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성숙한 그리스도인 /(엡 4:17-24)

미션(cmc) 2009. 8. 31. 06:21

성숙한 그리스도인


(엡 4:17-24)

(엡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사계절 중 봄이 씨 뿌리는 계절이라면, 여름은  성장하는 계절이고, 가을은 성숙해져 결실하는 계절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본래 무신론자가 아니면 조상대대로 사람의 우상을 신으로 섬기며 살아온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누군가가 복음의 씨를 심었고, 누군가가 기도의 눈물을 뿌렸고, 누군가가 말씀의 거름을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학습과 세례를 받고, 나름대로 기도하며 성경을 공부하며,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이 여기까지 자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믿음의 열매, 성령의 열매, 사랑의 열매, 회개의 열매, 전도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야할 때가 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필수인 것처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신앙의 성숙은 영적 필수임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지난 주 신앙의 성장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면, 오늘은 성숙한 신앙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보다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 기독교 신앙과 배움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삼년 동안 가장 역점을 두신 일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정치나 구제 사역이 아니라,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오직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여기서 ‘불쌍히 여기사’ 라는 말은 내장, 심장 즉 감정의 자리를 의미하는 말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내심으로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자비를 베푸심, 즉‘애간장이 타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일을 이처럼 애간장이 타서 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들을 살리는 구원 사역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 가르친다는 말이 89번 정도 나오는데 그것은 예수님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바울도 자주 사용한 말입니다.
(고전 4: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오늘 성경의 에베소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사도 바울이 개척한 여러 교회들 가운데 어느 교회보다 열정을 쏟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옥에서 보낸 믿음의 서신입니다.
(행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여기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거리낌이 없이 가르쳤다’는 말은 움츠려 들거나 후회함이 없을 정도로 다 전하고, 가르친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그 기간도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여기 저기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삼년이나 에베소에 머물러 복음을 가르쳤다는 것은 그만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무슨 일을 막론하고 본능이나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가지고 듣고 배워 가슴으로 믿어질 때 비로소 행동으로 실천하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이 같은 원리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지만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기까지 반드시 경험해야하는 필수적인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으며, 성령님을 왜 보내어 주셨는지를 배우고 이해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과정을 무시하는 종교가 미신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미신이라면 구태여 성경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성경을 열심히 듣고 배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교회에 나와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성경 말씀 중심의 종교로 성경을 배워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 종교이고, 성경이 명하는 대로 순종하는 삶이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작도 진행도 마침도 오로지 말씀을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선교가 예수님의 공생애처럼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주력을 하였으며 에베소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엡 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여기서 ‘배우지’라는 말은 단순히 귀로 들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어떤 것에로 향하게 한다는 뜻으로 그 결과 익숙해지고, 경험하게 되고,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듣고’라는 말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주의하여 경청하여 들음으로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한 청각 작용이 아니라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내용을 정신적으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한 가지 더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위하여 반복해서 손을 뻗히다'를 뜻하는 어근을 포함하며, 따라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받아들이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장에 머물지 않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주일 예배로만 만족하지 말고 제자훈련이나 셀 모임이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 좀 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딤후 3:14,15)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바로 배운 사람과 바로 배우지 못한 사람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바로 배워야 하겠습니다.

 

 2. 그리스도를 잘못 배운 사람
 농부가 밭에 콩만 심었는데 콩도 나고 팥도 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 때 어떤 제품을 막론하고 입력한 모양과 색깔과 크기와 숫자만큼 정확하게 물건이 만들어지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 원칙이 통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모든 부모와 스승이 자기 자녀와 제자들에게 욕을 가리키고 나쁜 짓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세월이 지나면 다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한 부모에게 태어난 형제지만 가는 길이 다르고, 같은 학교 동창이지만 사는 길이 다른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 삼년 동안 그렇게 가르쳤건만 사람들이 모두 다 변화한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잘못된 사상에 미혹을 받은 자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복음을 전하다고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바울 사도는 옥중에서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엡 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가 잘못 가르친 것이 아니라 똑같이 가르쳤을지라도 잘못 배우는 자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교회에서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똑같은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다 믿음이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에베소 교회와 같이 가라지도 나오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 이유는 잘 못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잘 못 배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잘못 배운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이방인처럼 허망한 삶을 사는 사람
(엡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여기서 허망하다는 말은 무가치하고 무익하고 공허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인처럼 허망하게 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들처럼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렇다면 무엇이 이방인들처럼 허망한 삶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는데 만 집착하는 삶을 사는 것이 허망한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왜 허망한 일일까요? 설령 그것을 다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결국 때가 되면 그 모든 것들을 다 놓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영생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삶을  살았다가 죽음을 마지하게 되면 비로소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2) 영적으로 무지한 삶을 사는 사람
(엡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물리적인 세상에서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지게 되면 제일 답답한 것은 사물이 정확히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길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간 운전시에는 길을 찾기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고, 성경 말씀이 빛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읽기를 싫어하고, 설교를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하지만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는 물론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단 한번 뿐인 인생을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살면서도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무감각한 삶을 사는 사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질병 중에 간경화증은 간이 굳어져서 정화작용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각이 없다는 말은 굳어졌다는 뜻입니다. 통증을 느낄 때는 이미 수술의 기회를 놓친 상태인 것처럼 영적인 무감각한 삶은 최악의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엡 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여기서 ‘방탕에 방임하거나 모든 더러운 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으로 해서는 안 되는 죄악된 일을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범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잘못된 모습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양심이 있는 사람이면 그것을 괴로워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후회를 하는 법인데 뻔뻔하고 전혀 무감각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어도 마음에 아무런 감동이나 찔림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이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엡 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다른 어느 교회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에베소 교회에 투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여기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삼년을 보냈다는 것은 바울의 짧은 사역 기간 중에 특별한 것이며, 그것도 밤낮 쉬지 않았다고 했으니 실제로는 육년인 셈입니다.
 그것도 머리로 입으로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눈물로’라고 한 것은 그 가르침이 감동적이었음을 뜻하며, 훈계라는 말은 좋은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충고하고 경고하였다는 말로 엄격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나름대로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지만 에베소 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를 잘못 배운 사람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무슨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알려고 하기 전에 지금까지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배웠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여기서 ‘기억하라’는 말은 주의 깊은 마음으로 돌이켜보는 것을 뜻하는 동분사 현재 능동형으로 단 한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매일 매일 기도요, 성경 묵상인 것입니다.


 3. 그리스도를 바로 배운 사람
 예수님이 천국을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하신 가운데 길가와 흙이 얇은 돌밭에, 가시떨기 위에, 좋은 땅에 떨어졌다고 하였는데 그 중에 가장 이상적인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좋은 땅일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이라고 해서 다 백배가 아니라 때로는 삼십 배 밖에 결실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음을 말씀하였습니다.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물론 삼십 배의 결실은 역설적으로 나머지 칠십 배는 결실을 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나쁜 땅이 아니라 좋은 땅에 동일한 씨가 떨어졌음에도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라는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동일하게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바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나왔을 때 바울은 그렇게 된 것이 그들을 가르친 바울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엡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제자가 스승에게 비단 지식, 사상, 사건만이 아니라 기교와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반복적인 학습 활동과 체계적이고 철저한 학습과정을 통해서 습득하는 것을 가리켜 ‘가르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가르칠 때에
 1) 자기가 주체가 되어 진리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어 진리를 가르쳤고, 예수님을 가르쳤습니다.
 2) 바울의 가르침은 곧 예수님의 가르침이었고, 바울의 가르치는 말씀을 들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에게 들은 것이며, 예수님 안에서 배운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나와서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울 때에도 이런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한 가르침과 배움이 필요할까요? 그리스도를 바르게 배운 사람과 그렇게 배우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바울에게서 배웠지만 잘못 배운 사람은 영적인 간경화증 환자가 되고 바로 배운 사람은 신앙의 성숙과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 옛 사람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내가 하나요, 내가 전부인 것 같지만 예수님을 믿고 성경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나라는 인간을 투영해 보게 되면 내 속에 또 하나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장탄식을 한 말씀입니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에서 ‘나에게 함께 있는 악, 한 다른 법’이 바로 나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고, 주님과 멀어지게 하고,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게 하는 옛사람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옛 사람이 나의 왕 노릇을 하였고, 내 힘으로는 그 옛 주인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랬던 내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내 마음의 왕으로 모셨을 때 비로소 그 옛 사람이 싫어지고, 미워지고, 내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 심령이 새롭게 됩니다.
 세상에는 얼굴을 성형하는 병원은 있어도 마음을 성형하는 병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배우고 바로 알게 되면 심령이 새롭게 바뀌어 진다는 것입니다.
(엡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여기서 ‘새롭게 되어’라는 말은 이전에 잘못된 것을 갱신하는 것만이 아니라 잘못되기 전에 좋았던 원 상태로의 회복을 뜻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불신함으로 심령이 타락하였다면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그 심령이 새롭게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만이 아니라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신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실 때 비로소 내 마음은 새롭게 변화를 받습니다.

3) 새사람을 입게 됩니다.
 옷을 만드는 의류 공장에서 여러 종류의 옷이 만들어 집니다. 결혼예복에서 상복, 작업복에서 턱시도, 군복에서 교복도, 법관제복에서 죄수의 수의까지 다양한 옷을 만들어 냅니다.
 목욕탕에 가면 신분의 구별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욕을 마치고 어떤 옷을 입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하는 일과 신분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옷의 위력입니다.
 사람의 특징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손과 발로 하는 행동의 뿌리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행동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행동의 변화를 동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의 핵심 주제인 새 사람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서 ‘새 사람’이라는 말은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거나 형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존재 했던 것과 비교할 때 시간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새롭다는’ 말은 타락한 나의 자아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면의 사람이 하나님이 본래 지으실 때 형상으로 회복되어짐을 뜻합니다. 그 것이 바로‘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만이 아니라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신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실 때 비로소 내 마음은 새롭게 변화되면서 삶까지 새롭게 변화될 때 비로소 새사람이 되었다는 칭찬을 받게 됩니다.
 그 첫 단추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배우고 가슴으로 믿고 손발로 실천하는 인격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찌하든지 먼저 나 자신부터 그리스도를 바로 배워 의와 진리와 거룩한 마음과 생각과 성품과 언어와 생활까지 그리스도를 닮은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이 건강이 제일이라고 하지만 건강만 있고 배운 지식이 없으면 남에게 수종만 들어야 합니다. 체력만이 힘이 아니라 재력도 실력도 힘이기에 흔히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만이 아니라 지혜가 있어야 하며, 지혜는 지혜로운 스승에게 가르침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그 스승이 영원한 구세주요 선생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가정교사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옛 사람이 나의 주인 노릇을 하였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셨을 때 비로소 옛 사람이 싫어지고, 미워지고, 내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 잘못된 습관입니다. 세상에는 얼굴을 성형하는 병원은 있어도 마음을 성형하는 병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배우고 바로 알게 되면 심령이 새롭게 바뀌어 집니다.
 성숙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누가 가르쳐 준다고 할 때 핑계하지 말고, 성장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독서의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책은 물론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가르침 받는 일에 힘쓰고,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주시는 지혜의 은사를 받아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덧입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