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까지 씻어주는 교사
(요 13:12-14)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사람의 행동은 두 손과 두 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품은 생각 여하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사람이 무슨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렵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마치 심장이 육체의 중심부인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영혼의 중심부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 마음에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넓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교사를 만나 좋은 가르침으로 마음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어떤 부모와 배우자와 친구와 스승을 만나는가에 따라 행복이 좌우된다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은 가정의 달 5월 셋째 주 스승의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하는 교사주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사가 좋은 교사인지 또한 어떤 교사가 되어야만 행복을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깨닫는 복된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예수님의 가르치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는 자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저마다 보고 느끼는 대로 어떤 사람은 나사렛 예수, 어떤 사람은 목수의 아들, 어떤 사람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지핀자, 어떤 이들은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학벌이 좋고 명문학교를 졸업해야 하고 학위가 있어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법이 탁월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조건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시는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조차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사람들에게 랍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마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 들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종전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보다 질적으로 전혀 다르게 능력 있게 가르치시는 것을 듣고 사람들이 크게 놀랐기 때문입니다.
(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여기서 권위 있는 자와 같고 라는 말은 권세를 소유한 자라는 말의 동분사 현재 능동으로 영어로 말하면 현재 진행형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항상 그와 같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가르치시는 것이 탁월한 교사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를 택하신다면 예수님과 걸맞게 지혜롭고 총명하고 유능한 사람이어야만 예수님과 조화를 이루는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소문난 명문학교에는 유능한 교사들이 있어서 상급학교에 진학률이 높기 때문에 좋은 학군으로 소문이 나서 심지어 지가를 높이기까지 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수준에 맞는 제자를 택하시기 위해 돈과 인재가 다 함께 모여드는 예루살렘이나 도시로 가셔야 되는데 오히려 북쪽 갈릴리 해변을 친히 찾아가셔서 어부들과 길가에서 세금 받는 세리를 제자로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열두 사도들입니다.
(막 3:16-19)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예수님이 친히 택하셨고 삼년 동안 친히 가르치심과 훈련을 받았다면 얼마나 복된 제자들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매우 독특하였습니다.
똑같은 일이지만 실력 있고 유능한 사람은 아주 쉽게 빨리 그러면서도 매끄럽게 일을 하는 반면에 초자는 많은 손질을 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덧칠을 한 것처럼 매끄럽지 못한 차이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차이도 그와 같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무조건 암송시키고 그것이 이해가 되든지 않든지 무조건 문자적으로 지키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성경 말씀을 보다 더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하셨고 그 성경이 가르치는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우치심으로 공감대를 이루어 능동적으로 순종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마 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어떻습니까? 이천 년 전의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라고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는 전혀 거리가 먼 구세대의 가르침입니까? 아니면 전혀 세대 차이가 없는 가르치심입니까? 그러나 듣기는 좋고, 마음에 감동도 받지만 지속적으로 순종하여야만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사랑이나 겸손이나, 온유나, 섬김이나, 용서와 같은 문제는 입으로 잘 가르친다고 쉽게 따라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머리로 이해가 되어져야 하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야하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더불어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야만 가능한 전인적인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히려 위선이 될 수밖에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같은 진리를 입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친히 본을 보이시고 반복하여 훈련시키시고 몸소 체험하여 예수님처럼 실천하게 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성경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2.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예배를 빠짐없이 드리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할지라도 그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고 섬기지 못하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예수님이 책망하신 바리새인들처럼 화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본을 듣고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에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제자들 간에 여러 가지 갈등이 많았습니다.
(눅 22:22-24)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와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눅 22:26)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의 참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고 또한 마음에 감동도 별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예수님께 맡기신 마지막 사명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가 임박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헤어지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겸손과 사랑과 섬김을 가르치시기 위해 제자들과 더불어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오늘 성경 말씀과 같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퍼포먼스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1) 그 근본 동기는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게 되면 더 이상 제자들을 가르치실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고쳐야 할 치명적인 문제점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섬김에 대한 훈련의 부족입니다.
2) 그 방법은 제자들의 발을 예수님이 직접 씻기신 적극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예수님 당시 집에 찾아온 손님의 때 묻은 발을 씻기는 일은 가장 신분이 비천한 노예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섬김이 무엇인가를 친히 본보이신 것입니다.
3) 그 방법은 제자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방법이었습니다.
(요 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이 하시는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예수님이 발을 씻겨 주시는 깊은 의미를 깨닫고는 너무나 감격하여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할 만큼 감동을 받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이 발을 씻기시지 않고 말씀만으로 하셨다면 베드로는 그와 같은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신이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역사 속에 어느 선생님도 예수님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긴 적이 없는 초유의 일을 통해서 당신이 얼마나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분인가를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발을 씻기신 궁극적인 목적은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앞으로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아야 하는데 그 때에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자기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13:13, 14)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발을 씻기신 것처럼 제자들도 단순히 발을 씻기는 행위를 따라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섬김을 본을 따라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섬기는 마음이 없이 발을 씻기는 것은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또 하나의 형식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사주일에 누가 예수님을 닮은 좋은 교사인가?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말씀이고, 제자들을 위해 발을 씻기시는 수고를 하시면서 까지 제자들을 사랑으로 섬기신 예수님의 그 본을 오늘의 교사들도 그대로 닮는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사가 다 될 것입니다.
3. 제자들의 마음을 씻기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이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까지 본보이신 섬김과 겸손이 제자들의 마음에 한순간 큰 감동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얼마 오래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려고 올라갔으나 예수님은 끝까지 깨어 기도하셨으나 제자들은 졸며 자며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체포되자 위기를 느낀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갈릴리로 도망치는 실망스런 제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그러한 예수님께서 삼년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시고 마지막에는 발까지 씻기시면서 까지 가르치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같은 배신을 한 제자들을 버리시거나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주님을 부인하고 갈릴리로 도망쳐 간 제자들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깊은 죄의식이나 좌절감에 사로 잡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제자들이 무엇을 하든지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상처가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상처요,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상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은 무슨 상처를 받은 사람들일까요? 스스로 자기들이 만든 마음의 상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들은 삼년 전으로 주님에게 부름을 받았던 갈릴리 호수에 나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았으나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쓰디쓴 실패를 경험하면서 더 더욱 깊은 죄의식과 좌절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버리시거나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1) 친히 갈릴리로 찾아오셔서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요 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밤새도록 헛수고를 한 제자들에게 많은 고기를 잡게 해주셨습니다.
(요 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3) 밤새 그물질을 하며 수고한 제자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요 21: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4)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으시고 어린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요 21:15)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5)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베드로를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것이 바로 제자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제자들의 때 묻은 발을 씻기셨던 주님이 이제는 때 묻은 제자들의 마음을 씻기시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양을 먹이는 교사로 회복시켜 주신 일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의 실패를 문제 삼으시고 찾아오셔서 따지시고 정죄하셨다면 제자들은 주님을 배신했던 죄책감에 스스로의 의지로는 주님을 따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제자들의 마음의 상처를 씻기시고 싸매시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여 주심으로 수제자가 되게 하시고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는 초석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부활하신 다음 곧 바로 승천하지 않으시고 친히 제자들을 찾아 갈릴리에 가셔서 죄의식과 좌절감에 깊이 빠져 있는 제자들의 발이 아니라 마음을 씻기시는 일을 한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거듭하심으로 병든 마음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마음을 씻기는 스승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어보면 베드로도 그와 같은 예수님을 닮아 제자들을 가르칠 때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며 제자들의 발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씻어주는 좋은 교사가 되었습니다.
(벧전 5:7-11)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누구나 다 무지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전해 주고 누군가가 나의 스승이 되어 믿음이 무엇인지 성경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도 없게 됩니다.
그러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부모와 배우자와 친구와 스승을 만나는 가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좌우되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입니다.
과연 가정과 학교와 교회와 사회에서 좋은 교사가 어떤 교사입니까?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만이 아니라 때 묻은 마음까지 씻어주는 교사입니다. 그러한 교사가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좋은 교사 운동을 벌리고 있는 어느 일선 교사의 이야기
IMF 구제금융 시절보다 더 어렵다는 경제적인 한파의 영향이 학교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학기 초 학비 지원과 급식비 지원 신청을 하기 위한 서류를 제출하는 아이들의 어두운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미어짐을 느낍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여러 가정 사정으로 인해 서류상으로는 학비나 급식비 지원 대상이 아니지만 실제로는 학비나 급식비 지원 대상 아이들보다 더 어려운 형편에 처한 아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비나 급식비 지원은 받지만 기구할 정도로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아이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사의 입장에서 볼 때 학비나 급식비 문제는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고 가난과 돌봄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 학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좌절감에 빠져있는 아이들을 접할 때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때 좋은 교사 선생님들은 학급에 속한 전체 아이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는 가운데, 학교의 생활기록부에 기록되지 않았던, 그리고 아이들이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 각 가정의 형편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주일학교에서는 심방이라고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교사들은 아이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뿐 아니라 아이들을 가슴으로 만나는 경험들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학급의 모든 아이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일은 교사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에 대한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학급에서는 30명 중의 한 명이던 아이들이 각 가정에서는 유일무이한 사랑받는 존재이며, 수업 시간에 잠만 자던 아이들도 자기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발견 못했던 재능을 부모님을 통해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학교의 문턱을 높게만 생각했고, 자녀의 부족함이 부끄러워 교사들에게 자녀의 문제를 놓고 마음껏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했던 부모님들이 가정방문을 통해 교사와 소통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됨을 발견하기도 하였습니다.
가정방문을 통해 파악된 아이들 가운데 경제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에 대해서는 교사가 ‘일대일 결연’을 맺고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일대일 결연 기금>을 조성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능에 대한 관심과 소질을 갖고 있지만 어려운 경제 형편으로 인해 꿈을 펼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시스테마 아카데미’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학교 주변의 지역아동센터, 종교단체 등과 연대해서 효과적인 지원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일반 교사들이 이와 같이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자기 반 아이들을 심방하면서 이와 같이 사랑한다면 아무리 세상이 험악하다고 할지라도 미래의 희망이요 꿈인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서 미래의 좋은 교사가 되어 자기가 교사에게 배운 것처럼 제자의 발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씻어 주는 좋은 교사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사람보다 돈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시대가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가정과 학교와 교회와 세상에서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았고 긍정적으로든지, 부정적으로든지 그들의 영향을 입었습니다.
또한 세월이 지나면 또한 나 자신이 어느 사이에 자식을 가르치는 교사, 교단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교사, 주일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직장과 사회에서 상관이 되고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교사가 되어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지금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면 그것은 어떤 교사에게 좋은 영향을 입었기 때문이고 만일 내 속에 부정적인 자아가 있다면 좋은 교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학교에서 제자들에게, 교회에서 주일학생들에게 사회에서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좋은 교사가 되어야 미래에 민족과 교회와 세계에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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