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열매
(엡 4:25-29)
(엡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인간들이 사는 곳은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각기 나름대로 종교가 있습니다. 물론 그 종류와 숫자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미신이나 이단을 제외하고 흔히 고등종교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윤리 도덕과 선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흔히 어떤 종교를 믿든지 다 착하게 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기독교도 어느 종교보다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님은 십계명 하나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도 종교 다원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여러 종교 중에 하나이며, 다른 종교와 동일한 윤리 종교일까요? 아니라면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 답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구태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와 동일하게 보이는 윤리적인 측면이 본질적으로 다른 종교와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지 오늘 성경을 통해서 찾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선행
우리는 지난 시간에 기독교 신앙의 출발도 진행도 결실도 오직 성경 말씀을 배워야만 가능하다고 전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많이 알고, 깊이 알게 되면 사람이 저절로 선해지고 마음에 평화가 임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교회를 오래 다니기만 하면 만사가 저절로 다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깊이 알수록 자신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성한 곳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성경에 명령하고 있는 선을 자신의 의지로는 실천할 능력이 내게 없는 능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 말씀이 구약에서는 십계명이요 신약에서는 산상 보훈으로 읽고 듣기는 좋은 말씀이지만 막상 실천하려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 십계명
(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3) “살인하지 말라”(출 20:14) “간음하지 말라”(출 20:15) “도둑질하지 말라”(출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십계명을 통해서 선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죄인들임을 깨닫게 되었고 비로소 자기가 지은 죄를 속죄받기 위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죄를 범하지 않은 의인은 하나도 없고, 다만 지은 죄를 속죄받은 의인만 있을 뿐입니다.
2) 산상보훈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만일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이 말씀대로 실천한다면 욕심 부리고 시기하고 다투고 싸울 일이 없고 가정도 교회도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나 성도들의 가정이나 현실이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 성경 말씀 역시 십계명이나 산상 보훈처럼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있는 명령의 말씀처럼 보입니다.
(엡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여기서 ‘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지 않고 있는 것이요, ‘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면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말씀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간들이 십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고, 산상보훈은 하나의 듣기 좋은 교훈으로 여기며 살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또 이같이 명령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 성경 말씀이 십계명이나 산상보훈과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말씀을 받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이라면 산상보훈은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에 말씀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물론 타락한 인간의 의지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음을 하나님이 잘 아시고 인간을 대신하여 계명을 지키시고 지키지 못한 죄를 대신하여 값을 치루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게 하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구약에 약속하셨습니다.
(겔 11: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하나님은 에베소서를 읽는 성도들에게 그 약속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셨기 때문에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늘 성경 말씀의 명령을 충분히 지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같은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을 읽는 우리들과 십계명과 산상보훈을 받았던 당시 사람들과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1)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펴 본 에베소서 전반부는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명령도 실천할 수 없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2) 그와 같은 인간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하여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지으셨을 때처럼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엡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렇다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였으며 어떤 대가를 지불하였습니까?
알고 보면 내가 새 사람을 입기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공부한 것 밖에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3) 오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사람을 입은 증거로 외적인 삶의 열매를 맺으므로 입증되어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도시 사람이 배나무와 사과나무와 복숭아 나무를 구분하지 못하지만 열매를 보고 구분을 하듯이 누가 옛사람인지 누가 새 사람인지를 그 열매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당연히 맺어야 할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신앙의 시작이 작은 한 알의 겨자씨처럼 미약하였으나 말씀을 배우고 은혜를 받는 중에 점차 자라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마침내 백배 육십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열매가 맺혀야 할 까요?
2. 입술의 열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의와 진리와 거룩’이라는 심오한 의미를 잘 알지 못할지라도 분명한 한 가지는 진실된 것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거짓을 버리고
인간의 실상은 그와 거리가 먼 존재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마치 주변 환경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카멜리온처럼 자기에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하고, 한 것을 안했다고 말을 바꾸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습니다. 거짓말이 너무나 능숙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할 정도입니다.
너나를 막론하고 본래 그와 같이 거짓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받은 새 사람을 입었다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억지로가 아니라 거짓으로가 아니라 내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을 말미암아 거짓을 미워하고 버리고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그 증거가 바로 이전에 죄로 여기지 않고 입만 열면 거짓을 말했던 과거의 잘못된 삶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켜 거짓을 미워하게 되고 진실을 말하는 새 사람 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엡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여기서 ‘거짓을 버리고’라는 말씀은 옛사람을 벗어 버린다는 말과 동일어로 마치 성밖으로 내어 쫓는 것처럼 거짓을 멀리하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2)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삶은 마귀를 좇는 삶이라면 참된 말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좇는 삶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단의 본질이 거짓이며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게 된 것도 사단의 거짓말에 넘어간 때문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그와 정반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한 진리인 것입니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는 삶일까요? 그것은 비록 내게 불이익이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무슨 말을 하든지 이웃에게 덕을 세우는 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거짓말은 인간관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악화시키게 됩니다. 바울이 거짓을 버리라고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된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이 거짓을 말함으로 교회에 덕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남는 것은 오직 불신과 상처뿐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개인의 인격과 성품에 치유될 수 없는 커다란 손상을 입게 되며 사회 전체는 불신 풍조와 교회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증거와 열매 중에 첫 번 째 열매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참된 말을 하는 입술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결심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잠 30: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3. 삶의 열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증거 중에 하나는 입술의 변화와 더불어 삶의 변화가 동반되어지는 것입니다.
1) 분노를 절제하는 삶
사람이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자신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선한 말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도 자기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서 분노를 폭발함으로 부부나 형제나 교우나 이웃간의 좋은 관계가 한 순간에 깨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폭력이나 살인 사건이 늘어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심령이 새롭게 변화를 받았기 때문에 이전의 다혈질적이고 신경질적이던 감정이 절제가 되어져야 합니다.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오늘 성경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전혀 분노할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분을 낼 수 있지만 그 분노의 감정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을 내어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보시고 분노하시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시던 모습처럼 불의에 대한 의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을 품지 말고’라는 말씀의 분은 의분이 아니라 사소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정이 폭발하는 것으로 문제는 그 분노의 감정을 그대로 품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계속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과연 그러한 사람의 마음에 새사람의 평화나 기쁨이나 행복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될 때 지체가 되는 이웃과 불화를 하게 되고 마귀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그것을 빌미로 더 큰 문제를 만들기 때문에 성도의 가정과 교회가 평화롭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엡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렇습니다. 분노는 마귀를 초청하는 것이며, 분노를 품고 하루를 지나가는 것은 저녁에 대문을 열어 놓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도둑이 열린 대문으로 쉽게 들어와서 재물을 도적질하고 가족들을 위협하는 것처럼 마귀가 나의 마음 속에 우리 가정과 교회 속에 들어와서 강도처럼 영적으로 큰 손해를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을 해가 지기 전에 마치 소방차가 불씨가 남지 않도록 물을 뿌려내는 것처럼 감정의 절제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모든 악한 생각들을 내어 던져 버리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2) 욕심을 절제하는 삶
인간이 범죄하게 된 근본 원인은 현재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지나친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항상 욕심이 주인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 욕심이 나를 불만이 가득찬 사람으로, 남을 시기하는 사람으로,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으로,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결국 그 죄 때문에 파멸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을 입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의 모습은 이전에 도적질하며 살던 사람이 변하여 열심히 일을 하여 그 소득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구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엡 4: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여기서 ‘도둑질’이라는 말은 강도짓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위를 이용하여 교활한 방법으로 횡령을 하거나, 남을 속여서 자기 이득을 보는 행위입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왜 그와 같은 도적질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수고하여 땀을 흘리는 것을 싫어하고 쉬운 방법으로 남보다 잘 살아보려고 하는 욕심과 게으름 때문인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안이 바로 자기 손으로 열심히 일을 해서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그것을 혼자서 쌓놓고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는 놀고먹는 것이 복이 아니며 자기 혼자서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복이 아니며, 열심히 일하며 사는 것이 복이며 자기의 소유를 남과 나누는 삶이 도리어 복이라는 것입니다.
3)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삶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론이나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처럼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기뻐하시고 때로는 근심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때 기뻐하고 어느 때 근심하게 됩니까? 그것은 내가 바라고 원했던 것이 이루어질 때 기뻐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근심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지으실 때 당신이 지으신 것을 보시고 매일 기뻐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을 지으셨을 때는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히 근심하셨을 때는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였을 때입니다. 그 때가 바로 노아시대로 사람의 딸들인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들인 신자들까지 타락해 버렸을 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한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창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 하나님은 영원토록 살아계십니다.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노아 시대의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탄식할 때가 있다면 그것은 슬픈일이요 또한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근심하게’라는 말은 고통을 가하다, 슬프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하고 모욕을 한다는 말의 현재 능동태로 계속해서 근심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이 근심하시는 이유는 불신자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오늘 나와 같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살 때입니다.
그 성령은 우리를 예수 믿도록 친히 부르신 성령이요, 우리를 깨닫게 하신 성령이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성령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딸들로 인을 쳐주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기대가 크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령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지 못하고 도리어 성령이 미워하시는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성령께서 한탄하시고 근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근심하시는 성도의 삶은 어떤 것이며 성령이 기뻐하시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1) 소극적인 삶
(엡 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2) 적극적인 삶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 이유는 내가 누구를 그렇게 사랑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리스도에게 그와 같은 사랑과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얼마나 대조적인 삶입니까? 그러나 알고보면 소극적인 삶을 사는 성도가 따로 있고 적극적인 삶을 사는 성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삶은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이고 적극적인 삶은 새사람을 입은 변화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가장 책망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당대 선생님들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입술로 하는 말과 실제의 행동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회칠한 무덤이라고 신랄하게 책망을 하실 정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은 입술로는 ‘진실과 거룩’을 말하지만 실제의 행동은 겉과 속이 너무나 다른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이를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좋은 성품, 좋은 마음에서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입술이나 행실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마음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을 본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시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넘어지게 하고 범죄하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대신 내안에 성령이 주인이 되셔서 나의 인격을 주장하실 때 나의 의지가 성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성령 충만한 삶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열매 맺는 삶입니다.
(갈 5:24-26)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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