에는 예수님이 누구이며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영적인 거듭남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과거 자신처럼 영적 어두움 속에 길을 헤매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주는 이방인의 사도라는 빛이 되게 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행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3. 변화된 바울-아라비아 훈련
  사도는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로 택하시고 부르시고 삼년 동안 훈련시키시고 전도자로 파송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자신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불러 주셨으나 열두 사도의 반열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그래서 갈라디아 교회들에 침투한 이단자들은 이를 빌미로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여 결과적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무력하게 만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자신이 열두 사도와 동등한 사도임을 입증하여 믿게 해 줄 필요성이 있음을 깨닫고 다메섹에 주님을 경험한 사건을 중심으로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음을 오늘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전한 복음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계시하여 주신 것이라고 오늘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님에게 배울 기회가 없었는데 언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는지 의문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해 주는 증거가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 나와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는 말씀입니다.
(갈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여기서 ‘아라비아’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바울이 주님을 만난 것만으로 복음을 전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한 것이 많음을 깨닫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아라비아 라는 사막지대에 가서 주님께 직접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후 바울이 제일 먼저 간 곳은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자신이 주님을 만났던 다메섹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난후 비로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 보름동안 교제하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전하는 사도가 된 것을 검증받게 된 것입니다. 
(갈 1: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여기서 ‘방문하려고’라는 말은 탐구하다, 조사하다, 증거하다, 방문하여 지식을 얻다 라는 뜻으로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예수님께 친히 택하심과 부르심과 세우심을 받은 이방인의 사도가 아니라면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 보름 동안 교제하기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점을 강하게 강조하였습니다.
 (갈 1: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그 후 바울은 갈라디아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반응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바울의 얼굴을 처음 본 사람들이지만 소문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인물이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막상 바울을 만나 전해주는 복음을 들었을 때 바울에게서 너무나 많이 달라진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갈 1: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갈 1: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갈 1: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전’에라는 말과‘지금’이라는 말입니다. 변화는 전과 지금이 다른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지금 전한다’는 말은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 전함을 가리키며, ‘듣고’라는 말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경청하다, 주의하다, 들어서 깨닫다 는 뜻으로 현해 진행형의 동분사로 사람들이 계속해서 듣는 것을 뜻합니다.
 ‘전에는’  바울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멸하는 선봉장이었으나, 지금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봉장이 되었으니 너무나 확실한 변화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전에 입 소문만으로만 들었던 바울이 변화되어 복음 전하는 것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아니고는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갈 1: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바울만이 아니라 오늘 나를 지으시고 예수를 믿게 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시고 교회를 다니게 하시고 예배에 참석하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도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고전 6:20, 개정)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물론 성경을 보면 여러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무엇을 하든지 먼저 믿음으로 해야만 합니다(롬 4:20).
 둘째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을 보여야만 합니다(벧전 2:12).
 셋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롬 15:6).
 넷째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여야 합니다(빌 2:11).
 다섯째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물론 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그렇게 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몰라서일까요? 아닙니다. 알면서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울처럼 어제와 오늘이 분명히 다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바울처럼 변화된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본 받지’라는 말은 같은 모양이 되는 것이라면 ‘변화를 받아’라는 말은 다른 모양으로 바꾸다는 뜻으로,  둘 다 현재형으로 지금 그렇게 해야 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첫째 예수를 믿는다고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무엇보다 세속화를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실을 고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서 내면에 새로운 변화와 결단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내가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되지 하는 새로운 결단 말입니다.
 셋째 변화를 받으라는 말은 내가 주체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변하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변화를 아라비아에서 가서 체험을 한 것입니다.
 넷째 내가 어떻게 하면 나의 마음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실천하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섯째 그렇게 변화된 마음과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나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처럼 변화를 받지 않고서는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변화를 받으라’는 말은 수동태로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으혜로 되어 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나를 변화시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아라비아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 잘못된 옛사람과 잘못된 습관과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버리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아라비아가 어디일까요? 무엇일까요? 주님이 내게 허락하신 고난이요, 주님의 피흘려 값주고 세우신 몸된 교회에 나와서 받는 은혜입니다.
 우리도 아라비아에서 바울처럼 성령의 도우심으로 옛사람을 못 박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물론 언행심사 전인격까지 새롭게 변화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