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해방
(히 11:23-26)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남북한의 차이가 여러 가지 면에서 크지만 무엇보다 확연한 것 중에 하나는 건설현장의 모습입니다. 북한은 크고 작은 일을 대부분 인력으로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글거리지만, 남한은 대규모 국책 사업의 현장을 가보아도 사람은 별로 많지 않고 건설장비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데 실상 교회를 오나 선교지를 가나 하나님은 물론 천사조차 볼 수 없고 오로지 믿음의 사람들만 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해방하셨는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64년 전 우리 민족을 어떻게 왜 해방하셨는지를 깨달아 이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고 누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자유를 잃은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하늘에 별과 같고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번성하게 하여 주실 것이며,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해 복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겠다는 여러 차례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 26: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과 그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흉년을 만나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갔다가 국무총리를 하고 있는 요셉의 덕으로 온 가족이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요셉의 영향력으로 인해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도 부족함이 없이 평화로운 삶을 살았으나 구테타로 인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와 압제로 인해 견디기 어려운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출 1:11)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여기서 ‘괴롭게 하여’라는 말은 ‘압박하다, 괴롭히다, 강탈하다 라는 뜻으로 지나친 부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우 비통해 하는 상태가 미완료 동사로 끝없는 고통을 뜻합니다.
(출 1: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여기서 ‘어려운’ 노동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힘이 많이 드는 정도가 아니라 ‘잔혹하다, 포악하다’는 의미를 덧붙힌 고역으로 보통사람의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일을 시켰다는 말입니다.
또 ‘엄하였더라’는 말은 가혹하고 엄중하다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난을 겪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것만이 아닙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인구 억제책으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다 죽게 하였습니다.
[출 1:15,16]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렇게 되면 미래에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낼 사람이 없게 된다는 말이며, 결국 여성들만 남은 이스라엘은 애굽화가 되고 말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는 궁극적인 의도는 경제적인 이득을 보려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뜻합니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과연 누가, 어떻게 구원하여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온 사방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빛 되신 하나님을 찾아야 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아무것도 알지 못할 때 전지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을 때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고난을 당할 것과 마침내 하나님의 그의 자손들을 고난에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할까요? 아닙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부르짖어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겔 36: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2.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나님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셔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증거를 피조 만물과 역사와 성경과 개인의 삶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의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자의 공통점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형통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고, 고난을 받을 받을 때는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이 잘될 때나 안 될 때를 막론하고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 여년 간을 우상의 백화점과 같이 온갖 잡신을 섬기는 애굽에서 사는 동안 유일신 신앙이 퇴색되고 혼합되어 순수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존재의 의미와 민족의 정체성을 망각하며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가나안 땅에 돌아가지 않아도 애굽 땅에서 편히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았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이 고통중에 부르짖고 탄식하는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살았으나 하나님은 그 약속의 때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중에 비로소 자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셨고 부르짖을 때 응답하셨습니다.
(출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여기서 ‘탄식하며’라는 말은 고된 노동으로 인해 더 이상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한계 상황에서 이르렀을 때 신음하는 소리라면, ‘부르짖으니’라는 말은 절망 중에 큰 소리로 소리쳐 도우심을 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미완료 상태로 이스라엘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상달된지라’는 말은 마치 향을 피우면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갔다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탄식할 때마다 애굽 사람들은 채찍을 가하고 엄살을 부린다고 오히려 일의 양을 더 늘렸으나, 여호아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고통을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당신의 백성들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환난 중에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삼하 22:7)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여기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라는 말은 무심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 경청하여 주의를 기울여 듣는다는 말이며, 이해한다는 말이며, 기도에 응답한다는 말의 미완료 동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환난을 만났을 때 절망하지 말고, 천국비상전화인 기도를 하되 도우심을 절실하게 구하며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어떤 대안을 세우시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어떤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거나 하늘에 천군천사를 보내어 바로의 군대를 멸하시고 바로 왕에게 벼락을 내리거나 즉사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한 어린아이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 모세입니다.
(출 6:20)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은 백세에 이삭을 낳았는데 아므람은 백삼십칠 세에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고 하였으니 우연한 출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은 출산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명령에 의해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여야만 하는 불행한 시대에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들의 신앙이 눈에 보이는 바로 왕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만왕의 왕 여호아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믿음의 부부였기 때문입니다.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여기서 ‘아름다운 아이’라는 말은 잘생기고 아름답고 받으실 만하고, 만족스럽다는 뜻이며, ‘보고’라는 말은 듣고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여 느끼는 것이며,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두려워하거나, 존경하거나, 경외하지 않는다는 종교적인 의미로 모세의 부모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믿음의 부부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상세한 이야기가 없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모세를 낳은 부모가 얼마나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모세가 비록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부모의 품을 떠나 나일 강에 띄워졌을 지라도 하나님은 오히려 바로의 딸 공주의 양자가 되게 하시고 애굽의 왕궁에서 최상의 지도자 교육을 사십년간 배우고 체득하게 하시고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고통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을 고려하면 시간을 끄실 필요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서 완벽한 자질을 갖추기 까지 팔십년간 훈련을 시키신 후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이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지도자의 참된 자질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으로 그 답은 한 마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히 11:24) “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모세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공주의 아들이 되었으니 애굽의 대권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 후에 동족을 구원해 낼 수 도 있을 것이며, 사십년간 호화로운 생활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생활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포기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설령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신뢰하고 존경하고 따라와 주었어야 하는데도 정반대로 불신하였습니다.
(출 2: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그 때문에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쫓겨났으며 광야에서 사십년 양치기로 전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1) 모세의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입만 살아서 말만 하는 믿음이 아니라 애굽 왕궁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를 죄악의 낙이라고 하였으며,
2)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믿음이었고,
3) 애굽의 대권은 모든 보화를 거머쥔다는 말로 그 대신 그리스도를 붙잡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보화로 여기는 큰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하나님은 그 후에 비로소 모세를 통해 열 가지 기적을 베푸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되 겨우 구원한 것이 아니라 피를 흘려서 구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양의 피로만 이스라엘을 구원하되 도망친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유와 해방을 얻고,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애굽에서 보화를 이끌고 출애굽을 하게 하셨습니다.
(창 15:14, 개정)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출 12: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이것이 바로 고난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은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이었습니다.
3. 8. 15 해방을 주신 하나님
성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아니라 미래가 아니라 그 모두를 포함하고 초월하는 말씀이라면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성경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만이 그 같은 시련을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과 흡사한 우리 민족의 지난 날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광신도들처럼 나라와 민족을 외면하고 오직 하나님만 잘 믿으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마치 육신의 어머니와 같이 우리 신앙 생활에 절실한 곳이지만 나라가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민족에 과거에 어떤 형편에 있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자유와 해방을 주셨는지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반드시 알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과거 일제치하에서 36년 동안 압제를 받을 때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당한 것처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자유가 없었습니다.
모든 농산물은 공출을 당하고,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처녀들은 정신대에, 남자들은 징용에, 국민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를 해야만 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수 많은 애국자들이 독립운동을 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옥고를 치루고 고문을 당하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1910년부터 민족 해방이 되기까지 일제치하에서의 우리 민족은 생활상에 있어서 여러 면으로 많은 고난과 압박을 받았습니다. 세계 역사 속에 수 많은 제국주의 자들이 약소국을 침략하여 수탈한 것이 다 반사이지만 그 나라의 문화나 종교를 묵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특히 관습화된 음력설을 말살하고자 떡방아간을 섣달 그믐 전 일주일 동안은 일을 못하게 하였고, 설날 아침 새벽 세배 다니는 이가 특히 흰옷을 입었을 때는 양력설에 세배 안가고 또 무색옷을 안 입는다고 해서 검은 물이 든 물총을 쏘아 흰옷에 검은 물을 얼룩지게 하는 등 갖가지 압박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일제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고유성이 짙은 풍속은 될 수 있는 대로 말살하고자 하였고 한편으로는 일제의 풍속 습관을 따르도록 유도하였고, 제2차 대전 때에는 국어 상용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말을 사용치 못하게 하고 대신 일본말을 상용토록 하였고, 성명까지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였으며 심지어 우리 민족의 고유의복으로서의 흰옷은 못 입게 압박을 가하였습니다.
심지어 시골장터의 입구마다 검정 물을 담은 커다란 가마솥을 설치해 놓고, 장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흰 옷에 검정물을 끼얹었습니다.
떡 팔러 장에 갔다/베 옷에 먹물탕이라/옷이야 검었지만/배알까지 검길쏘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처럼 그렇게 치졸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애국운동을 하는 독립투사들을 얼마나 못살게 굴었겠습니까?
일제의 강압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수탈당하고, 정조를 유린당하였으나 일제에 항거할만한 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 1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많은 애국자들이 사형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교회적으로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을 알면서도 일본귀신인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으며 그에 굴복하지 않은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투옥과 고문과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보다 더 안타까웠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상황으로는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유와 해방을 쟁취할 수 있는 힘이 전무 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교회와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를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당대 일본은 마치 백전백승할 것처럼 보였으나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민족은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대안은 어제나 오늘이나 믿음의 사람을 세우시는 일을 해오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사람들에 의해서라면 어려움을 풀어가는 것도 모세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셔서 풀어가 실 것입니다.
민족대표 33인’ 길선주 목사
‘1907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吉善宙)가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국가 보훈처는 “길 목사가 3·1운동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해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른 공적이 행형기록 등으로 확인됐다”며 독립장 추서의 배경을 설명했다.
1869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한의학을 연구하던 길선주 목사는 1897년 마포삼열 선교사를 통해 회심하고 세례를 받은 후 1907년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 1907년 1월 열린 사경회에 많은 성도들 앞에서 회개를 하며 부흥운동에 불을 붙였으며, 당시 그가 인도하는 부흥회에서는 병이 낫고 감시하던 순경마저 회개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는 장로 시절부터 새벽기도를 주도했으며, 이는 한국교회만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또 성경 읽기를 강조하며 구약 30독, 신약 1백독, 계시록 1만독을 했고, 2만여 차례의 설교로 총 380만 여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길 목사는 민족운동에도 앞장섰다. 3·1운동 이전인 1912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수난을 당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해 옥고를 치른 후에는 전국으로 부흥회를 다니면서 물산장려 운동, 금주 운동 등을 함께했다.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숭실학교와 숭덕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사회에 뿌리 깊은 남녀간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 교회 내 남녀 좌석의 구별을 폐지하기도 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64년 전에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일제의 압제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셨을 뿐 아니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대로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죄와 죽음에서 자유를 얻게 하신 것을 무엇보다 감사해야 합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가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고 해서 방종한 삶을 살지 말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1) (고전 8: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2)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3) (벧전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사 허락하신 소중한 자유와 해방이 불신앙과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들에 의해 방종과 죄악으로 변질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정치적으로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가 100% 보장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복지제도가 잘 보장된 선진국민이 된다고 할지라도 죄와 죽음과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정치나 경제적인 자유가 아니라 그 같은 영적인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신 후에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계명과 율법을 규례를 주어 그것을 지켜 순종하게 하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신 자유를 잃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레 26:46)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모세를 통하여 세우신 규례와 법도와 율법이니라"
이는 진정한 자유는 무법이나 방종이 아니라 법 테두리 안에서 보장될 수 있으며, 진리로 자유 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흔히 혼란의 극치를 가리켜 무정부상태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역사 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때가 해방을 맞을 준비가 채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1945년 8월 15일 자유와 해방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자유와 해방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가 없는 나라가 되었고, 남한은 세계에서 가장 혼란스런 민주주의 국가가 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수립되지 못하고 국법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가 잠시 지속될 때 좌우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남북이 갈라지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초하였습니다.
법이 있어도 지켜지지 않는 우리의 현실이 마치 해방 당시와 너무나 유사하다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국민은 민주주의를 무정부주의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결국 소중한 자유를 잃게 됩니다. 지나친 노사 대립은 결국 경제적인 자유를 잃게 되고, 극한 정당 대립은 결국 정치적인 자유를 잃게 되고, 공권력을 부정하는 것은 치안부재의 사회를 만들게 됩니다.
좋은 차는 고속의 액셀러레이터와 고성능의 브레이크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좋은 나라는 자유만이 아니라 법이라는 브레이크가 울타리가 되어야만 질서와 안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민족과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국법을 준수하는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일꾼들을 키우는 일을 힘쓰는 민족과 교회와 가정과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 민족과 교회를 통해서 세계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는 경제 대국이 되고 더 많은 선교사를 세계 여러 나라에 파송하여 구원하는 선교 대국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124년 전에 선교사를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64년 전에 일제의 압제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오늘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대안이 바로 세계를 복음으로 구원해 낼 수 있는 미래 정치 경제 사회 예술 종교 등 모든 분야에 헌신할 모세와 같은 일꾼을 키우기 위해 미래를 준비하고,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교회와 가정과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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