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그리스도인의 효도(창 45:3-4)

미션(cmc) 2009. 5. 13. 07:28

그리스도인의 효도

(창 45:3-4)


 

(창 45:3,4)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오늘은 가정의 달 5월 둘째 주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 주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의미를 다 잘 알고, 부모에게 안부전화도 하고, 카네이션과, 용돈과 선물도 드리지만, 문제는 그 날 하루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부모를 잊고 오로지 자신과 자식만을 위해 열심히 사는 불효자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월이 갈수록 그 같은 일이 보편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불효자라는 생각조차 갖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조차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다른 종교가 믿는 신과 차별화된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효도도 차별화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여러 나라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하신 하나님은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율법과 효도를 명시하는 십계명과 제사 법도를 구별하여 지키게 하심으로 이방인들과 차별화하신 일입니다.
 여기서 ‘차별화’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경전이 다르고, 교리가 다르고, 예식이 다른 것만이 아니라 삶이 불신자나 타종교를 믿는 사람과 질적으로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벧전 1: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나 타 종교인들과 차별화된 효도가 어떤 것인지 오늘 성경의 ‘요셉’을 통해서 효도의 모델을 찾고자 합니다. 

 

 1. 요셉의 어린 시절
 창세기를 살펴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 네 명의 아내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의 조상인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이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리게 된 동기가 야곱의 바람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서부터 한 여인 라헬만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자손의 번성을 실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지만 야곱의 열두 아들간의 갈등이 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라헬의 몸에서 태어난 요셉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 아닌 머슴이 되어  칠년을 보냈지만 라반에게 속아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포기하지 않고 라헬을 얻기 위해 라반의 요구대로 또다시 칠년을 머슴 노릇하면서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또 칠년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창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여기서 ‘라반을 섬겼으나’라는 말의 어근은 아랍어로 ‘노예로 삼다’라는 말로 라헬에 대한 야곱의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랑에 눈이 멀게 되면 아무리 많은 시간과 돈과 수고가 들어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게 됩니다. 비단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똑같이 시간과 물질이나 수고를 드리면 드릴수록 아깝지 않고 도리어 즐겁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레아 보다 라헬을 더욱 사랑하였으나 레아보다 라헬이 늦게 두 아들을 낳았는데 열한 번째 아들 요셉과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라헬이 죽는 불행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 때문에 야곱은 요셉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는 요셉은 그의 이복형들에게 미움과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형제들의 잘못을 고자질하였기 때문입니다.
(창 37: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야곱은 요셉에게만 다양한 색깔을 띤 세마포로 옷을 만들어 입혔는데 그러한 옷은 왕자들이나 귀족들이 입는 호사스러운 옷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야곱이 요셉에 대한 유별난 사랑의 표시로 야곱이 그렇게 할수록 요셉은 이복형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창 37:3,4)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요셉은 그의 형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야곱이 요셉에게 그의 형들이 양을 치는 곳을 돌아보고 야곱에게 돌아와서 보고하게 하는 심부름을 시켰을 때 기꺼이 순종하여 형들이 양을 치는 세겜 땅으로 찾아갔습니다.
(창 37: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여기서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라는 말은 미완료 동사로 요셉이 항상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있음을 뜻하며 ‘그리하겠나이다’라는 말은 감탄사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형들을 찾아갔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복형들은 요셉을 미워하다 못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요셉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처음에 요셉의 형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특별히 입혀준 채색 옷을 벗기고 산채로 구덩이에 던져 넣어 거기서 굶어 죽게 하려고 하다가 노예상인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올 때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발라 마치 맹수에게 물려죽은 것처럼 위장하여 아버지를 속임으로 야곱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요셉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며 천하에 불효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형제지간이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미워할 수는 있지만 어찌 그처럼 악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성품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 9: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편애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신 하나님을 가르치고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는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결국은 야곱의 아들들처럼 형제들 간에 시기하고 반목하고, 돈 때문에 미워하고 죽이는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패역한 이 시대가 종교 편향이라는 구실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윤리 도덕을 매장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2.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질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계명에 순종하여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보호하시고 결과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선행을 한 것처럼 땅에서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릴 것이라고 신구약 성경에서 동일하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 5: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엡 6:2, 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그렇다면 부모에게 순종하다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 고난받는 요셉
 요셉이 팔려간 곳은 바로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당시 근동 지방에 최강국인 이집트 제국으로 바로 왕의 신변을 지키는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간 것입니다.
 음란한 보디발의 아내가 용모가 준수한 요셉을 날마다 유혹하는 것을 요셉이 거절하였다가 여주인을 성폭행하려고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대궐 안에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팔릴 때처럼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범사에 형통케 되는 복을 받았으며 또한 간수장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임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창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만약 요셉이 어려서부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을까요? 아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지 않았다면 요셉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시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양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인내하는 요셉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만사가 불통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요셉이 아무리 성실한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감옥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감옥에 들어온 떡 관원장장과 술관원장의 꿈을 해몽하여 줌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왕에게 탄원해 주기를 부탁하였을 때 염려 말라고 큰 소리쳤던 술 관원장으로부터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언제 감옥에서 풀려 나갈지 아무런 기약이 없이 무작정 감옥살이만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독방생활을 칠년 이상 하게 되면 정신병자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요셉은 아무런 소망이 없이 그 후로 이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송세월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요셉에게 최상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시는 기간이었습니다.
  바로 왕은 무슨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몽할 사람이 없게 되자 감옥에 묻혀 있던 요셉을 찾게 되었고 그 때문에 요셉은 애굽의 바로 왕의 총애를 받는 국무총리가 되어 바로 왕 다음가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감옥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낸 세월은 오히려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는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그러므로 요셉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데도 어려움이 계속된다면 낙심할 것이 아니라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해야 됩니다.

 3) 부친의 안부를 걱정한 요셉
 바로왕의 꿈을 해석한 요셉은 애굽에 계속될 칠년 풍년동안 양식을 비축했다고 칠년간의 흉년이 찾아왔을 때 돈과 땅을 잡고 양식을 팔아 애굽 왕국을 더욱 부요하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애굽은 물론 야곱의 가족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까지 칠년간 계속되는 흉년으로 양식이 소진이 되었으며 바로의 궁궐에 가면 양식을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요셉을 미워하고 죽이려 하고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던 원수같은 요셉의 이복 형들도 양식을 구하려고 요셉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단번에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요셉은 만감이 교차되어 통곡을 하였으며, 요셉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자기를 팔아버린 형들에게 원수 갚는 일이 아니라 제일 먼저 그의 부친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창 45:2,3)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여기서 ‘그 형들에게 이르되’라는 말은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계속하여 묻는 것을 뜻하는 말로 요셉이 얼마나 야곱을 잊지 못하고 있는지 요셉의 효심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입니다.
 또한 요셉은 야곱을 가리켜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고 ‘내 아버지께서’라고 말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셉은 얼마든지 그의 형들에게 복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두 가지 이유는 첫째 하나님이 오히려 그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되도록 전화위복하셨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의 이복형들도 자기가 사랑하는 아버지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한다면 가장 괴로워할 사람은 아버지 야곱이라는 사실을 요셉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부모에게만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형제지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할 차별화된 효도입니다.

 

 3. 야곱 사후에 요셉
 요셉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고 마치 짐승처럼 팔아치운 형들에 대한 미움이 요셉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어찌 마음에서 깨끗하게 지워질 수가 있겠습니까?
 단단한 비석에 새긴 글은 세월이 지나면 풍상에 지워지지만, 부드러운 인간의 마음에 새긴 사랑이나 미움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더 또렷해지는 것입니다.
 결코 요셉도 인간이라면 형들을 볼 때마다 불끈 불끈 생각이 나서 참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부친 야곱을 애굽으로 초청할 때 그의 형들과 가족들까지 함께 초청하여 애굽에서 가장 기름진 고센 땅에서 흉년에 대한 염려 없이 풍요롭게 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창 46:27)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야곱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말년을 흉년에 대한 두려움 없이 고센 땅에서 십칠 년 동안 평안한 여생을 보냈지만 야곱의 마음속에 서너 가지 염려가 늘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1) 자기가 죽은 후에 자신이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에 묻혀야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애굽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큰 부담이었습니다.
 2) 자기 생전에는 요셉이 형들에게 아무런 해코지를 하지 않지만 만일 자기가 죽은 후에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3) 자신의 후손들이 현재 살고 있는 애굽은 영원한 본향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기 때문에 때가 되면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데 후손들이 그것을 잊어버리고 애굽에 머물러 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창 48: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물론 요셉이 야곱이 살아있을 때는 야곱에게 효도하고 있지만 만일 야곱이 죽은 후에는 그 염려했던 일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야곱의 생전에는 물론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야곱이 남긴 유훈을 빠짐없이 다 이행하여 변함없는 효도를 실천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차별화된 효도가 어떤 것인지를 본보여 주었습니다.
 1) 요셉은 부친 야곱의 시신을 사십일 동안에 걸쳐 향으로 처리한 후 친히 가나안 땅으로 운구하여 조상들이 묻힌 무덤에 야곱의 시신을 매장하는 효도를 하였습니다.
(창 50: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2) 야곱을 장례한 후 요셉이 혹시 복수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형들이 요셉에게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였을 때 요셉은 형들은 물론 조카들의 미래까지 보장하여 줄 것을 약속하여 야곱의 생전의 염려를 불식함으로 효도를 하였습니다.
(창 50: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여기서 ‘기르리이다’라는 말은 책임지고 계속해서 부양하겠다는 미완료 동사이고, ‘간곡한 말’이란 입으로만 하는 빈말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나오는 마음을 담은 진실된 말로 계속해서 위로 했다는 와우 계속법 미완료 형입니다. 이는 요셉이 그의  형들에 대한 진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후로 요셉의 형들은 마음의 불안에서 완전히 해방을 얻었을 것입니다.
 3) 요셉이 애굽에서 그 약속을 지키며 형들과 더불어 백 십세를 살다가 나이 많아 죽게 되었을 때, 요셉도 야곱처럼 똑같은 당부를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창 50:24, 25)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이는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라는 권세를 누렸으나 애굽 땅이 영원한 본향이 아니기 때문에 애굽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만이 영원한 본향이므로 그곳에 야곱처럼 묻히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효자 요셉에게 어떤 축복들을 베푸셨습니까? 장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이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창 48: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야곱과 요셉이 소원한 대로 그의 후손이 때가 되어 육십만 대군이 되어 출애굽을 한 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자기를 낳아 주신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아름답고 위대한 마음입니다. 
  구약 시대는 부모에게 불효하는 죄를 가장 큰 죄로 여기고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을 엄히 다스리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신 21:18-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성경에는 말세의 징조를 여러 가지로 가르치는 가운데 하나가 말세에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불효하는 자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딤후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현실은 어떻습니까? 보험금을 타기 위해 부모를 살해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여러 자식들이 부모가 늙었다고 서로 모시지 않겠다고 외면함으로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부모가 병들어 고통을 당하는데도 병원에 모시지 않고 외면하는 몰인정한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식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지 모릅니다. 성경은 심은 대로 거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그와 같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역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효가 판을 치고 보편화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요셉처럼 어려서나, 자라서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라도 변함없이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출 20:12)“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잠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여기서 공경하라(무겁다, 힘겹다, 짐이 되다, 존경하다, 영화롭다, 존귀하다)는 똑같은 단어로 두 분을 똑같이 공경하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공경하는 사람은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도 공경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은 실상인즉 육신의 부모도 섬길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교훈은 우리들이 육의 아버지를 섬겨야 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의 아버지를 섬기게 하시려는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효자 요셉이 그러한 복을 받은 모델입니다.
(신 5: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말세에 사람들이 다 불효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만은 요셉처럼 어려서나, 부모 생전이나, 사후를 막론하고 변함없는 효도를 본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몰락되어가는 윤리 도덕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부모 생전에 부모가 원치 않는 일을 하지 말고, 노후에 염려 없이 준비하고, 사후에 생전에 원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요셉과 같은 효도 실천의 삶이 차별화된 그리스도인의 효도요, 하나님께 복 받는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