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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정신력이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한·일 월드컵을 준비하던 2002년 1월 북·중미골드컵이 미국에서 열렸다. 지성이를 포함한 한국 대표팀도 히딩크 감독의 인솔 아래 이 대회에 참가했다.
히딩크 감독은 오른발 아킬레스건을 다쳐 벤치만 지키던 지성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자네는 정신력이 훌륭해. 그런 정신력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 희망을 갖고 열심히 해봐”라고 격려했다. 특별히 주목받고 있지 못한 데다 부상까지 겹친 지성이는 당시 ‘월드컵에서 뛸 수 있을까’라고 자신감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주전들에게만 신경 쓸 줄 알았던 감독이 직접 다가와 들려준 이 한마디에 지성이는 모든 것을 쏟아낼 힘을 얻었다.
맨유 입단 초기 영국 언론들은 지성이의 영입에 대해 ‘맨유가 아시아 시장을 노린 것’이라며 지성이가 ‘티셔츠를 팔러 온 사나이’라고 비꼬았다. 벤치만 달굴 것이라며 ‘벤치성’이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이런 보도를 접한 퍼거슨 감독은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구먼”이라고 받아 넘겼다. 이 말 한마디가 가슴 조리던 지성이의 숨통을 확 틔워 줬다. 맨유에서 초기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다.
#퍼거슨보다 인간적인 히딩크
지성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히딩크가 퍼거슨보다는 더 인간적인 것 같다. 히딩크는 사교성 많은 네덜란드 사람인 반면 퍼거슨은 무뚝뚝한 스코틀랜드인의 전형이다. 예를 든다면 이런 경우다.
PSV 에인트호번에서 뛰던 시절 나이키로부터 후원을 받는 지성이는 에인트호번과 암스테르담 중간에 위치한 나이키 매장에 가서 필요한 물품들을 가져오곤 했다. 한번은 그 매장에서 히딩크 감독과 우연히 마주쳤다.
팀 안에서는 쉽게 친한 척하지 못하던 히딩크 감독은 이날 우리에게 다가와 “여기 있는 물건은 다 가져가도 돼. 훔쳐가도 괜찮아”라고 귀엣말로 농담을 건넸다. 이처럼 히딩크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여전히 장난기 넘치고 잔뜩 애정을 표시한다. 퍼거슨 감독은 우리 집이 있는 윔슬로에 산다. 그가 가끔씩 차를 몰고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만일 동네에서 퍼거슨 감독과 마주친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아마도 ‘음! 자네군. 훈련장에서 보지’하고 지나쳤을 것 같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퍼거슨이다.
#“맨유에서 힘들면 돌아오라”고 했던 히딩크
히딩크가 고마웠던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로 발탁해 줬고, 이후 에인트호번으로 불렀다. 초창기 지성이가 부진한 경기력으로 홈팬들에게 욕을 먹을 때도 끝까지 보호해 줬다. 나중에 맨유로 옮긴 뒤 지성이가 오른쪽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할 때는 러시아 대표팀에서 히딩크를 돕고 있는 아노 필립 물리치료사를 맨체스터로 보내 지성이를 돌보게 했다.
히딩크에게서 크게 감동을 받은 때는 또 있다. 사실 지성이가 에인트호번에서 제 역할을 해낸 것은 나중에 6개월 정도다. 이제 막 제대로 써먹겠다 싶었는데 다른 팀으로 옮기겠다는 지성이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히딩크가 완강하게 보낼 수 없다고 했다면 지성이는 맨유로 가지 못했을 것이다. 어렵게 이적을 승락해 준 히딩크 감독 앞에 애비 입장에서도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미안하고 고마웠다.
2005년 여름 히딩크 감독에게 용기를 내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감독 입장에서는 지성이를 붙들어야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팀으로 가길 바랐다”면서 “혹시 맨유에서 잘 안되면 다시 내게 오라”고 격려해 줬다. 이보다 더 고마울 수가 있을까. 지성이는 맨유에 와서도 종종 히딩크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했다. 하지만 올봄 히딩크 감독이 첼시 감독을 맡아 영국에 오자 축하 문자메시지를 보냈을 뿐 통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라이벌팀의 감독이다 보니 껄끄러웠던 모양이다.
#지성이에게는 한없이 인자한 퍼거슨
지성이가 막 맨유에 입단하던 무렵 구단과 계약을 마친 우리는 캐링턴 연습구장을 찾았다. 퍼거슨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만남이라 잔뜩 긴장했지만 퍼거슨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줬다. 연습구장 곳곳을 직접 소개해 주더니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사무실 안에 걸려 있는 에릭 칸토나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퍼거슨 감독은 사진을 가리키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라고 설명했다. 맨유를 위해 무언가를 보여 달라는 메시지처럼 들렸다.
히딩크 감독의 훈련은 선수들과 함께 볼 뺏기도 하고 장난치면서 즐겁게 진행한다. 물론 맨유 훈련도 활발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일절 볼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멀찌감치 떨어져 팔짱을 끼고 선수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퍼거슨 감독이 불같이 무서운 지도자라는 소리를 듣고 내심 걱정도 많았다. 초창기 때는 훈련을 마치고 오는 지성이에게 “감독에게 혼나지 않았느냐”고 묻기도 했다. 선수들 머리카락이 휘날릴 만큼 독설을 퍼붓는다고 해서 ‘헤어 드라이어’라는 별명이 붙은 퍼거슨이지만 지성이에게만은 예외였다. 지성이가 알아듣기 편하도록 천천히 말해 주고, 항상 격려하고 북돋워 준다. 베컴, 킨, 스콜스는 물론 긱스도 피해갈 수 없었지만 지성이에게만은 항상 인자했다.
#퍼거슨과 히딩크가 결승에서 만났다면
첼시와 바르셀로나가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에서 맞붙을 당시 나는 속으로 첼시를 응원했다. 사실 지성이 입장에서는 히딩크 감독이 결승에 올라온다면 껄끄러울 수도 있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주심 판정 때문에 첼시가 끝내 결승에 오르지 못했을 때는 나도 흥분했다. 결국 첼시가 오르지 못했을 때 ‘히딩크 감독과 지성이는 적으로 만날 운명은 아닌가 보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성이는 지도자 복을 타고났다. 지성이를 혹사시키지 않고 체계적으로 가르쳐준 이학종 수원공고 감독, 모두들 뿌리친 지성이를 대학으로 이끌어준 김희태 전 명지대 감독. 그리고 주위의 혹평에도 지성이를 대표팀에 발탁시켜 준 허정무 감독님까지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이 자리를 빌려 지성이를 지도해 준 지도자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