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여호와께 드린 어린이(삼상 1:27-28)

미션(cmc) 2009. 5. 8. 07:19

여호와께 드린 어린이

 (삼상 1:27-28)


 

(삼상 1: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삼상 1: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에 따라 어른이 된 후에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1) 이를 테면 어린 시절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게 되면 성인이 된 후에도 경험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줄줄도, 받을 줄도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람 속에서 자란 아이는 비난을 배우고, 적개심 속에서 자란 아이는 싸우는 것을 배우고, 비웃음 속에서 자란 아이는 부끄러움을 배우고, 수치심 속에서 자란 아이는 죄의식을 배운다." - 도로시 로-
 2) 정반대로 어린 시절에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어린이는 어른이 된 후에도 사랑을 대물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관대함 속에서 자란 아이는 신뢰를 배우고, 격려 속에서 자란 아이는 고마움을 배우고, 공평함 속에서 자란 아이는 정의를 배우며, 보호 속에서 자란 아이는 믿음을 배우며, 안정 속에서 자란 아이는 자기애를 배우고, 받아들임과 우정 속에서 자란 아이는 사랑을 배운다."  - 도로시 로-
 3)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신앙의 영향력을 좋게 받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면 누가 더 자녀들에게 좋은 신앙을 대물림 할 수 있을까여?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녀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하며, 어떻게 신앙교육을 시켜야 하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 기도하는 어머니
 오늘 성경은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일부다처주의가 죄의식 없이 보편화되던 시절 에브라임 땅에 사는 엘가나에게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삼상 1: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물론 하나님께서 브닌나가 한나보다 행실이 착하고, 믿음이 좋고,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주셨으나 한나는 브닌나보다 더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은 브닌나는 마치 자기가 의롭고 아이를 낳지 못한 한나는 죄인인 것처럼 괴롭혔습니다.
(삼상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여기서 ‘심히’라는 말은 속상하게 하고, 노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이며, ‘격분하게’라는 말은 화내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며,‘괴롭게’라는 말은 천둥치듯 큰 소리를 낸다는 뜻으로 브닌나가 얼마나 괴롭혔는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한나의 ‘태문을 잠그셨다’는 완료형입니다.
 이는 한나가 임신하지 못하게 된 근본 원인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한나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한나를 임신하게 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임신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엘가나가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릴 때마다 브닌나와 한나를 동행하여 매년 올라갈 때마다 한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삼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여기서 ‘괴로워서(rr'm)’라는 말은 쓰다, 쓰라리다, 괴롭다, 비통하다는 뜻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상황에서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의 반응을 표현한 말입니다. 이는 한나가 얼마나 괴로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는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1) 한나는 그럴 때마다 세상 여인들이 흔히 찾는 것처럼 독주를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2) 한나는 브닌나에게 괴롭힘을 받을 때 독설을 퍼붓는 대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3) 한나는 마음 아플 때 사람들에게 눈물을 보이는 대신 하나님께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브닌나는 이미 하나님께 아들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한나를 동정하는 대신 못살게 굴었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는 대신 한나를 괴롭히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한 집안에 살면서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둘러보게 되면 브닌나와 한나와 같은 두 종류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울 때 술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답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고,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구한 것은 하나님만은 능히 아들을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처럼 하나님의 전을 찾아가서 간절히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육간에 눈이 어두워진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집에 찾아와서 간절히 기도하는 한나를 마치 술에 취해서 주정하는 것처럼 오해를 하였습니다.
(삼상 1: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삼상 1: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어느 누구보다 많이 받았으면서도 브닌나와 같은 부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한나처럼 괴로움 속에서 슬픔의 나날을 보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누가 더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사람일까요? 물론 한나 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고, 술을 찾습니다.
 말로는 기도한다고 하지만 입만 열면 감사대신에 불평을 늘어놓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믿음 없는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한나처럼 자식을 주시지 않았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으실 것이기 때문에 한나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와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약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그것은 자녀들을 교회에 출석시키는 것이 다가 아니라 기도의 뒷받침이 없이는 성전에서 태어나 자란다고 다가 아니라 엘리의 자녀들처럼 타락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브닌나처럼 사랑스러운 자녀를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면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문
 저의 자식은 이러한 인간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주시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2. 하나님께 바친 아이
 엘리 제사장이 간절히 기도하는 한나를 술취한 여인으로 오해를 할 정도로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진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축복했습니다.
(삼상 1: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한나는 제사장 엘리의 축복을 그대로 믿고 마음의 근심과 걱정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기도를 마친 한나는 하나님께 경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 엘가나와 동침을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한나를 생각하셔서 아들을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삼상 1: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여기서‘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셨다'는 말은  기억하다, 상기하다는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하나님께서 한나가 여호아의 전에서 눈물 흘리며 간절히 기도한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셨다가 아들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사무엘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귀여웠을까요?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요?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나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아들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주셨을 때 하나님과의 약속한 서원을 지킨 신실한 믿음의 어머니였다는 점입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아들을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이 만일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평생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이며, 그 아이를 거룩하게 나실인으로 구별하여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삼상 1:11 상)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는 아이가 점점 자라가는 동안 하나님과의 서원을 지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매년 제사를 드리기 위해 실로에 올라가던 발걸음을 아이가 자라 젖을 뗄때까지 중단하고 오로지 사무엘을 키우기에 전념을 하였습니다.
 남편 엘가나도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한 이야기를 듣고 사무엘이 젖을 뗄 때가 되면  하나님의 전으로 데리고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 동의를 하고 젖을 떼기까지 기다렸습니다.
(삼상 1:23)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그 여자가 그의 아들을 양육하며 그가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외경(마카비후서 7:27)에 의하면 젖을 떼는 나이는 세 살 정도라고 합니다. 가장 엄마와 정이 들어 엄마가 잠시 자리를 뜨려고만 해도 손에 든 장난감을 집어 던지고 울면서 엄마에게 매어 달리는 때가 아닙니까?
 물론 한나가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켜야 하지만 몇 살이라고 나이를 정한 것이 아니라면 철이 들 때까지 좀 더 함께 지낸 후에 군대를 보내는 것처럼 장정이 된 후에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나는 더 이상 정이 들기 전에 더 이상 세속에 물들기 전에 젖을 떼게 되었을 때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풍성한 제물을 준비하여 사무엘 데리고 하나님의 전으로 올라가서 기도했던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삼상 1: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삼상 1: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그것도 마지못해서 사무엘을 바친 것이 아니라 처음 서원할 때의 마음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원하는 심정으로 기쁘게 사무엘의 일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받쳤습니다.
(삼상 2: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한나에게 응답하신 하나님도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한나의 믿음도 신실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은혜이지만 구원을 얻은 사람은 구원받은 자 다운 삶을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도 한나처럼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응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왜 나같은 것의 기도에 응답을 해 주셨는지 그 이유를 깨달아 한나처럼 신실한 마음으로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딛 2:10)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뿐만 아니라 평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중에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각자 나름대로 하나님께 서원하고 약속하고 다짐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고 지키는 사람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시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3. 하나님이 복 주신 아이
  하나님께서 한나로 하여금 아들을 낳기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께 바치게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한나가 실로에 올라가 엘리 제사장에게 어린 사무엘을 일평생 하나님께 바쳤을 때 엘리 제사장에게 아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아들을 낳아 바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바친 아이를 원하셨고, 하나님이 귀하게 쓰실 아이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상 2:11)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여기서 ‘섬기니라’는 말씀은 일상적으로 종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위해 특별히 섬기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물론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장직을 자동적으로 승계를 하는 시대였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일을 위해 섬기는 일에 부적합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삼상 2: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삼상 2: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삼상 2: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여기서 행실이 나쁘다는 말은 비록 제사장의 아들이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있지만 백해무익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놀랍게도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하였는데 이는 엘리의 아들들이 여호와 집에서 태어나 살면서 여호와가 어떤 분이고, 제사가 무엇인지 배울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무관심하고 불신앙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입니다.
(삼상 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태어나, 성전 안에서 자란 엘리의 아들들을 쓰시지 않고 한나가 하나님께 바친 사무엘을 거룩하게 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바친 한나에게는 사무엘 대신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고, 하나님께 바친 사무엘은 한나가 키운 것보다 더 건강하고, 지혜롭고, 믿음으로 잘 자라게 하셨습니다.
(삼상 2:21)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여기서 ‘임신하여, 낳게 하셨고’ 라는 말은 미완료 동사로 계속해서 생산할 수 있게 하신 것을 뜻합니다.
 또한 ‘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가운데서 성장하다, 크게 되다, 강해지다, 찬양하다 는 와우 계속법 미완료 형입니다.
 그 결과 사무엘은 마치 예수님이 자라시던 어린 모습처럼 하나님은 물론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받는 아이로 잘 자랐습니다. 
 (삼상 2: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무엘이 단번에 자란 것이 아니라 ‘점점 자랐다’는 것입니다. ‘은총을 더욱 받더라’는  육체적인 성장만이 아니라 내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이 아울러 보기에 아름다웠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결과 사무엘이 점점 자라면서 하나님에게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나가 사무엘을 양육한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하신 것이 사무엘에게 더 복되게 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계시의 말씀을 엘리나 그의 아들들에게는 침묵하시고, 사무엘을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축복의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삼상 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삼상 3: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반면에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태어나 점점 자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름진 고기를 먹으며 자랐으나 제사장의 직분이 귀한 줄 모르고, 감사한 줄 모르고, 불신앙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 자녀들을 출석시킨다고 다가 아님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삼상 3: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가정의 달 5월 첫 주 어린이 주일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이는 우리의 죽고 사는 것은 물론 우리 가정에 어린아이가 태어나는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에 속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어린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어린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모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소홀히 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을 기회를 놓쳐 버리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귀한 선물인 어린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어린아이의 평생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 종교 편향주의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것만이 우리 아이들이 영원토록 잘 되어지는 길이며, 영육 간에 복을 받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성적을 신앙보다 더 우선하고 교회로 데리고 나오는 일을 소홀히 하는 부모는 오히려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어리석은 부모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태어났어도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았다면, 하물며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세상 교육만으로 자란 아이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무엘처럼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겠습니까?
  1) 아무리 입시교육이 최상 목표가 된 세상일지라도 믿음의 가정에 자녀들만은 주일마다 교회로 데리고 나오는 일을 가장 소중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2)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다가 아님을 깨닫고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서 부단히 말씀과 기도로 훈련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아이가 되게 해야 합니다.
  3)  우리의 자녀들의 미래는 내가 책임 질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며 위대한 일꾼으로 사용하시기를 한나처럼 서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항거할 줄 알게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알며
 패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그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높은 이상을 갖게 하시어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먼저 다스리게 하시며
 내일을 내다보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게 하소서.

 그로 하여 그의 아비된 저도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나직이 속삭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