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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 전에 알았던 엔트리 탈락
결승전 시작 세 시간 전에 모스크바 크라운 플라자 호텔에 머물고 있던 지성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냥 편하게 보세요”라는 말에 지성이가 선발에서 제외된 것으로만 알았지, 엔트리에서 빠진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국내 방송국의 부탁으로 경기장에 도착하는 지성이의 인터뷰를 허락했다. 경기에 못 뛴다는 걸 숨기고 인터뷰하는 심정이 어땠을까. 선수단과 함께 경기장에 도착한 지성이는 유니폼도 갈아입지 못하고 우리가 앉아 있는 관중석으로 터벅터벅 걸어 올라왔다. 억장이 무너질 만큼 안쓰러웠다. 문득 지성이가 막 맨유에 입단하던 무렵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사람은 내게 “박지성 선수가 맨유에서 성공가도를 달릴 수는 있겠지만 유럽 선수들을 비집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런 경우를 예상하고 한 얘기 같아 경기 내내 마음이 심란했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지성이는 보름 전부터 선발이 아닐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도 8강·준결승 등 네 경기를 모두 풀타임으로 뛴 자신이 엔트리에서 탈락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말 없이 경기를 지켜보는데 거스 히딩크 러시아 대표팀 감독이 멀찌감치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게 눈에 띄었다. 옛 스승을 본 지성이는 애써 눈을 피하는 듯했다. 전반전이 끝나고 하프타임 행사 때문에 필드에 내려갔다 히딩크 감독이 우리를 힐끔 쳐다봤다. 잠시 후 지성이 휴대전화로 문자가 왔다. ‘실망하지 마라. 기회는 다시 온다’는 히딩크 감독의 문자메시지였다. 제자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와중에 격려 문자까지 보낸 히딩크가 정말 고맙게 느껴졌다. 그래도 지성이는 답장을 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경기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 영감탱이는 항상 그렇게 말해요
경기가 끝나자마자 우리 일행은 얼른 우승 축하 연회장으로 향했다. 선수단 가족과 구단 직원들은 승부차기 끝에 거둔 우승 분위기에 잔뜩 취해 있었다. 하지만 구석에 자리를 잡은 우리들은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인터뷰를 마친 퍼거슨 감독이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을 비집고 종종걸음으로 우리 자리로 찾아왔다.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내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 (지성이를 빼는 게) 가장 힘든 결정이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감독이 직접 이렇게 얘기해 주니 속상했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한참 후 선수들과 함께 지성이가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감독이 아까 우리에게 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때까지 무표정하던 지성이는 그 말에 울컥했는지 “그 영감탱이는 항상 안 뛴 선수들에게는 그렇게 말해요”라고 답했다. 지성이가 내뱉을 수 있는 가장 독한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못내 서운한 것은 지성이 목에만 우승 메달이 걸려 있지 않은 점이다. 주전·비주전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정장으로 갈아입고 우승 기념사진을 촬영할 때도 지성이만 우승 메달을 걸지 못했다. 어찌나 가슴 아프던지 가슴에 응어리가 맺혔다. 당시 못 받은 우승 메달은 8개월 뒤인 지난 1월 첼시전을 마친 뒤 맨유 구단 직원으로부터 받았다. “줄 생각이었으면 진작 줄 것이지” 하는 생각에 더 속이 상했다. 귀국한 뒤에도 지성이는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지성이는 꾹 눌러참고 다시 시작했다. 엔트리에서 탈락한 뒤 6일 만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헤라르드 피케와는 달랐다. 이번 로마에서 큰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당당히 동료들과 함께 뛰어 우승 세리머니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