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16-18 2009. 7. 26(주일) 3부
어떻게 낙심하지 않고 살 것인가?
지금은 좀 뜸해졌습니다만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자살하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두어 주 전에도 60세쯤 되는 분이 한 여관 객실에서 목을 매고 자살을 했습니다.
경찰이 알아보니까 지난 1월에 그 분의 아들이 그 여관 그 방에서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생전 본적도 없는데 서로 죽는 것을 도와준다고 그럽니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만나고 함께 승용차를 타고 강원도 구석으로 여행을 갑니다.
그리고는 차 문을 다 걸어 잠그고 연탄불을 피워놓고 함께 죽습니다.
이미 여러 팀이 그런 일을 벌였기 때문에 이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게 그렇게 만만하게 생각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소설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제목을 붙인 소설이 있습니다.
약간 동화 같은 내용으로 진행되는 이야긴데 결론은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한테는 이 소설이 읽기 전에 가졌던 기대하고 다른 결론을 보여줘서 좀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또 막상 내용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톨스토이의 가르침을 수긍하게 하는 그런 글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제가 이 질문으로 인터넷을 찾아봤습니다.
다양한 대답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많이 나오는 대답이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도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서 한 번쯤은 들어본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공감도 되지요.
현재 아무리 큰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그 어려움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화려하게 사는 것도 재미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앞에서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가?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사회에서 사람들이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TV 뉴스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카드빚에 눌려서 죽음을 결심하지요.
어떤 사람은 직장을 나오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주식을 했다가 주가가 곤두박질치면서 가진 돈을 다 날리고 죽음을 결심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년째 직장을 못 잡고 여기저기를 끼웃거리다가 살기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뉴스를 듣고 있으면 “우리 사회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리고 이런 절망이 사람들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런 절망의 시대에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다 아시는 것처럼 바울의 권면입니다.
절망하는 사람이 어떻게 절망에 빠지지 않고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오늘 이 말씀이 저나 여러분 모두에게 절망의 세상을 사는 비결을 터득하게 하는 말씀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은 오늘 읽은 말씀 서두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낙심>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온 <절망> 혹은 <희망 없음>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그가 지금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라고 이해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의 낙심이 무엇인가?”는 8절 말씀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실까요.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이런 얘기가 11절까지 계속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절망하게 할 만한 요인들이 무엇인지 우리가 정리할 수 있지요.
그것은 우겨쌈을 당하는 것이고, 답답한 일을 당하는 것이고, 박해를 받는 것이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인데 그것들은 마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는 무거운 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예수 때문에 실제로 죽음에 넘겨지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로 표현만 안 했을 뿐이지 바울도 절망이 너무 커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은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읽은 말씀에서 바울이 뭐라고 그랬다고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데, 희망을 잃어버릴만한 상황 가운데서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자기가 가진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이런 고백을 하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생각 없이 쉽게 얘기하자면 “믿음으로 그랬겠지”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고 해서 다 이런 낙심을 이기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우리 사회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는 것을 봤기 때문에 아는 거지요.
이은주, 안재환, 최진실 씨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어떤 분은 새벽기도를 다닐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그렇게 독실한 믿음으로 낙심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물론 뉴스에 나오는 소식이나 평론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짊어지고 사는 스트레스의 무게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그들이 가지고 다니던 어려움을 굳이 어려움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무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삶의 스트레스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바울이 짊어지고 있는 것하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 이하에 있는 바울의 어려움을 우리가 앞에서 읽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몇 번 맞고 무슨 위험 무슨 위험이 끝도 없이 있었다”고 하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는 “우리의 고난이 너무 커서 살 소망이 끊어지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고요.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했나보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스트레스라고 말할 수조차 없을 만큼 큰 아픔이자 어려움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고난을 감당하는 것은 고사하고 상상하는 것도 힘든 일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이 자살하지 않고 그 고난 중에 버틸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낙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고린도후서 4:14에 있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죽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시 살리실 것을 바울이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자기가 낙심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겁니다.
첫째,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둘째, 지금 받는 환란은 잠시 받는 것이고 가벼운 것이지만 나중에 받을 영광은 너무 크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로 반대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이 그렇고, <낡아지는 것>과 <새로워지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환란>과 <영광>이 있고, <잠시>와 <영원>. <경한 것>과 <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하고, <잠깐>과 <영원>을 다시 한 번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대비를 따라가다 보면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는 사실 한 가지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요지는 “관심의 초점을 어디에 고정시키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굉장히 넓고 다양한 세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세상이 딱 두 가지밖에 없다고 그럽니다.
하나는 보이는 세상이고, 또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싸움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입니다.
승리와 희망도 거기서 생기는 것이고, 낙심과 패배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을 읽을 때 우리는 그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을 낙심하게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그가 환란을 당한다고 하는 것이고, 겉사람이 낡아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고 오감으로 확인 가능한 것들입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의 낙심은 어떤 것입니까?
놀랍게도 우리의 낙심이나 절망 역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서 생기는 낙심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낙심은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는 것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형편이 너무 어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갖게 되는 낙심도 이와 비슷하지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고나 중병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나 취직이 안 되는 것도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저는 바울이 여기서 <겉 사람>을 이야기 했다고 하는 것이 참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러 가지 정황을 따져보면 바울은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고난이 개인의 욕망과 사회의 부정의함에서 오는 것임에 비해서 바울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당한 사람이었다는 얘깁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그런 사람도 겉사람을 바라보면 얼마든지 절망하고 낙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놓은 비결은 눈에 보이는 이런 것을 보지 않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바라보고, 거기에 가치를 두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그 새롭게 함을 날마다 계발시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고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입니다.
이을 위해서 <겉사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겁니다.
너 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겉 사람>이 늙어간다고 하는 것을 발견할 때 낙심하고 의기소침해집니다.
그건 여러분도 경험하시는 일이지요.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놀랍니다.
이마에 생긴 주름살이나 비쭉 튀어나온 하얀 머리카락에 말이지요.
이런 것들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보니까 이런 게 거기에 있는 게 보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건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전혀 마음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는 깜짝 놀란단 말이지요.
그리고는 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지나갑니다.
“내 나이가 몇이지?”에서부터...
이 나이 먹도록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기도 하고.
앞으로도 살 날은 많이 남았다고 하는 것과, 더불어서 이제는 돈을 버는 일보다 쓰는 일이 더 많을 거라는 사실과, 그런데도 벌어놓은 것은 없다는 현실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인생의 말년을 보내야 한다든지, 병이 난다든지, 직장을 잃는다든지...
이런 자기 점검과 상상이 머릿속을 지나가면 갑자기 겁이 덜컥 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낡아지는 <겉 사람>을 보면서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겉 사람>이 낡아진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육체가 쇠약해져가는 것만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회적인 의미의 <겉 사람>도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안 그런 때가 없었겠습니다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특별히 <겉 사람>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겉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이 텔레비전에서 본 아파트 광고 / 휴대폰 광고 / 자동차 광고 같은 것들을 한 번 기억해 보십시오.
그런 것들은 특정 아파트에 살거나, 특정 자동차를 타면 그게 곧 행복이고 인생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냥 보면 이런 것은 전부 사고파는 문제에 불과합니다.
사고 싶은 사람은 사고, 사기 싫은 사람은 안 사면 됩니다.
다른 차원의 것이기는 했지만 언젠가 우리나라 대통령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식의 광고가 일단 전파를 타게 되면 그것이 단순히 사고파는 문제가 아닌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상(思想)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또 지배력을 갖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것은 이 시대의 가치를 형성하는 하나의 가르침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개인들한테는 이 시대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게 하는 사고방식이 되어버립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화장품 회사는 TV를 통해서 “여성의 피부노화가 순식간에 오는 것”이라고 긴장감을 줍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죄악 가운데 있지 않으려면 스물다섯 살 이상 되는 여성들은 빨리 그 회사 화장품을 사서 발라야 합니다.
분유 회사는 자기 회사의 분유를 먹이는 것만으로 그 아기가 우리 사회에서 상위 1%에 속한다고 가르칩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다른 사람보다 한 발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분유를 빨리 사다가 먹여야 할 것입니다.
1%가 타는 자동차도 마찬가지고, 1%가 사는 아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것들은 한결같이 가격이 비쌉니다.
그야말로 돈 있는 사람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지요.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면서, 한 달에 88만 원 받고, 그나마도 언제 해고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고, 허구헌날 은행으로부터 카드 빚 갚으라고 독촉전화 받는 사람들한테는 이런 것들은 그림의 떡도 안 되는 얘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래저래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희한한 건 뭡니까?
순전히 기업의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런 나쁜 가르침들이 먹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그 화려함으로 자기 인생을 치장하지 못하고 사는 것 때문에 낙심을 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수이기는 하겠지만 중고등학교 다니는 여학생들이 몸을 팔고, 남학생들이 강도짓을 해서라도 명품 옷 입고, 신형 휴대전화기를 가지려고 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텔레비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애나 어른이나 <겉사람>을 치장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낙심이나 절망을 면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택하는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무서운 사실은 뭐냐면 겉사람을 치장하고 그것으로 인생의 가치를 확보하려고 하는 배후에 “다른 사람보다 더”라고 하는 비교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보다 화려하지 못하면 그의 <겉사람>은 볼품없는 것으로 취급받고, 그렇게 된 사람은 곧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지요.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런 세상에서 <겉 사람>이 볼품없이 남아있어도, 심지어 그것이 점점 쇠약해지고 무너져서 무가치한 모습처럼 되어 버린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않는 길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속사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1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연예인들의 자살이 한참일 때 어떤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남겼습니다.
제가 약간 각색했는데 들어보세요.
요즘 사람들의 웰빙 열풍은 대단합니다.
그들은 요가를 하고, 굳이 콩으로 만든 음식을 먹고 마십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100% 순 면으로 된 생리대만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더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정작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대단히 인색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그들이 참된 웰빙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단지 웰빙이라는 트렌드에 뒤쳐질까봐 두려워하며 좇아가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정신건강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은 건강한 정신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사람을 치장하기 위해서 추구하던 것과 나란히 놓고 볼 때 자신이 추구하던 것이 전혀 값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만 가능하지요.
오늘 말씀에서 바울이 전혀 반대되는 것을 쌍으로 묶어서 배열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겉사람>에 해당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속사람>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여주는 것이 “<겉사람>은 필연적으로 낡아질 수밖에 없지만 <속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현실에서는 환란이 무거운 짐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영광 앞에서 비교하면 그것의 무게는 가볍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나마 환란은 잠깐 동안만 있는 것이지만 영광은 그 크기를 알 수 없을 만큼 크고 영원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고요?
하찮은 겉사람을 치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못 얻으면 낙심하는 그런 인생을 포기하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낙심과 절망의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영원을 보장하는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데 투자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원리를 가장 잘 이해했던 사람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얻고자 했던 것은 다른 게 아니었지요.
하나님 앞에서 걸리는 것 없이, 벌거벗은 상태로, 있는 그대로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가난함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침묵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 만나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여겼습니다.
여러분이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지요?
그 영화는 네로 황제 시대에 살았던 성도들이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형 경기장에 끌려가서 굶주린 사자에게 뜯어 먹혔고, 다른 사람들은 장작불 속에서 타들어가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죽는 장면을 보면 비굴한 모습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불에 타들어가면서도 그들이 찬송을 부르면서 죽어가지요.
기록에 의하면 그들 중에 한숨 쉬는 사람도 없었고, 신음 소리를 내는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죽을 수 있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들도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그것은 저절로 된 게 아니고 오직 하나, <겉 사람>을 포기하고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그들의 영성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의 강함에서 얻은 힘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입니다.
육신이든지, 재물이든지, 아니면 명예든지, 인기든지, 건강이든지...
우리가 얻기 위해서 애쓰고 집착하던 것이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죽음과 같은 일이지요.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더욱 더 죽음처럼 여겨집니다.
<겉사람의 낡아짐>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을 통과해야 우리가 능력 있는 속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수시로 죽음 앞에 던져졌던 사람입니다.
그래도 그가 기죽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실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죽음을 연습할 때 우리도 바울처럼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마치 급류에 쓸려 내려가는 통나무 위에 매달려 있는 사람 같습니다.
개울 저쪽 편에서 던져준 구조의 밧줄이 있지만 통나무를 쥔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서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향해서 쥐고 있는 손을 놓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쓰러져가는 <겉사람>에 집착하지 말고 <속사람>에 집중하라는 권면입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죽음조차도 하나님께 감사로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조리한 세상에 매몰되어도 절망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는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 역동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원리가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더 여유 있고 풍요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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