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성경대로 믿읍시다(신 4:1~8)

미션(cmc) 2009. 8. 7. 19:07

성경대로 믿읍시다


신 4:1~8

장차남 목사(온천제일교회 원로)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존숭하며 성경을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성경을 믿는 것은 하나일 뿐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의 말씀을 불신할 수 없고, 성경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불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불신자가 하나님이 계시냐고 물으면 신자는 계신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신자는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답합니다. 성경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말하면 신자는 더 이상 답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답변이 완전, 진실하고 최종적이어서 이것을 믿지 않으면 달리 답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일점일혹도 틀릴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통 신앙자들은 받아들입니다. 물론 번역이나 사본은 오류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성경과 말씀을 분리하여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기록인 성경은 틀릴 수 있지만 케리그마(전파된 내용)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다거나 토지 속에 금이 묻혀 있듯이 성경 속에 말씀이 들어있다거나 신약 성경에 기독교 복음과 신화적인 성격을 지닌 제1세기 세계관이 있음으로 신화적 얼개를 벗기고 케리그마를 찾아내자고 비신화화를 주장합니다.
아예 성경을 믿지 않거나 믿는다면서 성경과 말씀의 관계를 모호하게 재해석을 시도함은 잘못된 것입니다.
딤후 3:16의 말씀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 이어서 마 24:35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했고 요 10:35에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벧후 1:20 말씀대로 사사로이 풀어서 안 되고 벧후 3:16 말씀처럼 억지로 풀면 스스로 멸망에 이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벧후 1:21에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정통 신앙자들은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믿습니다. 그렇다고 성령님께서 불러 주시는 대로 받아 적는 것과 같은 기계적 영감설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기록자들의 지식, 경험, 개성, 문체, 자료 등이 그대로 활용된다는 유기적 영감설을 받아들입니다. 그렇더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틀림없게 하셨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종하며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 믿고 이행해야 합니다.
신 4:2에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12:32에도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보태거나 빼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잠 30:5,6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지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전 3:14에는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줄을 내가 알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뿐 아니라 하나님 행하심의 절대성은 사람이 가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 22:18, 19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곧 성경에 더하는 자는 재앙들을 더하고 제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무엇을 더하지 말고 그대로 믿읍시다.
사람들 중에는 성경에 새로운 것을 더 보태려는 부류가 있습니다. 대체로 신비주의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없는 것을 체험하고 그것을 성경처럼, 혹은 성경 이상으로 절대시합니다. 또 신구약 성경의 기록으로 계시가 종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 계시를 받았다고 떠벌입니다.
또한 성경에 버금가는 부가적 권위를 보태려는 집단도 있습니다. 개신교의 정통 신앙자들은 성경을 신앙의 유일기준으로 받아들여 다른 버금가는 권위를 인정치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와 동방 정교회는 성경을 신앙의 제일기준으로 여겨 다른 여러 권위들 가운데 제일 또는 기본적 권위가 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말은 성경이 유일한 권위가 아니라 외경을 비롯하여 교부들의 일치된 도덕적 저서, 고대신조, 교회회의의 결의, 구전 등의 제 권위 가운데 으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버나드 램이 그의 성경해석학 초두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연하는 유사 집단들 중에는 창시자 혹은 교주가 받았다는 계시의 기록물인 소위 경전이란 것이 있습니다. 몰몬경이나 원리해설 등이 그렇습니다. 경전류는 아니더라도 이에 준하는 강의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자꾸 만들어 성경을 밀어내고 성경을 오도하는 일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서 성경을 파괴하고 오염케 하는 것일 뿐 입니다. 부연하여 이것하고는 다르달 찌라도 성경에 복음이라고 했으면 되었지 구태어 순복음이라 할 필요가 있겠는지, 장로교면 장로교지 순장로교라 할 필요가 있겠는지, 예배면 예배지 열린 예배라 할 필요가 있겠는지, 목사면 목사지 큰 목사라 할 필요가 있는지 싶습니다.

연하여 우리는 성경에 무엇을 제하지 말고 그대로 믿읍시다.
사람들 중에는 공연히 성경 중에서 트집을 잡아 자꾸 제하고자 하는 자유주의 신앙의 부류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 신학자는 물론 증명과 논리를 중시하는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볼 때 성경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사고할 때 성경의 내용은 황당하고 비논리적인 게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 나신 것,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것, 물위로 걸으신 것, 부활승천 하신 것 등 모두가 과학에 맞지 않고 논리적으로 불합하다고 아예 도외시 합니다. 하지만 히 11:3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 진 줄을 우리가 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신앙의 경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온갖 예언과 이적은 성경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사실을 증명함이 됩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계실 때 그의 천지창조를 믿을 수 있고 그의 천지창조를 믿는다면 나머지 이적이나 예언은 이하동문으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자의 성육신이 있고서야 속죄 성업이 있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구속의 은총이 있게 된 사실을 믿는다면 예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만 밝혀내려 한다거나 성경을 현대인의 이해와 구미에 맞추어 재해석 하려는 놀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66권 중에도 어떤 책은 성경 가치가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논란을 하기도 했지만 성경은 66권 1189장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성경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 중에는 말과 실제가 다른 경우들이 있는데 성경을 믿는다면서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브올의 아들 발람은 유브라데 강가의 브돌 사람으로 좋게 말하면 예언자요 낮게 말하여 점하는 술사였습니다. 그때 모압왕 발락이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의 손에 복술의 예물을 들려 발람에게 보내되 자기에게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발람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하고 그 밤에 하나님께서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자니라’고 말씀 하시어 그들을 거절하여 보내었습니다.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매 민 22:18에서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찌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여화와의 답을 얻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덜하거나 더함은 말씀을 어김이기 때문에 천만금, 억만금을 줄찌라도 가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사부재리 원칙에 맞지 않게 또 물으니 이는 그의 마음이 보내주시기를 원함 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가라는 말씀이 무엇인지 새겨 보지도 않고 그들을 따라가게 되고 결국 민 31:8의 말씀에서 보듯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말은 똑바로 하면서도 실제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딛 1:16에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한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자 하기에 설교시에도 성경구절을 있는 그대로 해석 없이 전달 할 때가 흔합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설교에 구약성경이 그대로 인용되며 성경의 말씀자체가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하고 감동하고 회심케하고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전 2:1~2에서 바울사도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자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하여 마주한 후 행 10:33에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15:1 이하에 보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었고 그것은 성경대로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고 복음을 바로 믿고 받은 그대로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했습니다. 살전 2:13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이 새것을 원해도 기독교 신앙은 옛 신앙이 좋으며 성경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신앙이 옳은 줄 알아 그렇게 믿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울왕처럼 처음에는 겸손하던 자리에서 자칫 교만하여져 하나님의 말씀을 제 마음대로 가감하여 왕에서 육축까지 아말렉을 모조리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고서도 아각왕과 살찐 짐승은 살려 하나님께 버림받은 전철을 답습하고들 있습니다.
개신교는 ‘오직 성경’의 권위에 호소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물어서 “성경이 이렇게 말씀한다”고 하면 그 말씀을 신종해야 할 따름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순종할 뿐 이의 제기나 토를 달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도 신학도 오류가 있으되 성경은 틀림없기에 항상 성경에 비추어 틀리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 나가야 한다는 게 개혁신앙이요 개혁주의입니다. 장로회정치의 요의도 ‘장로회’인 당회, 노회, 총회의 교정이 성경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회에서 신적 권위를 대표하여 말씀을 수종드는 목사가 성경을 해석하여 특정사항에 적용하면 교인대표로서 현실 상항을 대변하는 장로들이 거기에 동의하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치리 받은 자의 경우도 성경의 해석과 적용이 잘못되었을 때 이의제기와 재심내지 상소를 청할 수 있으나 성경해석과 적용엔 이의가 없으나 이해와 감정에 어긋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장로회정치는 인치가 아니라 법치입니다.
외국에서 오래 사는 동포들은 연륜이 쌓일수록 모국음식인 한식에 더 집착하게 되고 어릴 때 어머니에게 길들여진 어머니의 손맛을 제일로 느낀다고 합니다. 그처럼 젊어서는 모두 진보가 되어 자유분방하게 온갖 곳을 다 기웃거리며 넘나들지만 나이 들면 결국에 보수로 회귀하게 되는 게 인생의 삶입니다. 젊어서 바람피우며 역마살이 끼었는지 집에 붙어 있지 않던 사람도 나이 들면 조강지처가 제일인줄 알고 집을 찾아들게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두루 다 경험해 보면 결국에 성경대로 믿는 보수신앙이야 말로 진짜배기 신앙인 줄 깨닫고 그 길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하는데 너무 기교와 멋을 부리려 하지 말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것도 없이 오직 성경대로 믿는 단순한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런 신앙에 생명과 구원과 영생이 있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