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
(엡 5:1-2)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진리를 가리켜 흔히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깊은 의미를 모를지라도 그 단어의 뜻만 가지고도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교회에 나오면 마음에 위안이나 소망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에 부담만 커지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음이 불편하다고 마음에 위안을 주는 편안한 설교를 하는 교회를 찾아 옮기기도 합니다.
목사를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속내를 잘 아시면서 왜 인간들이 원하는 듣기에 편안한 말씀만이 아니라 부담을 주는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성경 말씀이며,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며, 그것이 제자들이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차례로 읽다가 보면 곳곳에 읽고 듣기에 부담이 되고 양심에 가책이 되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 이유는 마치 건강한 사람에게는 병원이나 약국이 부담스러운 곳이지만 환자에게는 고통을 덜어주고 치료해주는 좋은 곳인 것처럼 부담스런 성경 말씀이 알고 보면 나를 고치고, 살리는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몸으로 증세를 느끼는데도 불구하고 병원에 가기를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고통을 참을 수 없을 때 비로소 병원을 찾고, 어떤 사람은 아습니다.
기독교는 세 번째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영적인 병을 진단하고 의사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흔히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며, 그 때 비로소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병이 중해서 수술을 받고 나면 의사가 무엇을 조심해야 하며, 지속적으로 운동을 하라는 지시를 받게 될 때, 그동안 약 먹기를 싫어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숨쉬기 운동만 하던 사람도 약을 챙기고 열심히 운동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이 지난주에 이어서 그와 같은 말씀입니다. 새사람을 입은 우리가 영혼의 건강을 위해 무엇을 조심하고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임을 깨닫고 부담스러운 마음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고 순종의 생활을 할 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 복을 받게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과연 오늘 성경 말씀이 그러한지 말씀을 통해서 그 같은 진리를 깨달아 영적으로 더욱 건강해지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자
지난 시간에 우리는 왜 서로 친절하게 하고,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같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빚진 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오늘 성경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만도 황송한 일인데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 한 가지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엡 5: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여기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라는 말은 마치 자식이 부모의 얼굴과 목소리와 성품을 빼어 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추종하고 모방하는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았으며 받고 있으며 받게 될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비유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는 나의 약점과 단점과 죄까지 다 알면서 무조건, 변함없이, 항상, 끝까지 사랑하는 분인 것처럼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된 우리를 사랑하시기를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육신의 부모 사랑이 크지만 때가 되면 자식이 도리어 부모를 섬겨야 하며, 때가 되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 부모도 나를 떠나게 되는 유한한 사랑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충족시켜 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1)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시고 병들어 만신창이가 된 나를 고치고 새 사람 만들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랑이며,
2) 영원 전에 나를 택하신 후에 내가 비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어그러진 길로 갈지라도 나의 죄를 대신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사랑이며,
3)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영원토록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생색을 내거나, 눈치 채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무지 몽매한 우리는 그 사랑을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배은망덕한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 자식이 그보다 하찮은 잘못을 할 때 용서하기 보다는 책망하고 매를 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나를 진노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신앙의 철이 들때까지 오래 도록 참고 기다리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는 은밀한 사랑입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잘 믿는지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를 더욱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성경에 약속하셨습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릴 때 기도나 찬송이나 헌금을 드리기 전에 먼저 함께 드려야 할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그것이 다가 아니라, 오늘 성경 말씀처럼 하나님을 본받아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는 삶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가장 큰 문제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메말라 버린 것입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의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도 아니고, 이웃도 아니고, 오로지 돈이 삶의 목적이요, 절대 권력이요, 신처럼 절대자가 되어버렸음을 아침 뉴스 시간마다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살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 돈 때문에 행복한 삶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모형제 친구 이웃 간에 사랑을 잃었습니다.
인간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짐승보다 더 무자비한 자가 되어 내게 나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사람에게 돈 때문에 무자비한 폭력과 살인도 불사하는 몰인정한 세상이 된 것을 보험사기를 위한 살인과 일부러 사고를 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를 너무나 실망스럽게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오늘 성경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고 실천하는 삶을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자신이 새 사람을 입었다고 믿어지는 사람만이라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가족과 교우와 불신 이웃에게 친절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는 삶을 실천한다면 마치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이 오는 것처럼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사랑의 훈풍이 불고 사랑이 다시 살아나고 꽃 피는 계절이 올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는 자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삶이 추상적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임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본보여 주셨습니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믿게 하신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본보여 주신 대로 우리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일방적인 사랑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그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는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가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22:37-40)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말로만 아니라 친히 몸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방법을 십자가로 본보여주셨습니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생하는 사람은 많지만 나와 상관이 없는 죄인을 위해 마음을 쓰고, 목숨을 내 던지,고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구약의 제물처럼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속하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십자가로 입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본보여 주신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외형적으로 흉악한 죄인을 못 박아 죽이는 고통스런 사형틀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대신 많은 사람을 구원을 얻게 된 것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다 충족시킴으로 말미암아 십자가가 이제는 저주의 사형 틀이 아니라 사랑의 심벌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이전부터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 십자가는 타 종교처럼 고행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역시 이웃을 위해 나를 부인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이며 십자가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 곧 나를 부인하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까지 당신을 부인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막 14:36)"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평생 순종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의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의 제사였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입술로는 죽는데 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큰 소리를 치고서 막상 위기가 닥쳤을 때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난 후에는 큰 고난 앞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고 자신을 부인하는 마음으로 자청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입니다.
(빌 2:7-8)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과거와 현실은 어떻습니까?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그 은혜를 잊은 지 오랩니다.
원수나 이웃은 고사하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가족과 사랑에 빚을 진 이웃조차 무관심하게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요, 새 사람을 입은 성도라고 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까?
3. 성도의 마땅한 삶
바율 사도의 편지인 에베소서를 읽게 될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이방인이었고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에베소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똑같이 숭배했었고 에베소 사람들과 똑같은 죄악을 범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를 믿은 이후에 그들은 육신적으로 과거에 살던 에베소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살고 있었지만 그들의 영적인 신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에베소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로 성도라고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엡 5:3,4)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여기서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무리라는 말로 구별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거룩하신 분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여러 종교가 저마다 자기들이 믿는 신을 절대자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다 인간들이 만든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하게 누구에게 만들어진 분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신들과 구별되신 분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을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 거룩하신 하나님은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구별하는 잣대로 할례와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창 17: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2)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신 몇 가지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 자기를 부인하는 자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다) 서로 사랑하는 자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 오늘 성경에서는 에베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거룩한 새 사람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하나님을 본받는 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증표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의 구별된 삶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들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신이라고 하며 그 앞에 제사하고 그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신전에서 공인된 창녀들과 음행을 하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무감각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현재 에베소 교회에 몸담고 있는 성도들도 과거에는 그러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음란한 방법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에베소의 불신자들과 분명히 차별화되어야 함을 오늘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엡 5:3-5]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1) 부정적인 삶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에베소 사람들처럼 부정적인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음란한 헬라 종교에 빠져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신전에서 음란한 성행위를 하는 것을 종교적인 의식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언행은 음란한 말을 농담으로 주고받으면서도 그것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에베소에 살지만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음란한 우상 숭배를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은 물론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람을 받는 성도들에게는 합당치 않은 삶이며 더욱이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긍정적인 삶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방인들과 지역을 달리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따로 모여서 산다고 하면 음란하게 우상을 숭배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과 이웃하고 그들과 더불어 장사하고 그들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주변의 문화가 음란한 문화요 우상의 문화이기 때문에 거기서 살고 있는 한 그들과 구별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입이 있는데 불신자와 만났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잠잠하게 있는 다는 것도 한 두 번은 가능할 수 있지만 항상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러한 환경에서 예수를 믿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음란하게 우상을 숭배하며 음란한 말을 주고 받으며 탐욕스럽게 살아가는 에베소 사람들과 똑같이 거짓말을 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고 음란한 말을 하지 말고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는 말 감사하는 말을 하는 긍정적인 삶을 살 때 누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언행을 통해서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진국일수록 법이 잘 지켜지기 때문에 개개인의 행복을 보장 받을 수 있는 반면, 미개한 나라 일 수 록 무법천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법천지가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지 말라, 하라’는 법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오늘 성경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이천 여 년 전 에베소 교회에 보낸 신앙의 편지입니다. 당시 에베소 지역의 문화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교회를 주변으로 점집 무당집이 즐비하고 교회를 마주하고 있는 큰 불상은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땅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복을 달라고 그 앞에 절을 하고
2) 연례 행사처럼 광교산에서 무당들이 집단으로 모여 전통 굿 잔치를 벌인다는 프랭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3) 우리나라처럼 돈만 있으면 도시나 지방을 막론하고 어디서든지 어느 때든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음대로 술 마시고, 춤추고, 성매매를 할 수 있는 나라는 흔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러한 세상을 오래 살아가다 보니 마치 소돔성의 롯처럼 안타까운 마음도 의분도 사라진지 오랩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 중에 사업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워 그러한 문화에 오염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우상과 음란 문화에 미래의 꿈나무들인 청소년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물들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과거에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처럼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고 그들처럼 살았던 죄인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으며 성도라 일컬어 주시고 목사 장로 집사가 되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 변화는 내가 예수를 믿고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거룩한 사람이 되었나?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고 세례를 받고 직분자가 된 것으로 다가 아니라, 우리의 언행 심사가 얼마나 우상을 숭배하는 불신자와 다른가 하는 차별화된 삶으로 입증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거룩한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들은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법인 성경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신 10: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맺어야 할 빛의 열매요, 빛의 열매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아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엡 5: 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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